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여기에는 마땅히 규칙성이 있다.
중학교 문제치고는 어려운 거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 규칙이 보이지 않는다.
더해도 이상하고 빼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곱한다? 나눈다?
헷갈리게 만들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규칙이 있는가 싶다.
“형아. 아라?”
“응? 이제 알 것 같아. 응. 응.”
시하의 저 얼굴을 보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형아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동글동글한 게 아주 귀엽단 말이지. 볼살도 톡 튀어나와서 동글동글하고. 어? 잠시만 동글동글?
다시 문제를 봤다.
어떤 규칙성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아, 뭐야. 이거. 엄청 쉬운 문제였네.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 풀 수 있는 것도 못 푸는 법이다.
“알았다. 동그라미가 몇 개 있는지가 문제야. 보이지? 1111=0이야. 동그라미가 없으니까. 8908은 숫자에 동그라미가 6개니까 6! 그러니까 여기 답은.”
[9828=?]
“5네!”
1번이 5라고 되어 있고 2번이 6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는 왼쪽으로 걸어야 한다.
“형아 대다내!”
“우와! 진짜다! 쉽다! 우리도 풀 수 있는 문제였네!”
“하나도 들으니까 알게써!”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됐어. 이걸로 형아라는 지위는 지켜졌어. 내가 아이들에게 이런 똑똑한 이미지로 통하다니.
그냥 바보 같은 착한 형이라는 포지션을 해둘 걸 그랬다.
“오오오! 형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는 무슨 중학교 문제가 이리 어려워! 라고 생각했는데 금방 푸시네요.”
미안.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사실은 그냥 유아 수준 문제를 풀고 싶었다고!
한바탕 문제를 풀고 다시 걸음을 걸었다.
또 문제가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걷는데 세 갈래 길이 나왔다.
근데 이게 또 재밌었다.
이번 문제는 하나였으니까.
[털이 0000한 강아지]
푸른 잎사귀로 덥힌 벽에 각각의 정답이 걸려 있다.
“왼쪽은 복실복실, 가운데는 복슬복슬, 오른쪽은 바셀바셀이야. 어떤 걸까?”
근데 미로를 왜 이렇게 재밌게 구성했대? 나중에 애들이랑 놀러 또 오고 싶을 것 같다.
가만. 여기 계곡에 가족들이 많이 오니까 정원을 이렇게 구성한 거 같은데?
심지어 이건 걸어놓은 거라 문제들도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하가 말했다.
“복실이. 복슬이. 바셀이. 복실이가 더 기여어.”
“???”
저기 시하야? 강아지 이름 정하는 게 아니거든?
승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는 바셀바셀이야.”
아니. 그건 누가 봐도 아니잖아!
“바르셀로나 생각나!”
갑자기 사커로 생각이 유턴해서 마음에 들었구나?! 근데 이거 정답 맞히는 게임이야. 너희들 마음에 드는 거 맞혀봤자 소용없어.
“그럼 하나는 복슬복슬!”
어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쩌다 보니 세 갈래 길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하가 승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승준아. 나중에 봐!”
“시하야. 먼저 갈게!”
“하나도 간다!”
어쩔 수 없이 복실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정답은 하나가 간 곳인 ‘복슬복슬’이다.
맞춤법 퀴즈니까 맞겠지. 이래 봬도 국문과니까.
“형님. 정답이 뭡니까.”
“복슬복슬.”
“막히겠네요.”
그 말을 하자마자 코너를 도는데 미로에서 가로막혔다.
근데 특이한 게 캐릭터 조형이 있었다.
“형아. 다람지야. 다람지. 도토리 들고 이써.”
“그러네?”
막다른 길로 가서 실망했는데 의외로 이런 게 있어서 놀랐다.
뭔가 이 막다른 길이 오히려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돌아가는 길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이거 아까는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있네요.”
“그러게.”
“너무 잘 맞추는 것도 안 좋지만 틀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요?”
“여기 진짜 잘 지었다. 심심하지 않네?”
“정말 그래요.”
얼마나 미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는지 대충 상상이 간다.
근데 이 호텔은 여기에 이렇게 힘써도 되는 건가?
뭐,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긴 성수기에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잘되겠지.
시하는 도토리를 톡톡 건드리며 신기해했다.
다람쥐 주변을 빙빙 돈다.
“그냥 대충 미로만 만들 법도 한데 구상을 잘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생각해 보니 빨간색으로 바뀌었을 때부터 이런 조형물이 있네요?”
“그것도 그러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시하가 나를 불렀다.
