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주말이 왔다.
도슨트 교육을 받는 날인데 아이들에게 정말 실전처럼 해줄지 궁금했다.
대본을 다 외우라는 말은 없었다.
이게 가이드라인이라고만 했고 꼭 대본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원래 도슨트라면 저러면 안 될 것 같지만 약간 뭐라고 할까. 느낌만. 알지? 이런 경험으로 가는가 보다.
“시하야. 오늘 수업을 들어. 대학교 강의 같은 거야.”
“강이?!”
대학교에 있는 어린이집을 다녀서 그런지 수업이라는 단어보다는 강의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시하였다.
두 눈을 반짝이는 게 아무래도 흥미로운 모양이다.
“형아랑 가치! 강이 드러?”
“응. 강의 듣지. 도슨트는 어떻게 하는 거다! 라고.”
“형아랑 가치 공부해. 시하도 대학생이야.”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느 대학생이 어린이 미술관에서 강의를 듣나.
아무래도 시하는 나랑 대학 생활을 한번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천재라서 어린 나이에 대학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만.
뭐, 무료 강연 같은 곳에 다니면 같이 공부할 수 있기는 하다.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예상하기에는 귀 기울여 듣기보다는 그냥 한쪽 귀로 흘려지며 잠이 들 것 같다.
조곤조곤 말하는 소리는 어른들도 버티기 힘드니까.
“시하야~”
“시하야~”
미술관에 도착하니 쌍둥이가 달려온다.
시하도 도도도 달려가 얼싸안는다. 그냥 걸어가서 반기면 될 것을 아이들은 멀리서 보이면 달려간다.
너희 어제도 만났잖아.
승준 엄마의 표정에서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드러난다.
딱히 말은 안 오갔지만 두 눈이 마주치자 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는 건 알 것 같다.
“빨리 가자. 시하야.”
승준이 시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간다.
하나도 그 옆에 서서 같은 방향으로 전진한다.
너희 어딘지 알고 가는 거지?
“카페 가?”
“응!”
강의 듣기 전에 카페에서 커피 하나 뽑아서 들어가는 대학생. 뭐 그런 느낌인가.
근데 전화 통화할 때 간다는 게 진짜였어?!
“시하가 마넌 준비해써.”
시하는 대체 언제 돼지저금통에서 만 원을 꺼냈는가. 아무 소리 못 들었는데 잘그락잘그락 잘도 꺼냈네.
아무래도 정신없이 아침을 차릴 때 꺼낸 것 같다.
그때밖에 기회가 없다.
“나는 용돈 받으면 맨날 엄마가 가지고 있어. 그래서 엄마한테 받으면 돼.”
“하나도 엄마한테 맡겨써.”
나는 승준 엄마를 보는데 시선을 피하신다.
그 용돈 전부 잘 보관되어 있는 거 맞습니까?
이미 다 썼겠지. 아이들 보험이라던가 아니면 슈퍼에서 사 먹는 거라던가.
어찌 되었든 사는 데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더라도.
“저금통에 조금 넣은 것도 있어요.”
“저한테 말씀 안 하셔도 되는데요.”
“그, 그냥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승준 엄마는 더운지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압니다.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저렇게 속는 것도 한때다. 유치원? 초등학생? 이 정도만 되어도 엄마에게 돈이 가면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꼭꼭 저금통에 직접 넣거나 통장에 넣을 게 분명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뭐 마실 거 사서 들어가요.”
“그래요.”
아이들은 이미 통화로 정했는지 주문하고 있다.
“나는 초코!”
“하나는 딸기!”
“시하는 초코하고 형아는 바나나.”
“???”
저기 시하야? 형아는 왜 바나나야? 나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실 생각인데?
내가 뒤에 온 걸 알았는지 해맑게 말한다.
“형아. 시하가 주문해써.”
“응. 고마워. 근데 왜 바나나야?”
“시하가 바나나도 먹고 시퍼.”
“아, 그래?”
둘 다 먹고 싶어서 나한테 바나나를 맡긴 거니? 천재구만.
“그리고 형아 바나나 조아해.”
“???”
“전에 시하랑 가치 바나나 주스 머거써.”
“그건 그랬지.”
카페에서 같이 바나나라떼를 시켜 먹었었지.
좋고 싫고를 따지면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그래도 형아한테 물어봐야지.
사실 아무거나 상관없긴 했다. 시하가 좋아하면 됐지. 뭐.
“엄마. 과자도 살래.”
“안 돼요.”
“힝. 하나도 과자 먹을 건데. 하나 돈으로.”
“안 돼요.”
