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7화 (337/500)

337화

한편, 다른 쪽에서도 시하와 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초등학생 1학년인 도하는 마네킹의 다리를 선택했다.

이미 부서져 있는 것.

이걸로 대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신나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부족해.’

다들 왜 오래 고민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 전시를 하는 것인데 그리 진지함이 없어서야.

12월 눈사람을 부순 다음 날.

그때 새로운 천재에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참여했다.

지금 미술관에도 도하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부서진 것만 생각해서 오히려 상상력이 제한된다고 했어.’

그 이후로 선생님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여느 아이처럼 인정하기 참 힘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부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은 패배로 인해서 박살났으니까.

그 충격을 이 다리에 담는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면서도 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은 느낌으로.

‘후우.’

그날 인정한 것은 자신은 저런 따뜻한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것이다.

색감에서 진 거지 담겨있는 것에는 진 게 아니었다.

발상과 창의력이라면 자신도 못지않다.

‘시작하자.’

붓을 들었다.

갈색 계통과 검은색 계통을 더하며 다리가 마치 땅인 것처럼 색깔을 더한다.

마치 잿가루가 날리는 듯 터치한다.

‘다음을 빨간색과 주황색으로.’

유리에 금이 간 듯이 희미한 실선이 쫘악 퍼진다.

그 속에 주황색과 노란색은 붉은빛을 더 밝게 해주며 마치 쩍 갈라진 땅에 용암이 솟아오를 듯한 느낌을 주었다.

허벅지에서 발까지 전체적으로 그렇게 색칠했다.

‘다 했다.’

다 타버린 재가 이러할까.

이 다리는 조금만 땅에 닿아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아주 겨우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어찌 보면 아이가 이걸 그렸다는 것이 섬뜩할 만한 것 같았다.

“우와! 엄청 멋있다!”

“진짜! 불도 쓸 것 같아!”

“마그마 같은 거 나오는 거 아니야?”

“근데 좀 무서운데?”

“숯 같은 거 생각나기도 하고.”

도하는 살짝 웃음을 보였다.

그래. 너희들이 뭘 알겠어. 이 위태로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선생님이 예전에 그림을 알려주면서 설명했다.

아주 많은 말을 했지만 그중에 기억나는 건 이거였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다.

부서지는 것도 죽음이 아닐까?

도하는 상상력이 제안될 수 있다고 조언을 받았지만 그래도 이러한 것을 그리고 싶었다.

더, 더 많이 부서지는 것을.

‘걔는 이번에도 참여 안 했을까?’

어떻게든 다시 한번 붙어보고 싶다. 그것보다는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네가 쉬고 있는 동안 여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더 많이 성장했다고.

나는 너에게 안 질 거라고.

“도하야.”

“네. 쌤!”

“이번에도 엄청난 걸 그렸네?”

“하하하. 별거 아니에요.”

“대단해! 전시할 때 좋은 자리 따낼 수 있겠다.”

“정말요?”

“응. 코스 마지막에 딱 보이는 곳으로 어때?”

“저야. 좋죠!”

“아, 근데 저쪽 팀에도 굉장히 잘한 애가 있다던데.”

“!!!”

“듣기로는 전에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했나?”

“!!!”

도하의 눈이 커졌다.

순간 직감했다. 그때 그 아이가 찾아왔노라고.

***

집으로 돌아와서 영상과 사진을 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편집할지 고민을 좀 했다. 최대한 시하의 몸이 나오지 않게 찍긴 했는데 손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몸이 가끔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고.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이었다.

그때처럼 페페의 손이 나오게 하면 될 것 같다.

근데 뭔가 뻔하단 말이야.

여기서 한번 꺾어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나.

“으음. 으음.”

고민 중인데 시하가 페페 얼굴을 가지고 와서 내 얼굴에 꾹꾹 눌러댔다.

이건 대체 뭘까?

“형아페페. 형아페페로 놀자.”

“오늘 실컷 놀지 않았어?”

“아냐. 시하가 노라써. 군데 실컷 아냐.”

“그렇구나.”

너의 실컷의 기준은 어마어마하구나.

“형아가 두 밤이나 노라준다고 해써. 지금 해져.”

“그렇구나. 내가 전에 그런 말을 했지.”

실제로 두 밤이 되기 전에 도착했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오늘 밤은 이 페페의 탈을 쓰고 놀아줘야겠다.

밤새워 놀아줘야 하니 잘 수 없다. 엄청나구먼.

하지만 자게 될 것이 분명하지. 물론 나도 곯아떨어질 것이고.