“형아! 시하 다람지랑 사진 찌거져!”
“응. 같이 찍으면 되지?”
“아니. 형아랑 가치. 백동 형아가 찌거.”
백동환이 자신을 가리키며 ‘나는?’ 하고 물었지만 시하는 형아랑 먼저 같이 찍겠다고 한다.
뭔가 섭섭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시하는 형아를 많이 좋아한다구.
“그럼 찍습니다.”
“형아. 여기 도토리 가치 드러야 해.”
“다람쥐가 들고 있는데도?”
“응. 여기 가치.”
나는 다람쥐의 도토리를 같이 받쳐 들었다.
시하도 팔을 위로 들어서 도토리를 든다.
이제 포즈까지 정해주는구나.
뭐, 이런 사진에 포즈가 중요하긴 하지.
“찍습니다.”
“어.”
“하나, 둘, 셋!”
찰칵.
사진을 찍었다.
백동환도 헛둘헛둘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번에는 셀카다.
“백동 형아. 다람지 드러져.”
“그거 못 들어. 무거워서.”
“아냐. 백동 형아 할 수 이써. 하팅!”
“…….”
본인이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도 시하는 전혀 아니라고 한다.
백동환아. 어마어마하구나.
“그럼 도토리나 찌그려 뜨려야겠다.”
시하가 깜짝 놀라서 내 다리를 잡았다.
“도토리 다치게 안 대!”
“이얍!”
“안대!”
시하가 팔을 벌려 막았지만 도토리는 백동환 손에 잡혔다.
시하가 두 손을 볼에 꼬옥 붙이며 입을 벌린다.
“도토리묵 대써!”
“푸흡.”
도토리 찌그러지면 도토리묵이 되는 거야?
너무 재밌어서 내 폰을 들어 셀카를 찍었다.
찰칵.
여기 미로에 오길 정말 잘했다.
“그럼 이제 갈까?”
“형아. 잠시만. 인사하고 가야지.”
“아, 그렇지.”
“람지, 람지야. 이게 시하 가께. 이제 도토리묵 먹고 놀고 이써. 바이바이.”
저 다람쥐는 람지라고 정해졌나 보다.
뭔가 고든 램지가 생각나네.
“형아도 인사해야지.”
“알겠어. 람지람지야. 도토리만 먹다가 도토리묵이 되어서 정말 맛있을 거야. 나중에 양념장도 뿌려 먹으렴. 그럼 갈게. 안녕.”
다음은 백동환.
“저도요?”
“응.”
“크흠. 람지람지야. 도토리 무게를 더 많이 쳐서 근력을 더 기르렴. 그럼 안녕.”
“???”
뭔 인사가 그래. 저 도토리가 무슨 덤벨이야?!
하여간 각자 다람쥐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되돌아갔다.
이렇게 막히는 것도 나쁘지 않네.
***
어느새 우리는 마지막 관문이 왔다.
보고 나서 빵 터져버렸다.
여기 미로가 진짜 너무 재밌는 거 같아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마치 방 탈출 게임 같다는 생각이다.
하! 거기서 모티브를 얻었나?
백동환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탈출 입구에 현관문을 볼 줄 몰랐습니다.”
“그러게.”
눈앞에 떡 하니 있는 현관문.
심지어 도어락도 되어 있었는데 비밀번호를 맞혀야 나갈 수 있었다.
아니면 밖에서 다른 사람이 열어주던가.
“형아. 문제가 모야?”
“시혀기 형아. 마지막은 우리가 맞출래.”
“마자! 하나도 머리 열심히 써서 맞출래!”
아이들이 의욕적으로 말했다.
내가 너무 멋지게 맞추는 모습을 많이 보여줘서 그런가 보다.
“일단 비밀번호는 네 자리래. 문제를 풀면 비밀번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문제 말할게.”
“응!”
“영이의 아버지는 딸이 5명 있습니다. 일순, 이순, 삼순, 사순. 그렇다면 마지막 딸 이름은 뭘까요?”
승준이 코를 스윽 문지르며 말했다.
“오순!”
하나가 아니라면서 고개를 젓는다.
“영순이야!”
시하도 내 다리를 붙잡으며 말한다.
“서이순!”
“넌 대체 왜 서이를 포기 못 하는 건데!”
“너이순?”
“정말 너희들 답이 맞을까?”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본다.
각자의 답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준이 말했다.
“내가 맞아. 다섯 번째니까.”
확실히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지.
하지만 문제에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아니야. 이런 건 한 번 더 꼬아서 낸다고 했어. 그렇게 쉬우면 문제도 안 내지. 그래서 하나는 영순이라고 생각해.”
