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한국에는 나이에 따른 높임말과 반말이 있는데 영어는 한국처럼 나뉘어 있지 않다.
존중하는 표현은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이런 부분이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미묘한 느낌은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은 상사에게 대화하는데 그게 사원에게 상당히 짜증 나는 상황이다.
한참 혼나고 열 받아서 반말로 지껄이는 장면.
“여기 부분 번역을 이렇게 할 줄은 몰랐네. 생각보다 잘하는데? 베테랑처럼 말이야.”
고동수 감독이 재밌다는 듯이 나를 본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뭐, 반말 같은 경우는 그냥 욕설을 살짝 섞어서 넣어주는 게 좋더라고요. 상황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이런 부분도 괜찮지.”
“네. 되도록 호칭을 쓰는 식으로 해도 반말할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그런 식으로 표현했어요.”
“아주 마음에 드는데? 그런데 여기 좀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대학 부분 있잖아. 스카이 나오는 부분.”
“아, 네. 출신 대학. 저도 그거 고민했는데 일단 남겨뒀어요. 어떻게 할까요? 하버드랑 옥스퍼드 출신으로 바꿔요?”
“그러는 게 더 좋지 않겠어? 관객들이 자막으로 볼 때 확 와닿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부분을 밑줄을 치고 다른 대학으로 넣었다.
원래 정확한 뜻을 번역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식으로 관객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바꾸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여기 앞부분은 이 정도면 되겠다. 나머지는 좀 보면서 뉘앙스를 조금씩 바꾸자고.”
“네. 알겠습니다.”
다시 영화를 시청했다.
사실 번역을 할 때는 대사만 보면 안 된다.
표정, 목소리의 어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참~ 자알~ 한다! 라는 대사를 했을 때 이게 비꼰 표현인데 그냥 잘한다고 칭찬하는 대사를 썼다고 해보자.
그러면 틀린 번역이 아닌가.
관객들에게 잘못 전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본만 보지 않고 영화를 보면서 뉘앙스를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어느새 내가 가지고 온 대본은 파란색 볼펜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좀 쉴까?”
“그러죠. 시간이 어쩌다 이렇게 됐죠?”
“그러니까. 담배 한 대 피우고. 아, 담배 안 피운댔지?”
“네.”
“뭐, 그럴 수 있지. 그럼 나 한 대 피우고 온다?”
“같이 가요.”
“냄새 날 텐데.”
“바람 부는 방향으로 잘 서 있어볼게요. 혼자 피우면 심심하시잖아요.”
“아니야. 내가 바람 부는 방향 잘 보고 옮길게. 넌 그냥 서 있기만 해.”
감독님이 신줏단지 모시듯 한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으신 분이란 말이야.
아무래도 두 번은 거절 안 하신다.
감독님이 담배를 물고 피우는 모습을 보니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감독님 영화에서도 직장인들이 담배를 피웠지.
상사는 담배를 꺼낸다. 부하 직원은 라이터를 꺼낸다.
이 두 사람의 간극만으로도 위치 관계를 나타낸다.
영화에서 한 번도 상사가 라이터를 꺼낸 적이 없다.
이 역시 감독님이 노리고 찍은 거겠지.
“라이터가 없어서 죄송하네요.”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래도 토치는 써봤으니까 가끔 들고 다닐까요?”
“그걸로 불 피우면 내 얼굴 타겠다!”
“부하 직원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요? 아! 이 상사 얼굴 태워야 하는데.”
“푸핫! 영화 얘기랑 이렇게 연결하네.”
“감독님은 참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지는 것 같아요. 그냥 못 보겠어요.”
“의도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
“에이. 보니까 지문에 물건 같은 건 그냥 넣는 게 없으신 거 같던데.”
내 말에 감독님은 별말 없이 빙긋 웃음만 보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만 있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점이 또 대단한 것 같다.
“후우. 들어가자! 다 폈다.”
“그래요. 또 작업합시다.”
영화를 보고 멈추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 대사의 숨은 의미를 영어로 번역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
아까 말한 담배와 라이터.
‘라이터 있냐?’라는 말에 ‘불 좀 붙여봐라’라고 하는 상하 조직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들.
거기에 관해 미묘하게 다르게 해야 하는 표현들.
함께 작업하면서 느꼈다.
어쩌면 영화 번역은 우리가 솔루션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이 솔루션의 평가는 아마 관객들이 내려주겠지.
그 평가가 무섭기도 하면서 기대가 되었다.
