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5화 (345/500)

345화

전시하는 날 딱 한 번 시하가 도슨트를 했다.

연습한 대로 참으로 엉뚱하게 했지만 그래도 듣는 사람들이 웃음을 보였다.

쪼끄마한 아이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 것도 귀여운데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웃긴 것이다.

그래도 시하는 떨지 않고 잘했다.

마지막에 자기가 한 작품이라고 오래 이야기했고 옆에 형아가 대단하다고 설명까지 했다.

이 설명이 대체 왜 필요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이 좋게 봐준 것 같다.

알다시피 그냥 들어온 사람도 도슨트가 설명하고 있으면 얘가 뭔 얘기를 하나 싶어서 지켜보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사람이 불어났다가 줄어들었다.

이번 경험은 시하에게 좀 더 자신감을 높여준 계기가 되었지 않았나 싶다.

“형아. 형아.”

“응?”

“도슨트 또 안 해?”

“또 하고 싶어?”

“시하 잘해.”

“응. 안 떨고 엄청 잘했어. 그럼 나중에 또 갈까?”

“아냐. 시하 마니 바서 안 해.”

“???”

“시하 다른 거 할래.”

“아, 딴 작품 할 때 또 하고 싶다고?”

“이제 시하가 형아 대다내! 마니 설명해야 해.”

“???”

대체 왜 다른 사람에게 이 형아가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지 퍼뜨려야 하는 거냐?

나만 이해 안 되는 거 아니지?

연예인 같은 일반인이 되어야 하나? 하지만 그게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타성 같은 것도 필요하니까.

뭐, 나야 굳이 알려지길 바라고 있지는 않다. 일반인이 알려져 봤자 뭐 하겠나. 너튜버를 할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시하야. 잠시만.”

“누구야?”

“홍진수 아저씨네.”

“홍아찌!”

“응.”

“시하도 들을래.”

“그래. 그럼.”

통화를 받고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홍진수 과장이 신나게 떠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시혁 씨! 오랜만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요즘 많이 바쁘시죠. 출근도 하고 번역도 하고 그래서. 그래도 거의 끝나가지 않습니까.」

“네. 뭐. 다 끝나가죠. 마지막 권만 넘기면 이것도 이제 끝이네요.”

「아직 번역할 게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아주 축복입니다.」

“저야 언제나 잘 봐줘서 감사하죠.”

「목소리도 오랜만에 들으니 좋네요. 늘 톡으로만 이야기했는데.」

“네? 저번 주에 통화하지 않았어요?”

「저번 주니까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

저번 주면 최근인 거 같은데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시간관념이 이상한 건가?

아니야. 홍 아저씨가 이상한 거야. 앗! 나도 모르게 홍 아저씨라고 생각해 버렸네.

시하 때문이다.

“홍아찌!”

「응? 아니! 시하 작가님!」

“시하가 도슨트해써. 엄청 설명 잘해써.”

「아니! 그런! 이거 시하 작가님이 도슨트한 거 기사에 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잡지 인터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면 그 경험을 살려서 책이라도 내야…….」

“저기. 홍 과장님. 진정하시죠.”

「어째서 이 엄청난 일을 숨긴 겁니까! 섭섭합니다.」

숨긴 적 없다.

그리고 섭섭할 게 뭐 있나 싶었다.

하여간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신이 없다.

“시하가 책 내께여. 그림책 내께여.”

「오오오! 부디! 나중에 자기계발서 같은 것도 냅시다. 그거 뭐지? 그래! 임티는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제목으로 책도 내고.」

“시하 이름 쓸 수 이써여. 시하 이름 써서 책 내께여.”

「이제 글자까지!」

“글자 아는 것만 저글 수 이써여. 군데 시하 할 수 이써여.”

「시하 작가님은 할 수 있습니다. 써서 보내주시면 제가 교정 교열을 완벽히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아마 힘들 것이다.

전에 스승의 날에 편지 쓴 걸 보니까 교정 교열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암호 번역을 해야 했다.

“바나나도 저글 수 이써여.”

「바나나!」

저기 홍진수 과장님. 이제 대답할 말이 생각 안 나시죠? 그렇죠?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통화를?”

「저희가 무슨 일 있으면 통화하는 사이입니까? 섭섭합니다.」

“지극히 저희는 비즈니스 관계입니다.”

「역시! KI 출판사 직원!」

“직원 아닙니다만.”

「KI 출판사 파트너쉽 멤버!」

이건 뭐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서 반박을 못 하겠네.

늘 주장하는 우리는 한 몸이다. 이건가?

