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시하랑 놀아주고 난 뒤에 영상을 찍기로 했다.
폰을 고정하고 뒷모습만 찍으면 된다.
“형아. 시하는 그림 그리께.”
“응.”
시하는 노는 게 만족스러웠는지 패드를 들고 그림을 그린다.
영상을 찍는 나는 뭘 그리는지 신경 쓸 수 없었다.
나중에 보면 되니까.
일단 올릴 영상을 편집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긴 영상을 찍을 필요는 없었다.
어느 정도 포인트만 잡아서 행동하면 되니까.
되도록 그림에 집중되게 찍었으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아니다.
결국은 완성을 바라보게 될 터이니.
‘이러면 되나?’
찍은 영상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페페의 뒷모습만 나오게 배경을 전부 자른다.
영상과 붙여보니 나름 꽤 볼만했다.
페페 탈이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는 것.
확대로 마네킹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
이번에는 딱히 설명할 것이 없었다. 어쩌면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감상하는 게 더 알맞은 걸지도.
그래서 앞에 자막은 그냥 인사만 넣고 영상 편집에 힘을 실었다.
이게 혼자서 하는 건데도 점점 실력이 늘어감을 느낀다.
‘나중에 편집자로 전향해도 되겠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외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
프로그램이 좋아서 편한 것도 있긴 한데 왠지 모르게 감독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
편집실에서 이리저리 만져서 좋은 영화를 한 편 뽑는 것 같다.
물론 실제로는 여러 미장센이 있고 감독의 의도를 보이게 찍어서 알맞게 편집 과정을 거치겠지.
뭐, 느낌만 그렇다는 거다. 느낌만.
‘마지막은 작품만 제대로 나오게.’
영상은 시하의 작품을 이리저리 잘 나오도록 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사실 세세한 부분은 더 작업해야 하긴 하지만. 대충 틀은 잡힌 느낌이다.
이제 노래만 삽입하면 되겠지.
‘후우.’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있자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가버린다.
2시간.
조용히 그림을 그리나 싶어서 쳐다봤는데 앉아서 패드를 보면서 끔뻑끔뻑 졸고 있다.
으이구. 잠 오면 형아에게 말을 하지.
형아는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편집에 집중하느라 정신없이 작업했잖아.
“시하야. 이제 자자.”
“형아랑 가치?”
“응. 형아랑 같이.”
시하가 손을 내민다.
나는 그대로 품에 안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이부자리는 깔려 있어서 그대로 눕히기만 하면 된다.
“우웅.”
이불을 덮어주자 내 손을 꼬옥 잡는다.
아, 대충 밖에 노트북이랑 패드를 정리해야 하는데 이대로 잡혀서 못 나갈 것 같다.
“형아랑 가치.”
“응. 응. 알았어.”
살며시 옆으로 눕는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중에 일어나서 정리해도 된다.
살며시 옆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시하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손에 힘이 빠지며 살며시 놓였다.
나도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졌다.
“코오-”
그렇게 순간 눈이 떠진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순식간에 밤낮이 바뀐다.
눈 깜빡했을 뿐인데 다음 날이 되어 있었다. 이런 경우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서 잠을 더 자는 게 좋았다.
하지만 시간을 보니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
사실 어제 밥을 안치고 잠들었어야 했는데 그냥 누워버린 잘못이다.
‘아침밥 만드시는 모든 부모님께 존경을.’
이럴 때면 정말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아이들 밥 먹이고 어린이집 보내고 정신없는 아침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직장으로 향한다.
커피 한 잔 타고 자리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회의 시간이다.
수첩을 들고 회의실에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고 다시 업무의 반복.
그러고 나면 아이들을 데리러 차를 몬다.
사실 회사 생활을 제대로 해본 건 아니지만 박한수의 회사에 일하면서 대충 이런 패턴이겠구나 싶었다.
‘프리랜서가 시간 관리는 좀 자유로운 거 같아.’
직업마다 다르겠지만 퇴근이 없는 프리랜서다.
다른 사람의 일정에 시간을 맞춰야 하면 또 힘들기도 하다.
어떤 직업이 되었든 쉬운 것만은 아니다.
칙칙칙.