***
굉장히 솔루션을 잘 찾았지만 때로는 찾지 못하고 넘긴 몇몇 단어도 있었다.
합성어 같은 경우는 외국 사람들이 잘 쓰는 제품 같은 두 개를 연결하거나 해야 하는데 거기에 관해서는 고민이 필요했다.
작품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님이 말하는 의도들을 두드러지게 반영할 것이다.
일은 다 끝난 건 아니었지만 몇몇 고민하게 만드는 것만 해결하면 마무리가 될 듯싶다.
“형아. 반역해?”
“반역이 아니라 번역. 반역하면 큰일 나지.”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대신 성공하면 혁명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선량한 시민이 되고 싶은 나에게는 반역은 어불성설이다.
“시하도 번역할래.”
“응? 시하도 해볼래?”
내가 번역 작업을 하고 있으니 시하도 하고 싶은가 보다.
통역 연습으로 매일 입을 풀 때도 요즘 점점 따라 한다.
이대로면 그냥 자연스럽게 영어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근데 번역은 글자를 알아야 하는데. 으음. 그냥 통역하자.
“어떤 말을 번역하고 싶은데?”
“시하가 다 들어써. 그거.”
“???”
뭘 들었다는 걸까? 갑자기 엄청 궁금해지는데?
시하가 말했다.
“머라카노!”
“푸흡. 또 어디서 사투리를 듣고 온 거야?”
“사투리 모야?”
“아. 표준어가 아닌 으음.”
뭐라고 설명할까 하다가.
“여기 말고. 저기 그때 새해 보러 갔던 부산 바다 기억해?”
“시하 기억해. 머리에 이써.”
시하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콕콕 두드린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쓰담쓰담 해주었다.
“거기 부산에 사는 사람이 하는 말이 사투리야. 알겠지?”
“시하 다 아라. 다 들어써.”
아무래도 알아들었나 보다. 지방이니 표준어니 하는 단어도 잘 모를 게 분명하니까 일단 이렇게라도 설명해 두자.
어쩌면 영화 번역도 그렇지만 시하 언어도 매번 솔루션을 찾아갔기 때문에 더더욱 감독님과 작업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형아. 머라카노가 모야?”
“뭔지도 모르고 말한 거야? 뭐라고 말하는데? 라고 하는 말이야.”
“머라카노!”
“형아한테 한 말은 아니지? 못 알아들어서 쓴 말은 아니지?”
“시하 다 아라.”
“그게 무슨 뜻이지?”
시하만 다 알고 형아는 모르겠어!
근데 시하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물어봤다.
후후후. 이럴 때는 앱을 사용해 줘야지.
“신기한 거 보여줄게. 시하야. 여기 머라카노! 하고 말해봐. 그럼 영어로 뭔지 이게 알려줘.”
“머라카노!”
[what are you talking about?]
“!!!”
시하가 신기한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바로 21세기 과학이다!
“와다다 토끼 어부바?!”
“어떻게 들리면 그렇게 들려?!”
“형아. 토끼 어부바 해?”
얼추 그렇게 들리는 것 같기도?
뭐지? 시하 언어로 세뇌되고 있어. 정신 차려야 해!
나는 제대로 몇 번이나 발음해 주었다.
시하도 열심히 따라 한다.
“형아. 또!”
“또?”
“딴 거 알고 시퍼.”
“오늘 공부 열의가 대단한데?”
“공부 아냐. 형아랑 노는 거야.”
“크흑.”
공부는 노는 것이다! 이 무슨 천재가 할 법한 발언인가.
그렇다면 기본적인 한국인 회화를 알려줘야겠다.
“자!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영어!”
“영어!”
“따라 해 보자. 헬로!”
“헬로!”
“나이스 투 밋 유! 나이스 투 밋 유 투!”
“나이스? 시하 아라! 사장님 나이스 샷!”
“시하야. 그건 몰라도 돼. 어디서 들은 거야?”
“티비에서 바써.”
나이스 샷이 영어기는 하지.
이러고 보면 은근 우리나라도 영어를 좀 섞어 쓰는 것 같다.
아무튼, 그건 아부 용어라고! 물론 아부가 아닐 수 있는데 티비에서 본 거니까 보통 그런 거 아닐까?
이것 역시도 영화처럼 뉘앙스에 따라 전혀 뜻이 달라진다.
“흠흠. 아무튼, 다음은 이거야. 땡큐 베리 마치!”
“땡쿠 베리 망치!”
망치는 또 어디서 나온 걸까?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발음이다.
저거면 망치 줘서 고마워! 라고 해석해야 하나?