자기 돈으로 못 사 먹는 현장이 눈앞에 있다.
시하에게 과자 먹고 싶냐고 물어보니.
“너무 마니 사면 대지밥 업써져.”
아무래도 거스름돈이 줄어드는 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럴 거면 꺼내지 않았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이유가 참 귀여웠다. 돼지 밥이라니.
“돼지 밥 중요하지.”
“사면 하나가 여러 개 대.”
“그렇긴 하지.”
만 원 지폐가 천 원짜리 지폐 여러 장과 동전으로 된다.
돈이 복사된다고?!
뭐 실제 보유 금액은 줄어들겠지만 돼지 밥으로서는 늘어나는 거지.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느낌인 건가.
“이제 올라가자.”
각자 음료에 빨대 하나씩 꼽고 마시면서 강의를 들으러 올라갔다.
전에 보디 페인팅을 작업했던 곳이었는데 일단 의자에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예쓰쌤이 도착하자 강의가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도슨트 하려고 모이셨네요. 그럼 먼저 도슨트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네!”
“도슨트는 미술관은 안내하며 설명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작품에 대해서 이 대본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어야 해요. 왜 그런지 아시나요? 맞추면 선물도 드려요.”
“저요!”
승준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정말 알고 있다고?
“네. 말해 보세요.”
“334전술을 쓰는데 후반전에 4123전술도 쓸지도 모르니까 많이 알아야 해요!”
“네?”
저거 축구 말하는 거네.
대충 의미는 조금 맞지 않나? 이 전술 쓰다가 상황 봐서 다른 전술을 쓰는 것.
근데 예쓰쌤은 대체 저게 무슨 소리지? 하며 눈을 대굴대굴 굴린다.
갑자기 축구 얘기가 나오니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전술 같은 건 관심 없으면 잘 모르기도 한다.
“아하. 아하. 좋은 대답이네요.”
저거. 모르는 게 확실하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다른 어머니들도 같은 생각이실 거다.
“그런데 좀 아쉽네요. 그래서 여기 사탕을 드릴게요.”
“아싸!”
사탕이 전달되었다.
예쓰쌤이 답을 말한다.
“가끔 설명하다 보면 혹시 모를 질문들이 들어와요. 궁금증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잘 답변을 해드리기 위해 많이 알고는 있어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대답일 줄은 알고 있었다. 뻔하지.
“시하도 아라.”
“정말?”
“이거 모야? 하면 형아처럼 파바박 하면 대.”
“응. 다 아네.”
“시하 아라.”
모르는 게 분명했다.
대충 형아처럼 느낌만 파바박 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예쓰쌤이 대본을 꺼낸다.
“자, 여기 대본이 있어요. 이걸 외우는 게 중요해요.”
“네!”
“근데 뭐 안 외워도 기억나는 것만 말하면 돼요. 그런데 이게 중요한 게 있어요. 만약 너무 빨리 말해서 앞에 먼저 출발한 다른 도슨트와 겹치지 않아야 해요.”
“!!!”
“여기 대본대로 하면서 설명을 생략하거나 늘이거나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이 알아야 해요.”
오! 생각보다 본격적이다.
확실히 도슨트가 많고 그 사람마다 들어가고 있을 때 속도가 중요하다.
앞으로 간 도슨트를 따라잡으면 안 되고 뒤에 오는 도슨트에게 따라잡히면 안 된다.
그 조절이 대본의 양보다 조금씩 더 설명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일부러 말을 좀 살짝 느리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름 스킬도 있어요. 여기서 조금 감상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실까요? 하고 시간을 끌어도 돼요.”
이것저것 노하우가 방출된다.
뭐, 아이들에게 필요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저러는 거겠지?
전시라는 게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패널 같은 걸 설명해야 할 일도 있을 테니까.
너무 가까이 있으면 목소리가 겹치니까 설명을 해주는 것도 방해가 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실제로 한번 해볼까요?”
근데 의문인 게 아이들의 작품에 뭔가 설명하는 부분이 필요한가 싶긴 하다.
***
아이들의 작품인 보디 페인팅이 있는 전시실에 왔다.
이미 다 세팅이 되어 있는지 먼저 머리부터 쭉 보인다.
가벽을 세워뒀는지 길이 꺾이기도 한다.
“그럼 우리 조를 나눠서 해볼게요. 듣는 사람하고 발표하는 사람으로 나눌게요.”
도슨트로 모두가 신청한 건 아니었는지 아이들은 적었지만 부모님들도 있어서 사람 수는 많아 보였다.
일단 3인 1조로 활동하게 되었다.