근데 과장님은 이직 안 하시겠지?

「사실 일 얘기 맞습니다.」

“역시 일 얘기 맞잖아요!”

「아닙니다. 일은 그저 부가적인 것뿐이에요. 겸사겸사 곁들이는 반찬 같은 거죠.」

“그건 그것대로 회사 생활하는 데 괜찮을까 싶은데요.”

KI 출판사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대표님이 이 모습을 보시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게 분명하다.

또 시작이냐고.

「저희가 미국 출판사와 협업하고 있는 거 아시죠?」

“알고 있어요.”

「보통 제가 전담해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랬죠? 그렇게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네요.”

「역시!」

역시는 뭔 역시인가 싶은데.

「가끔 담소도 나누는데 어쩌다 보니 시혁 씨 이야기로 빠졌단 말이죠.」

“아, 번역 때문에요? 잘해 줘서?”

「아, 그것도 말하긴 했는데 처음에는 그걸로 들어간 게 아닙니다.」

“???”

「시혁 씨가 게임 시나리오로 참여했지 않습니까.」

“아…….”

경트리오와 함께 만든 게임.

시즌2가 잘 만들어지고 있단 이야기를 듣긴 했다. 생각보다 빨리 만들어지고 있어서 출시도 금방 할 거라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하다가 시혁 번역가가 사실 시나리오를 작성한 거라고 말을 했거든요.」

“딱히 비밀도 아니네요.”

게임에 보면 시나리오 작가로 ‘이시혁’이라고 영어로 적혀 있긴 했다.

다만 저 이시혁이 번역가 이시혁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겠지만.

「그랬더니 놀라더라고요. 게임 정말 재밌게 했다고. 그리고 며칠 뒤에 제안이 왔습니다.」

“설마?”

「예. 혹시 소설로 낼 생각 없냐는 거죠.」

“그거 인기 있는 게임이었던 걸로는 알고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아, 모르셨습니까? 거기 OST가 은근 떴습니다. 물론 게임이 잘된 것도 있죠. 시나리오도 평가가 좋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원래 게임 시나리오가 구멍이 좀 있고 답답하니까요.」

“그건 뭐.”

「근데 외국에서는 은근 그 답답한 걸 좀 참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런 것 같다.

“음.”

「혹시 소설로 출간해볼 생각 없습니까? 지금 게임은 주인공 위주라서 사이드 스토리로 다른 캐릭터도 조명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요즘 OSMU가 많지 않습니까.」

게임에서 소설로 간 경우는 일본이 많긴 했다.

근데 과연 영미권도 많은가 물어보면 글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출간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에 조금 혹하긴 한다.

‘돈 안 되면 조금 힘든 거 아닐까?’

미국 시장이 넓다지만 거기도 정글이다.

우리나라 신간 나오는 것만 봐도 어마어마한 수인데 미국이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인구수가 많다는 것은 출간하는 책도 그만큼 많다는 거니까.

어쩌면 출간했는데 그냥 시간만 버리는 걸 수도 있다.

다만 한두 권 정도면 각을 볼 수 있긴 했다.

“으음.”

「고민 많으시죠? 그래도 게임 원작이 있어서 어느 정도 팔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통 게임하는 사람이 책을 읽지는 않죠. 사실 독서하는 인구가 적긴 하지만.”

「하하. 그렇긴 하죠.」

소비 형태가 다르다는 것이 망설이게 한다.

그래도 오! 책이 나왔어? 한번 사볼까? 이런 느낌으로 사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만큼 코어 팬층이 두꺼워야 했다.

근데 이거 그래도 시간 소모가 덜 할 수 있는 게 이미 초반에는 소설 형태에 가깝게 쓰지 않았나?

물론 게임 형식으로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 경트리오 애들에게 지적을 받긴 했지만.

일단 뼈대가 다 만들어져 있다는 게 중요했다.

“어, 음. 해볼까요?”

「오! 해보시면 좋죠. 근데 아마 한국 시장에는 안 팔릴지도 모릅니다. 아시죠?」

“웹소 형태가 많이 팔리니까요. 어차피 영어로 적어야 하긴 한데.”

「아니면 같이 진행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으음.”

「한 번에 풀면 소소하게 들어올지도 모르니까요. 이미 시나리오 흐름이랑 뼈대는 다 있으니까 새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요?”

「한다고 하면 웹소 형식으로는 제가 수정해보겠습니다.」

좋은 제안이기는 했다.

요즘 기계처럼 일해서 일상이 지루해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조금 변화가 있었으면 싶기도 했고.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다.