“형아. 시하 이제 영어 잘해.”
“이걸로?!”
아무리 언어는 자신감이라고 하지만……. 거, 너무 과한 거 아니오. 조금 진정하시구려.
“시하 영어 노래도 아라.”
“진짜? 그건 처음 듣는데?”
“샘이 알려져써. 시하 영어 노래도 불러.”
“우와. 한 번 들려줄 수 있어?”
“시하는 형아한테 백 번이라도 불러 줄 수 이써. 형아는 시하 형아니까.”
“크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형아가 전에 같이 인강 듣자고 했지! 왜 혼자만 듣고 열심히 응용하냐!
“그럼 한번 들어볼까? 하나, 둘, 셋!”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지!”
그거 알파벳 외울 때 멜로디 아니니?
어? 이것도 음. 영어 노래이긴 하지.
시하가 열심열심 노래를 부른다. 아주 감동한 채 들어보자.
“…와이! 앤! 지! 나우 나나나 에이 비 씨!”
나나나 부분 까먹었지? 아주 넘어가는 게 자연스러운데?
아마 다음이 Next time won’t you sing with me?로 기억한다.
이것도 이상하게 넘어갈 것 같은데.
“넥타이! 언츄 씽씽이!”
“전혀 달라!”
“아? 아냐. 마자. 넥타이는 영어야.”
“그건 맞는데. 아니지.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싱싱이는 뭐야? 이건 영어 아니잖아.”
“씽 영어야. 시하 아라. sing!”
“어? 그거 맞긴 하지.”
설마 sing sing e라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이야?!
노래 두 번 강조! e는 인터넷인가 그럼?
“싱은 노래야. 노래노래 라는 말이야.”
“근데 시하야. 그거 원래 가사 아니지? 형아는 원래 가사 아는데?”
“형아. 시하가 형아 아는 거 다 아라. 구래서 시하가 모르는 거 불러써.”
“일부러 다르게 불렀다고?”
“마자!”
그렇게 깊은 뜻이…….
“그럼 원래대로 한번 불러볼래?”
“형아. 이제 시하 힘드러. 다움에 해주께.”
뭐지? 아까 백번도 불러 준다며! 역시 기억 못 하는 거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군데 오늘은 시하가 만든 에이비씨 노래 해주께.”
그건 백 번 해 주는 거야?!
아주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네.
***
무더위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영어 번역도 충분히 끝냈고 여러 가지 일 처리도 하면서 영어 소설이 검수가 되는 와중이었다.
시기는 이미 정해졌다.
경트리오가 새로운 시즌2를 출시할 시기와 함께 출간까지 할 생각이었다.
이벤트도 같이 돌리면서 말이다.
그걸 말해 줬더니 경트리오가 덩실덩실 춤을 췄다. 책 진짜 잘 팔리면 좋겠다고. 물론 자기들 게임도.
아마 게임은 잘 팔릴 것이다.
시즌1을 플레이하고 시즌2를 기다리고 있는 유저분들이 있으니까.
이미 최소로 구매해줄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거다.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기대를 배반당할 때 등을 돌려버릴 것이다. 언제나 시장은 냉정하니까.
소설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OSMU를 하지만 이게 팔려야 의미가 있고 읽어줘야 의미가 있다.
이런 유의미한 IP를 확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출 평타는 치니까 하는 것이다.
대작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해리포터를 거절한 그 많은 출판사가 이 책이 이렇게 잘될 줄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아무튼, 게임 출시일은 11월로 잡혀 있다.
[안경호 님이 이시혁 님을 초대했습니다.]
-시혁 : ???
-안경호 : 와, 죽을 것 같다....
-박경준 : ㅎㅎㅎ이미 난 죽음
-신경환 : 시혁이는 왜 초대했냐 미친놈들아!!!
-안경호 : ??? 시즌2의 시나리오 작가인데 같이 이야기 나눠야지. 런칭도 얼마 안 남았는데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하는 거징
-박경준 : 우리는 함께다! 우리는 함께다!
-신경환 : ㅁㅊ... 시혁아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시혁 : ㅎㅎㅎ;;;; 고생해;;;;
[이시혁 님이 나갔습니다.]
[안경호 님이 이시혁 님을 초대했습니다.]
시혁 : ???
박경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초대지옥ㅋㅋㅋㅋㅋ엌ㅋㅋㅋ
안경호 : 함께 나누자 ㅎㅎㅎ
안경호 : 나가지 마라.
시혁 : ;;;
그렇게 11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