우리는 아는 사람끼리 뭉쳤다.
“그럼 대본 한번 읽어보셨죠? 대본대로 해볼게요. 근데 꼭 대본대로 안 해도 돼요.”
아이들의 각 작품에는 자신들의 생각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뭘 표현했는지 대본에 적혀 있다.
대부분 그냥 봤을 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지만 이상하게 난해한 것도 있었다.
“시하가 하까?”
“응. 시하야. 한번 해봐.”
앞의 도슨트가 먼저 출발.
그다음 미리 도슨트가 나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시하가 앞으로 나왔다.
우리는 시하 앞에서 대기하는 관람 역할이다.
앞에 다른 직원분이 ‘5분 있다가 들어 가실게요.’라고 친절하게 말한다.
실제로 할 때는 이렇게 안 하겠지만 도슨트 체험이니까.
어쩌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연속으로 설명 듣고 싶어 하는 관람객이 있을 거니까.
“그럼 도슨트의 안내에 따라 입장하겠습니다.”
“형아. 빨리 와.”
“시하야. 실제로 빨리 오라고 하면 안 된다?”
“시하 아라.”
“응. 시하는 다 알지.”
“처음에는 인사를 해야 한데.”
“안녕하세여. 시하에여. 오늘 이거 설명하께여.”
잘한다. 잘한다. 역시 우리 시하다.
“머리에여. 넘어가께여.”
“잠깐만! 설명은?”
“아? 설명해써.”
아니. 머리인 건 나도 보면 알지. 그림은? 감상 시간은?
“우와. 시하 잘한다!”
“시하 잘해. 벌써 넘어가.”
“???”
저게? 머리라고 말한 게 잘한 거라고?
음. 그냥 잘한 거라고 하자.
“다음으로 넘어가자.”
머리를 검은색으로 다 칠한 게 나왔다.
이거는 같이 대본에서 읽은 게 생각났는지 설명을 했다.
“밤에 보면 안 보여여. 숨어써여. 숨바꼭질이에여.”
숨바꼭질이라는 말은 대본에 없었다.
애드리브도 하고 시하 천재네.
“넘어가께여.”
넘어간다는 대사는 확실히 기억나는 게 분명했다.
하긴 대본을 읽어줄 때 넘어간다는 말이 제일 많긴 했지.
뭐, 어때. 느낌만 알게 하는 거니까.
사실 이렇게 아는 사람이라도 앞에서 설명하는 건 대단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처음 하는 것치고는 안 떨고 잘하지 않나. 역시 내 동생이야!
“다움은 하나 꺼에여. 나비가 이써여.”
그러고 보니 하나가 머리를 선택했지.
볼에 나비가 있는 얼굴.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나라 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
갑자기 노래는 왜?
여기 안내해 주는 패턴을 전혀 모르겠어! 아무리 자유롭게 하라고 했지만 너무 자유로운 거 아니야?
“나비가 꼬친 줄 알고 여기 이써여.”
발음 조심하자 시하야.
눈에 그려진 꽃이 진짜 꽃인 줄 알고 여기 앉았다는 거지?
“하나가 예뿌게 잘 그려써여. 여기 볼에 그리면 예뻐여.”
근데 유독 하나 작품에 설명이 많지 않니?
이게 바로 인맥의 힘인가.
아는 사람의 작품은 술술 많이 말해 준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 몸통 쪽이 나왔다.
처음 느껴진 건 역시 몸통이 제일 많구나 싶었다.
“짜잔! 이제 몸통이에여.”
뭔가 새로운 장소로 오는 느낌이다.
“몸통 마나!”
시하의 감상도 말해진다.
뭐, 시하도 처음 보는 거니까.
비록 사진에 봤다고 할지라도.
“천천히 보고 가께여.”
너무 많은 몸통의 설명은 생략한다.
엄청난 기술을 쓰네. 시하야. 솔직히 대본에 뭐 쓰여 있는지 기억 안 나지?
하긴 나도 기억 안 난다.
그냥 그림 보고 얼추 떠오르기는 하는데.
아니. 기억이 나네? 왜 나지? 너무 많이 읽어줬나?
어미라던가 그런 건 자세히 안 나지만 얼추 설명 쪽은 대부분이 기억난다.
내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니까.
누군가의 말을 통역해 주려면 어느 정도 머리에 많이 기억해야 한다.
물론 순간 기억력이 많이 요구된다.
그렇게 쭉 구경하다가 중간에 시하가 멈춘다.
“승준이 꺼에여!”
인맥 설명이 어마어마하구만.
왠지 설명을 넘어간 다른 몸통들이 불쌍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