“그럼 오랜만에 형아페페가 되어 볼까!”

“아아!”

나는 일단 탈을 쓰기 전에 에어컨부터 틀었다.

지금 안 틀면 나중에 죽는다. 더워 죽는다.

탈 안에서 움직이면 엄청 덥다.

주섬주섬 페페 탈을 입고 뒤뚱뒤뚱 움직인다.

“형아페페!!”

“그래. 시하야. 안녕? 형아페페야.”

“아냐! 안에 형아가 가짜일 수 이써. 승준이 말해써.”

“아…….”

그거 연장해서 노는 거야?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이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과연 이 안에 있는 건 진짜 형아일지 아닐지.

“나는 형아가 맞아. 진짜 형아야.”

“진따?”

“발음 조심하자. 시하야. 진짜! 짜장면 할 때 짜!”

네가 그렇게 말하면 찐따 형아가 되는 거 같잖아.

몇 번을 교정한 다음에 제대로 발음한다.

“찐짜!”

“뭐, 좋아. 아무튼, 나는 진짜다!”

“찐짜면! 시하 문제 마쳐야 해.”

“응. 알겠어. 내 봐! 형아는 다 아라!”

“아? 아닌데! 시하가 다 아는데! 시하 다 아라!”

“어? 그래. 너는 항상 다 알지. 그렇지.”

다 아는 건 뺏어가지 말라는 건가?

아무튼, 시하의 문제를 맞혀야 내가 진짜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 보다.

그런 문제가 있었나?

“시하가 제일 조아하는 거눈?”

“페페?”

“땡! 가짜다! 답은 형아야. 형아!”

“아앗…….”

사실 일부러 틀렸다.

답은 형아라고 듣고 싶어서. 크흠. 왜 이런 문제는 일부러 틀리고 싶지 않은가.

“제일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그랬어. 페페도 펭귄 중에 제일 좋아하잖아? 그치?”

“아?”

펭귄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거라면 분명 맞았다.

시하는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안 돼? 이건 문제가 애매했어.”

“아라써. 시하가 한 번 더 문제 내께. 마쳐야 해.”

“응. 알았어. 형아가 진짜 형아니까 다 맞출게.”

다음 문제를 두근대면서 기다린다.

시하는 고민하는지 검지 두 개로 관자놀이를 대며 고민한다.

저러면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르는 걸까?

“아! 생각나써!”

“응. 어서 문제 내 봐.”

“형아 손에 시하가 총 그려써.”

“그랬지.”

“그거 얼마야?”

“어?”

아니. 이런 변형 문제를 내다니.

하지만 원래 문제에 힌트가 있는 법이 아니겠나.

저 질문. 시하가 그린 작품이 얼마냐는 질문과 같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역시 고민한 이유가 있었다. 저렇게 변형된 문제를 내기 위해서였겠지.

하지만 답은 미술관에서 했던 것과 똑같을 게 분명했다.

“우주만큼!”

시하가 팔을 교차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틀렸다는 말이다.

“땡!”

“아니. 이게 아니라고?”

“틀려써.”

“아니. 그럼 정답이 뭔데?”

시하가 손짓을 했다. 이건 허리를 숙여서 귀를 대라는 거지.

근데 이 페페 탈에 귀가 있었나?

안 그렸던 거 같은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려고 하는데 이 페페 탈이 뚱뚱해서 숙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들을 준비 다 됐어.”

“시하가 가르쳐주께.”

시하가 두 손을 모으고 내 귓가에 다가온다.

이렇게 되니 시하가 숙여야 했다.

이게 뭐라고 참 웃긴 상황이 연출된다.

그래서 답이 대체 뭐야?!

“답은.”

“응. 답은?”

“시하가 형아 조아하눈 만쿰이야.”

“!!!”

“우주보다 더 커!”

“크흐.”

아니. 대체 어디서 이런 대사를 배워오는 거야.

어디 따로 인강이라도 듣는 거야?!

아니, 가격이 우주보다 더 크면 대체 얼마만 한 마음으로 그린 거야.

엄청나다. 시하가 그려준 내 총은.

근데 이미 손 씻어버렸는데. 흑흑.

“이미 지워졌는데 어떡하지?”

“갠차나.”

“응?”

“시하가 또 그려주면 대지! 시하 이써서 다 갠차나!”

“크흐.”

그림 리필이 되는 거였구나.

그만큼 비싼데 지웠다는 걸 봐주는 대인배가 여기 있다.

