365화
가을은 이별을 계절이라고 하던데 사실 이별보다는 그리움의 계절인 것 같다.
어쩌면 고동수 감독님의 영화에도 그리움이라는 게 담겨 있어서 더더욱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의 생각을 공유한다는 건 뭔가 크게 열리는 기분이다.
그래서 1, 2권의 소설 교정을 검수할 때 조금 더 디테일을 집어넣은 것 같다.
곧 게임도 출시되고 소설도 출간되는데 이상하게 두근거림은 없다.
게임은 뭐 경 트리오가 알아서 잘하겠고 책 출간은 미국에 인쇄돼서 팔리려고 해서 그런지 별 감응이 없다.
잘되면 좋고 잘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마치 복권을 산 느낌이다. 마음가짐이 그렇단 말이다.
“시하야. 이제 어린이집 가야지.”
“시하는 이미 준비대써!”
시하가 펭귄 가방을 들고 쪼르르 나온다.
이제 저 펭귄 가방은 오래 썼으니까 바꿔주고 싶다.
하지만 버리자고 하면 못 버리게 될 게 분명하다.
지금 옷장에 못 입고 있는 펭귄 잠옷이 남아있으니까.
추억이기도 하지만 이별도 필요한 법인데.
아, 이렇게 생각하니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 맞나 보다.
11월인 지금.
도대체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11월과 12월은 좀 여유롭게 일할 생각이다.
10월까지 정말 쉼 없이 일을 엄청나게 했던 것 같아서. 조금은 지쳤다.
“문 연다.”
“출발! 출발!”
시하가 도도도 달려간다.
이제 익숙할 법도 한데 아직도 시하는 레드 차가 좋나 보다.
나중에 크면 아주 멋진 빨간 차로 뽑아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형아! 양갱이 이써.”
“응. 레드 차가 있…. 어? 양갱이?!”
차로 가니 정말로 연양갱 하나가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흰 봉투도 함께.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있지 않았다.
부웅.
아침 출근 시간이라서 차만 잔뜩 지나간다.
대체 이걸 어디서 누가 놔두었는지 알 수 없다.
혹시나 알 수 있나 싶어서 봉투를 열어보니 꼬깃꼬깃한 돈이 들어있었다.
30만 원.
“형아. 머 이써? 편지?”
“아니. 돈 있네. 할머니 6개.”
“돈?!”
“응. 근데 이걸 누가 끼운 거지?”
시하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형아. 형아. 시하 아라.”
“어? 시하야. 누가 놓아두었는지 알아? 혹시 시하 다 봤어?!”
“아냐. 시하 몰라. 시하가 어떠케 아라.”
“그건 그렇지.”
아까 다 안다며! 난 진짜 시하가 누가 이걸 뒀는지 본 줄 알았네.
“샘이 말해써. 주우면 경찰 아찌에게 져야 해!”
“어? 맞지. 그건 맞지. 잘 배웠네.”
“시하 다 아라!”
그걸 아는 거였냐!
우리 시하는 이걸 주인 찾아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시하야! 설사 주인을 못 찾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경찰서에 가서 찾아주자!
“어린이집 가기 전에 경찰서로 가자. 이거 시하가 잘 지키며 들고 있어.”
“아라써. 경찰 아찌랑 범인 차자.”
“범인이 아니라 주인을 찾아주는 거겠지.”
“아코!”
시하가 실수했다는 듯이 이마를 손으로 살짝 쳤다.
하긴. 경찰 하면 범인이라는 단어가 세트이긴 하지. 시하가 이상한 거 아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어린이집이 아니라 경찰서를 먼저 가게 되었다.
“형아. 삐뽀삐뽀 마나.”
“응. 많네.”
경찰차 보고 삐뽀삐뽀라니. 이름이 너무 귀여워진 거 아니니?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경찰이 의문 어린 눈으로 본다.
“어쩐 일이세요?”
그 말에 시하가 말했다.
“경찰 아찌. 경찰 아찌는 후 부러 하세여? 술 마니 머거써여. 내리세여. 하세여?”
“어? 으응. 뭐, 그런 일도 하지.”
아무래도 시하가 예전에 본 ‘귀신 탐정’ 영화를 기억했나 보다.
그때 경찰이 후 불라고 했지. 암.
역시 시하의 기억력은 얕볼 수 없다.
“구러면 경찰 아찌. 범인도 자바여? 기신도?”
“어? 범인도 잡는데 귀신은 못 잡아. 어떡하지?”
“정말 어떡해요! 기신이 막 사람 놀리면 어떠케 자바여! 큰일나여!”
“어? 그러게. 진짜. 하하하.”
나는 시하의 어깨를 콕콕 건드렸다.
“시하야. 그거 말하려고 온 거 아니잖아.”
“아코!”
시하가 이마를 탁 친다.