압력밥솥에 연기가 1, 2분 있다가 불을 꺼달라고 소리를 낸다.
대충 오늘 아침밥을 할 재료를 준비한다.
뜸을 들일 때 딱 씻고 와서 요리를 시작하고 밥을 푸면 된다.
시간의 틈을 아껴서 쪼개어 쓰기.
이런 생활력이 나올 때마다 정말 자식 있는 사람 같아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씻어야지.’
씻고 나와서 상 위에 있는 노트북과 패드를 정리한다.
자동으로 절전모드가 되어 있는지 화면이 까맣다.
아마 영상은 나중에 올리게 될 것 같았다.
대충 정리하고 요리를 다 하고 나면 귀신같이 시하가 눈을 비비며 ‘형아’를 부른다.
아침 식사 알람 성능이 확실하다.
“형아.”
“응. 시하야.”
“밥 머거?”
“응. 밥 먹고 씻자.”
시하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오늘은 베이컨에 계란후라이.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그렇게 식사를 다 끝내고 씻고 오자 시하가 말한다.
“형아. 시하 그림은?”
“아, 패드?”
“아아.”
“일단 저기 충전기에 꼽아뒀어. 왜? 그림 그릴 시간 없는데?”
“시하 다 못 그려써.”
“나중에 그리면 되지.”
“군데 시하 너튜브 못 올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멍하니 아무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고가 정지된 기분이다.
깨어난 지 한참이 되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정신없어서 그런 것도 있다.
“어제 그린 것도 영상에 올릴 거야?”
“올려. 올려.”
영상이 두 개라서 한 주 간격으로 올려야겠네.
어찌 나보다 너튜브에 열성적이다. 흐음. 이게 하나의 놀이라서 재미있나?
“그런데 영상은 하루에 다 올리는 건 안 좋대.”
“왜?”
“컨텐츠가 빨리 소모. 으음. 으으음. 아! 만화처럼 다음에 계속! 하고 끝내서 다음에도 또 오게 만들려고!”
“!!!”
아이의 눈높이에서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근데 만화가 이런 점에서 좋은 것 같다. 웬만하면 비유로 정말 쓸모 있어!
“군데 시하는 이거 그림 가튼 거야.”
“???”
나는 일단 바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어린이집 가고 나서 다음에 또 그리자. 아직 형아가 영상 작업도 다 못 했어.”
“형아. 힘내. 시하가 도아주까?”
“응? 아니야. 시하는 영상 찍었으니까 편집은 형아가 해야지.”
“군데 시하는 시하가 찍고 시퍼서 찍눈데 형아는 하고 시퍼서 형아 해?”
“형아 해는 뭐야. 편집해? 겠지.”
“펀치해?”
“노트북에 펀치하면 큰일 나지.”
이거 부서지면 사는 데 돈이 얼마야. 흑흑. 아직 5년은 더 쓸 수 있다.
어라? 노트북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살… 사려… 줘…….
어디서 환청이 들린다.
“괜찮아. 형아도 이거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시하가 영상 올리는 거 좋아해서 형아도 좋아.”
“형아 힘들면 시어야 해. 알아찌?”
“응. 응.”
역시 형 생각해 주는 건 시하밖에 없다.
나의 비타민이다.
“빨리 준비해서 가자.”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갈 시간 다 됐네.
아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출근했다.
박한수 사장님은 여전히 나를 반긴다. 직원도 한 명 늘어서 요즘 인사를 두 번 하게 된다.
서로 아시는 분이라서 그런지 친근하다.
그런데 나랑만 있게 되면 어색함이 감돈다.
나는 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계약이 어떻게 될지만 신경 쓸 뿐이다.
박한수가 말한다.
“오늘 체결류와 동체에 들어갈 제품 몇 개를 지원한다는 서류에 답변이 왔어. 일단 만나 보자네? 이거 긍정적인 신호인 거 같아.”
“그냥 만나는 거 아니에요?”
“그럴 시간이 어딨어. 세상에는 그냥은 없어. 솔직히 이 정도 스펙인데 당연히 잡아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공위성에 들어갈 특수부품.
물론 위로 날려보기 전에 몇 가지 실험용 부품들도 만들 것이다.