다행히 총 그림 사진은 남아있다.

“그런데 시하야.”

“아?”

“사실 나는 정답을 다 알고 있었는데도 말 안 한 거야. 왜인 줄 알아?”

“왜?”

“나도 확신이 필요했거든! 시하가 진짜인지!”

“!!!”

시하가 ‘형아 대다내!’ 하면서 칭찬을 보낸다.

이렇게 내 가짜인 건 넘어가야겠지.

“군데 시하는 아직 확인 다 안 끝나써.”

“그렇겠지!”

우리 시하 참 똑똑해졌다.

이걸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 막막하네.

“그럼 이건 어때?”

“아?”

“형아는 외국어를 잘하니까 엄청난 실력으로 확인하는 거야. 시하는 다 아니까 형아가 외국어 해도 다 알겠지?”

“시하 애국어 잘 몰라.”

“애국어가 아니라 외국어. 그렇게 말하면 애국하는 언어 같잖아.”

이럴 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다니! 치사하다!

그렇지만 물러날 수 없다.

언제까지 확인 작업만 할 것인가.

“하지만 잘 몰라도 시하가 형아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지. 영어로 간다.”

“시하 영어 쪼꿈 아라. 하이! 바이바이!”

“그래. 그래. 그거 아는 거 형아도 알고 이써.”

“대다내!”

“???”

이게 대단할 일인가?

의문이 들긴 하지만 형아의 위대함을 보여줘야지.

그래. 어떤 영어로 말할까?

아!

“I’m your 형아.”

“!!!”

“I love you.”

“시하 다 아라! 형아 마자!”

진짜 다 알아들은 거 맞지?

***

드디어 시하가 형아란 걸 알아주었다.

이제는 페페 탈 안에서 놀아주는 걸 전제로 한다.

저번 놀이의 연장선인지 능력자 놀이로 자연스럽게 선택되었다.

시하가 페페 탈 배에 푹신하게 안기면서 올려다보았다.

뭔가 귀엽다.

“형아. 왜 페페랑 합체해써?”

그거 네가 페페 탈 쓰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이 능력자 놀이에 써야만 했던 사정이 있어야 하나 보다.

흐음. 뭐라고 해야 잘했다고 칭찬받을까?

배를 한번 튕겨봐?

퉁!

시하가 튕겨 나가서 엉덩방아를 찍었다.

“아?”

“이건 최신형 페페 갑옷이야.”

“!!!”

“약한 공격은 다 튕겨낼 수 있지.”

“대다내! 페페 대다내!”

이런 간단한 설정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제 적을 해치우면 되는 걸까?

“형아. 시하 능력 업써져써.”

“???”

“이거 바바. 얼굴에 능력 업써져써.”

“아…….”

그림이 지워져서 능력도 없어졌다고 말하나 보다.

거기까지 설정을 더 한다고?

그렇다면 나도 손이 총을 쏘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형아도 능력 업찌?”

“응. 형아도 없네.”

“구러면 우리 이제 싸움 훈련해야 해.”

“어? 그래?”

“아아. 싸움 훈련.”

“그렇구나.”

“형아가 시하한테 알려져야 해.”

“내가?”

“형아가.”

흐음. 그렇다면 싸움 훈련을 알려줘야겠지.

이건 기회다. 이 탈을 쓰고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는 싸움.

“우리는 능력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해.”

“마자!”

“그러니 발소리를 내면 안 되겠지? 자, 조심조심 걷는 훈련이야.”

“조심. 조심.”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마치 도둑의 모습 같았다.

우리는 데칼코마니같이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다.

“그런 다음 한 방에 공격해서 쓰러뜨려야 해.”

“한 방!”

“여기 목을 탁하고 치는 거야! 그럼, 사람이 기절해.”

“이케?”

“응. 그렇게.”

물론 이런 건 영화나 만화에서만 나오고 실제로 할 수 있냐고 물으면 글쎄?

요즘 세상에서 이 정도 가까이 가서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냥 멀리서 총 쏘면 끝나니까.

뭐 한국이라면 좀 다르긴 한데 그래도 칼이 없는 것이 아니니.

“얍!”

“얍!”

“합!”

“합!”

시하가 날 따라 열심히 손으로 공격한다.

의외로 진지하다.

“어?”

“어?”

갑자기 시하가 따라 하는 모습을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페페 탈 쓰고 영상을 찍어서 합치면 되는 거 아닐까?

시하가 다리에 그리는 그림을 이 페페 탈 쓰는 영상이랑 붙이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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