아무래도 호기심을 채우느라 깜빡한 모양이다. 그럴 수 있지.
손에 있는 흰 봉투랑 연양갱을 경찰 아저씨에게 내민다.
“이게 뭐야?”
“이거 시하 차에 이써써여. 레드 차. 군데 누가 깜빵하고 두고 가써여.”
“깜빵이 아니라 깜빡이겠지.”
“깜빵.”
“깜빵이면 큰일 나지.”
경찰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나도 이제는 시하의 발음에 익숙해서 같이 하하하 웃는다.
“사실 제 차 앞 유리에 흰 봉투랑 양갱이 놓여 있더라고요. 거기 안에 돈이 들어 있던데 이런 거 줄 사람이 저희에게는 없어서. 아무튼, 뭔지 몰라서 시하가 경찰서에 주러 온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난 또 이거 편지랑 수고한다고 양갱 준 줄 알았네.”
“아하하. 착각하실 수도 있죠.”
시하가 경찰에게 말했다.
“경찰 아찌. 이거 범인 차자 져야 해여. 꼭이여.”
“저기. 범인이 아니라 주인이겠지.”
“아코! 시하가 또 범인이래써!”
“푸흡. 알겠어. 이 경찰 아저씨가 꼭 범인 찾아줄게. 아니! 주인 찾아줄게.”
시하가 자꾸 범인이라고 하니까 경찰조차 말이 잘못 나와버렸다.
자기도 말이 헛나온 게 웃긴지 키득거렸다.
나를 보더니.
“아! 혹시 차량 블랙박스 있으세요?”
“네. 있긴 해요.”
“아, 그럼 혹시 줘보실래요. 누가 놓고 간 건지 얼굴이 나왔을 것 같은데.”
“아, 근데 지금 어린이집 가야 하는데 시하 데려다주고 와도 될까요?”
“그럼 그러세요.”
“네. 그럼 나중에 뵐게요.”
“경찰 아찌. 바이바이. 꼭 차자져여.”
경찰이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든다.
나도 시하를 데려다주고 블랙박스 확인 좀 해봐야겠다.
아, 회사 좀 늦을지도 모르겠다고 전화해야겠네.
시하 데려다주고 다시 블랙박스 확인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
시하가 평소보다 어린이집에 늦게 도착했다.
승준은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시하야. 오늘 왜 늦었어?”
“시하 돈이랑 양갱이 주어써. 구래서 경찰 아찌한테 다 져써.”
“와! 경찰차 바써?”
“삐뽀삐뽀 바써. 머시써.”
“사진은?”
“!!! 시하 사진 못 찌거써.”
“다음에 나랑 같이 경찰차에서 사진 찍자. 그리고 경찰 오토바이도 멋있으니까 그것도.”
“시하 경찰 오토바이 못 바써.”
“다음에 나랑 같이 보자.”
남자아이들이 경찰차와 경찰 오토바이의 이야기에 살금살금 시하랑 승준이 쪽으로 몰렸다.
종수가 자랑했다.
“나는 저번 달에 경찰의 날이었는데 그때 편지 써서 줬어! 사진도 잔뜩 찍었어. 어때? 부럽지!”
“경찰의 날 모야? 경찰 생일이야?”
“경찰 아저씨 고마워요! 하는 날이거든. 그것도 몰라? 경찰 아저씨가 매일 밤에 돌아다니며 순찰해 주잖아.”
“시하 아라. 후 부세여. 하자나.”
“어? 그것도 하긴 하지.”
재휘가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경찰 아저씨 무서워.”
“무서울 게 뭐가 있냐.”
“그냥. 혹시 나한테 범인이야! 하고 말하면서 잡으러 올지도 모르잖아.”
“엄마가 나쁜 짓 안 하면 안 잡아간댔어.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어.”
“그래도 무서워.”
좋아하는 애들도 있다면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그걸 듣다가 다가왔다.
“그럼 오늘은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해 볼까요?!”
“???”
“아…. 요즘에는 그런 거 안 하는구나. 나 때는 다들 어릴 때 했다구!”
“???”
“이를테면 숨바꼭질 같은 거예요. 한 팀은 경찰하고 한 팀은 도둑을 하고.”
“!!!”
아이들이 재밌어 보이는지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도 이런 활동적인 게임을 하는 게 좋았다.
쌀쌀해진 이때. 몸도 움직이고 체력도 뺏고 머리도 쓴다.
1석 3조! 아주 이득인 게임이다.
“그럼 선생님이 생각한 룰을 설명하겠어요!”
경찰 4명, 도둑 4명.
잡힌 도둑은 경찰서에 갈 수 있고 도둑이 잡힌 동료를 구할 수 있다.
구하는 방법은 수갑의 열쇠를 찾는 것.
열쇠 하나당 한 사람이 풀려날 수 있다.