“!!!”
확실히 어려운 문제들은 답이 예쁘게 나오면 의심해봐야 한다.
하지만 답이 나와 있다니까 얘들아?
“형아. 시하 아라써! 진짜 아라써.”
“응? 뭔데?”
“영이야. 영이.”
“!!!”
그래.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영이의 아버지. 우리 시하가 그걸 잘 캐치한 것 같다.
역시! 시하는 천재라니까!
“아! 맞네! 시하 천재다!”
“우와! 시하 천재야!”
다들 답을 맞혀서 좋아했다.
그럼 남은 것은 비밀번호다. 네 자리라고 했으니까.
“그럼 비밀번호는 영이영이네?”
“시하도 그러케 생각해!”
“하나도!”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럼 비밀번호를 누르자. 0202. 삐빅. 하지만 도어락은 열리지 않았다.
이게 틀렸다고?
“아니라는데?”
“시혁이 형아. 영이 아버지가 5명이나 딸이 있었어. 일순. 그러니까. 0251?”
“오! 그런가?”
하지만 틀렸다.
답이 대체 뭐야? 정답도 맞혔는데 이렇게 되기 있냐.
백동환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른다.
“근데 보통 이런 비밀번호는 1234 아닙니까.”
“에이. 설마. 그렇게 쉬우려고.”
띠로링.
“???”
“???”
다들 의문 어린 눈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왜 비번이 1234야?!
설마 일순, 이순, 삼순, 사순?!
다시 문제를 보니까 비밀번호가 문제의 정답이라고는 안 적혀 있었다.
문제를 풀라고만 했지.
아, 이거 속았네. 그냥 비밀번호 네 자리인 네 딸을 입력하면 되는 거였다.
일, 이, 삼, 사.
엄청 쉬운 걸 괜히 뭔가 어렵게 풀었네.
완전히 속았다.
“이제 나가자.”
문이 열리고 비밀의 숲을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엄청 미로도 재밌고 모험의 느낌도 났다. 방 탈출 기분도 느꼈고.
“형아. 재미써!”
“응. 그러게.”
승준이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시혁이 형아. 저기 올라가 보자!”
“응?”
나오고 보이는 작은 전망대.
저기 올라가면 미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저러라고 만든 것 같은데?
“올라가 볼까?”
“응!”
위로 올라가자 진짜 미로가 한눈에 보였다.
심지어 포토존까지 있었다.
이 사람들 진짜 잘 만들었네. 입구부터 출구까지 다 보인다.
다른 가족들도 여기 미로에 들어왔는지 다들 여기저기 헤매는 게 보였다.
“형아. 시하 저기 이써써.”
“응.”
“군데 저기 안 가바써. 저기 머 이써.”
“그러네.”
아마 승준이 간 곳 같았다. 저기 또 다른 조형물이 보였으니까.
여기서 내려다보는 것도 좋았지만 만약 여기 먼저 올라갔다면 저 미로를 한번 가보고 싶었을 것 같다.
미로를 통과한 사람들이라면 분명 여기 전망대도 올라왔을 것 같다.
“진짜 여기 계곡에서 놀고 1박 2일 하려면 여기 호텔 예약해야겠다.”
펜션이나 이런 곳도 있지만 여기가 훨씬 좋은 것 같다.
백동환도 옆에서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소개해 줬다 이거지. 어찌 되었든 고마웠다. 이런 것들을 어쩌면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긴 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지나치지만 사는 데 문제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보면 또 좋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나.
그냥 살아도 가끔 이렇게 숨 돌리고 놀면서 쉬어야지.
일만 하려고 살아왔던 건 아니니까.
“형아. 형아.”
“응?”
“이제 가자.”
“응? 왜? 더 보고 싶지 않아? 다 봤어?”
“아냐. 더 보고 시퍼.”
“엥?”
“군데 시하 그림 그리고 시퍼.”
“!!!”
아무래도 뭔가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모양이다.
저렇게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그래. 가자. 아! 사진 한 장만 찍고.”
포토존에서 사진은 찍어줘야지.
여름은 해가 늦게 떨어진다. 지금은 저녁이 다 됐는데 노을이 보인다. 사진찍기에 적당한 타이밍이다.
“자, 다들 김치!”
찰칵!
그 소리와 함께 밑에서 승준 엄마가 올라왔다.
“아, 여기 있었네!”
아무래도 바로 출구 쪽으로 돌아오신 모양이다.
역시 현명하신 생각이다.
“잘됐네요. 다 같이 찍어요!”
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