이런 계약을 따내는 건 이 작은 신생업체에 기회였다.
어떤 일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이력은 중요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에 멀다.
그냥 어? 이거 나도 들어본 인공위성 이름인데 이 업체가 여기에도 참여했어?
이런 인식이 판매할 때 엄청난 이득으로 돌아온다.
겨우 그거 한 줄.
하지만 대중들이 무궁호에 대해 들어만 봤다고 해도 이득이다.
다수가 안다는 건 일종의 광고이고 그건 이득과 직결된다.
“다수가 아는 것은 돈이다!”
박한수가 뿌듯한 표정으로 그리 말한다.
어느 정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너튜브만 해도 다수의 이용자로 인해 광고 수익이 나오지 않나.
누가 이런 세상이 올 거라고 상상을 했을까.
올린 영상만 보는데 돈이 된다니.
“이제 이 회사는 튼튼한 회사로 발돋움하는 거야.”
“일단 계약도 안 했는데요. 계약했다고 해도 튼튼한 것까지는 좀.”
“하하하! 다른 계약도 따내야지. 아, 참! 혹시 사이트에 전부 영어로 주석 같은 거 달아주지 않을래? 아무래도 제품 같은 건 외국에서도 보니까.”
“알아서 번역으로 바꿔 보지 않을까요?”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넵. 취급하는 재료만 달게요.”
“오케이! 역시 우리 에이스!”
총인원이 셋인데 에이스는 무슨.
빨리 성장해서 직원도 뽑았으면 좋겠다. 뭐, 선정만 되면 일이 술술 잘 풀릴 테니 문제없다.
“그럼 나는 미팅 갔다 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음. 여기 다시 출근할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안 온다면 문 잠그고 퇴근해.”
박한수는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챙겨 나갔다.
계약은 잘하시겠지.
이제 여기서 업무라고는 별로 없었다.
그저 계약된 곳에 납품하고 이리저리 처리할 것만 해주면 된다.
새로 오신 분도 일에 익숙해져서 내가 할 게 많이 줄어들었다.
이미 일머리가 있으시고 나이도 있으신 분이다.
“저기.”
새 직원인 최철호가 말했다.
“네?”
“젊은 사람인데 어떻게 여기 일하게 된 거야?”
“그냥 사장님이 어떻게 꾸려 가는지 궁금해서 지원했어요. 뭐, 어차피 오래 일할 건 아니라서요.”
“그래?”
“네. 사장님이 외국어가 모자란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긴. 근데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으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일단 여러 가지 일을 해보려고요. 사실 좀 여유롭게 벌이를 하고 싶긴 해요.”
“여유?”
“네. 저희 집에 동생이 있거든요. 제가 돌봐줘야 해서.”
“아, 동생이 어린가 보지?”
“4살이에요.”
그 뒤로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묵이 이어졌다.
뭔가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나는 솔직하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둘만 살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부터는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말이야! 글쎄!”
그런 아들 이야기로 공감을 사며 평범하게 이야기해준 것뿐이다.
사실 시하가 아들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애를 키우는 입장에서 공감이 가는 것도 있기에 이야기는 잘 통했다.
이렇게 대화를 많이 나눈 건 처음인 것 같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네. 일해야지.”
“하하하.”
이제는 계약도 몇 군데 더 되어서 일거리가 좀 있다.
나는 오늘 할 일은 다 한 것 같아서 영상 편집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번역 작업도 해야 하지만 뭔가 시하가 좋아하는 걸 먼저 해주고 싶었다.
‘아. 근데 시하가 어제 대체 뭘 그린 거지?’
뭔가 엄청난 걸 그렸으려나?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클라우드로 저장되어 있었지? 아마?
컴퓨터로 저장된 그림 파일을 다운받아서 열었다.
거기에는 시하가 다리로 그린 작품이 오려져 있었다.
찍은 사진에서 딱 그 작품만 말이다.
그리고 미처 잘려버렸던 거대한 페페와 하늘이 새 레이어 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미완성인 채로.
‘허.’
어쩐지 같이 올려야 된다고 했다.
이건 그림의 연장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편집 역시도 시하의 그림이 다 그려질 때까지 미완성인 채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편집 방향도 바꿔야겠는데?’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