그리고 보물을 다 찾아서 도둑의 아지트에 놓으면 승리다.
경찰은 간단하다. 도둑을 모두 잡으면 승리다.
아지트 앞에서 계속 기다리는 건 반칙이다. 3분 이상 지나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보물 앞에서 지키는 것도 반칙이다.
다만 감옥을 지키고 있는 건 가능하다.
“…라는 룰이에요. 너무 어렵죠? 일단 해 보면 감이 잡혀요! 자! 밖으로 나가요!”
선생님은 훌라후프를 잔뜩 들고 나왔다.
장소는 어린이집에 있는 넓은 마당.
놀이터도 있는 곳이다.
훌라후프를 네 개를 휙휙 놓았다.
“여기가 바로 도둑의 아지트예요.”
그다음 도둑의 아지트와 떨어진 곳에서 훌라후프를 휙휙 놓았다.
“여기는 경찰서! 감옥이 있는 곳이에요.”
혹시나 해서 경고했다.
미끄럼틀 타러 위로 올라가지 말기.
혹시나 떨어져서 다칠 수 있으니 그걸 방지하기 위한 규칙이다.
“자, 그럼 누가 도둑이랑 경찰 할래요? 정해볼까요?”
다들 경찰 이야기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경찰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모두가 경찰을 할 수 없는 법!
“이거 끝나면 바꿔서 해볼 거예요. 그러니 사이좋게 도둑 할 사람!”
“시하 도둑 하께!”
“응. 시하 도둑 하자.”
시하가 오면 늘 따라오는 승준도 도둑을 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오빠랑 같은 팀을 하려고 하나가 가면 연주도 따라간다.
그렇게 예상대로 도둑은 시하팀이 하게 되었다.
경찰은 종수팀으로 정해졌다.
“그럼 보물은 여기에 둘게요.”
선생님이 훌라우프를 휙 던지더니 그 안에 보물을 넣었다.
“샘. 그거 보물이에여?”
“응. 보물이야.”
“젠가 블록인데여?”
“사실 이건 매직 스톤이라는 물건이야.”
“매직 스톤? 시하 매직 아라! 매직 팬티!”
“아니. 그 매직이 맞긴 한데. 아무튼! 이 매직 스톤만 있으면 마술을 쓸 수 있어! 그래서 보물이야.”
“!!!”
원래 설정하기 나름이었다.
소품은 재활용하기 나름이고.
선생님은 훌라후프를 들고 보물과 반대쪽에 휙 던졌다.
그리고.
“여기는 열쇠 있다!”
“샘. 해적 룰렛 칼인데?”
“응. 이게 바로 수갑 열쇠야!”
“!!!”
원래 소품은 쓰기 나름이다.
아무튼, 지금 선생님은 다이아몬드의 꼭짓점에 다들 위치하게 했다.
경찰서, 아지트, 열쇠, 보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렇게 배치하면 양옆으로 경찰과 도둑이 퍼질 수밖에 없다.
“그럼 작전 시간 줄게요. 다들 경찰서와 아지트로 가서 작전 짜세요. 5분 뒤에 시작할게요.”
“네!”
과연 아이들이 작전을 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시작되었다.
먼저 종수팀의 브레인은 역시 종수였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세 명은 보물 있는 쪽으로 가자.”
“왜?”
“당연히 보물이 제일 중요하니까. 몇 개 가져가게 해도 괜찮아. 남은 보물을 지키면 돼.”
“그렇구나.”
“그리고 열쇠 쪽에는 제일 발 빠른 사람이 가자. 빨리 잡을 수 있게.”
수가 줄어든 대신 제일 빠른 별동대를 보내는 종수.
굉장한 판단력이었다.
“먼저 제일 느린 하나부터 잡자. 그다음은 시하야. 승준이는 빠르니까 어쩔 수 없어. 못 잡아.”
“그렇네.”
“그러니까 승준이 빼고 일단 다 잡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하하. 오승준 혼자면 아무것도 못 할 거야.”
저기서 운동신경이 가장 뛰어난 오승준을 잡는 건 먼저 포기한다.
대신에 혼자로 고립시킨다.
종수는 지금까지 싸워왔던 경험을 미루어 최선을 대책을 짰다.
지금까지 싸웠던 전적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증거.
오늘의 종수는 빛나고 있었다.
“그럼 파이팅하자!”
“응!”
그렇게 종수가 전의를 다지고 있을 때 시하팀도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이쪽 브레인이라고 하면 연주지만 일단 대장은 시하라서 발언을 기다렸다.
“시하야. 어떻게 할까?”
“모두 다 바로 져!”
“응?”
“구리고 바로 경찰 하자!”
“!!!”
4살 이시하. 처음에 도둑을 하겠다고 했지만 경찰을 빨리하고 싶었다.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