언제 또 이런 것을 해보겠나. 그리고 이런 제안이 오겠나.

거기서 뭔가 감성이 맞는 각을 보았으니까 그렇게 말했겠지.

설사 안 팔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시간 손해밖에 없다.

저기 미국 출판사는 금전적 손해까지 떠안겠지만.

어쩌면 무자본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인 것이다.

장사하려면 건물을 정하는 것부터 인테리어까지 다 돈인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번역할 거 말고 글로 써서 낼게요. 뭐, 돈은 안 들어오겠지만.”

「나중에 들어올 겁니다.」

“근데 웹소 형식으로 바꾸면 길게 적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역시 그렇죠? 그럼 일단 저희 미국 쪽 상황을 보고 단행본으로 출간할지 이야기해 보시죠.」

“으음. 알겠습니다.”

뭐, 한국의 단행본은 기대하면 안 된다.

베스트셀러 정도 된다면 또 모를까.

어찌 되었든 그렇게 소설을 쓰게 되었다.

***

소설을 쓰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먼저 이미 스토리 라인과 대사들이 정해져 있다는 것.

여기서 필요한 분량에 대한 묘사라던가 대사의 추가만 하면 되었다.

두 번째로 여러 번역을 하면서 이미 영어문장을 쓰는 것에 대해 익숙해졌다.

영어에서 한글로 한 번역이지만 익숙한 관용구라던가 아니면 한글에서 영어로 작업했던 내용이 많아서 타이핑 자체도 빠르게 되었다.

세 번째로 장면과 장면을 집중시키는 것과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매끄럽게 쓸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아마 연극에서 신창민과 함께 글을 쓰거나 글 쓰는 걸 보거나 하면서 더 발전된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소설을 써보는 것도 이미 필요한 인과들이 모여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게임이 흥하지 않았다면 이런 제안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 보자.’

홍진수 과장님에게 듣기로는 퇴고를 할 때 가장 좋은 건 소리 내서 읽어보는 거라고 들었다.

말할 때 거슬리면 다시 고치는 게 낫다고 한다.

아무튼, 퇴고하면서 영어로 읽어보는 중이다.

이게 또 통역사의 입을 푸는 데 은근 도움이 된다.

언어는 말하지 않으면 어색해지고 잊어먹는다.

어차피 일과 중에 매일 듣고 말하는 연습을 하니까.

근데 한 번도 시하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었다.

“형아. 영어 해!”

“응.”

내가 솰라솰라 영어로 말하고 있으니까 시하도 옆에서 뭔 뜻인지도 모르고 따라 말한다.

그게 좀 그렇다.

약간 직업병이 있는 게 발음이 이상하면 고쳐주고 싶다.

괜히 내가 가끔 시하에게 발음 조심하자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아니, 진짜 시하가 위험한 발음을 해서 하는 거기도 하지만.

“아이 러브 커피! 아이 러브 티! 아이 러브 몽키매직!”

몽키매직은 어디서 튀어나온 단어냐?

한동안 따라 하더니 자기가 아는 영어 단어는 다 튀어나오는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따라 하다 보면 시하도 나중에 두 가지 언어를 쓰고 있지 않을까?

“매직 팬티!”

“그 광고를 어떻게…….”

“아?”

“아니야. 시하 형아랑 발음이 같아지고 있네. 대단해!”

“!!!”

지적하면 흥미를 잃을 것을 알기에 일단 칭찬부터 한다.

나와 발음이 같아지고 있다.

이상하면 여러 번 발음해 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따라 하겠지?

“형아랑 가타?! 시하가 열심히 해서 형아랑 가타 하께.”

“응. 파이팅.”

“하팅!”

“그것도 영어인 거 알지?”

“시하 아라. 시하도 영어로 대하해.”

“오! 영어로 대화할 수 있어?”

“시하랑 해보까?”

자신만만한데? 아니, 아직 영어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사용 못 하지 않나?

아니지. 혹, 혹시? 설마?! 시하가 천재라서 이미 사용할 수 있는데 말 안 한 거 아닐까?!

그래. 그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시하의 입을 보았다.

질문을 던진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혹시 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 먹는 시늉도 해준다.

이러면 대충 알아듣겠지?

시하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서 원을 만든다.

얼굴 가까이에 들며.

“형아! 겜 오키? 설거지 오키?”

“???”

그러니까 밥 먹고 게임으로 설거지 정하자고?

일단 내 질문을 못 알아들은 건 둘째치고 ‘game’과 ‘okay’는 영어이긴 했다.

뭔가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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