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6화 (336/500)

336화

어찌어찌 놀이를 끝내고 프로그램에 들어왔다.

솔직히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뭐, 이런 건 학점이라던가 점수가 들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종의 약속인데 지키긴 해야지.

그래. 이미 늦은 거 더 늦자! 이런 건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

물론 마음은 편하겠지. 어떨 때면 필요한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가 막힌다거나 아프거나 그러지 않은 이상은 시간을 잘 지켰으면 좋겠다.

신뢰의 영역일 수도 있고 시간을 소중히 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뭐, 어떻게든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안 늦었네.”

“형아. 다움에 계속이야.”

“응?”

시하의 말에 승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만화처럼 ‘다음에 계속’이라는 자막이 달렸나 보다.

초능력자 놀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

하지만 아이들은 재빨리 다른 쪽으로 흥미가 생기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럼 다음에 하자.”

“다움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예쓰쌤이 들어왔다.

하나의 작품을 들고 오셨는데 마네킹의 몸에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앞부분은 아니고 등 부분만 있는 곳이다.

뭔가 그 조폭 문신이 생각나는 건 나뿐일까?

다른 작품들도 있었는데 이건 상체 앞부분만 있다.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해져 있어서 뭔가 낙서 같기도 하고 심오한 심상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마음대로 표현해서 그리면 돼요. 가질 수 있는 부위가 여러 개 있으니 선택해 봐요. 아! 그리고 꼭 여기 몸을 다 칠할 필요는 없어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아셨죠?”

“네!”

프로그램 자체가 좀 자유롭다.

이건 이렇게 해! 가 아니라 이런 작품도 있고 저런 작품도 있다.

막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형적인 틀을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시하는 어떤 거 할래?”

앞에 있는 인간의 파편들.

뭔가 섬뜩한 것 같다.

상체 앞뒤. 하체 앞뒤, 팔만 있는 것, 다리와 발만 있는 것.

로봇도 아니고 다 분리되어 있다.

대체로 많이 고르는 건 상체 쪽이긴 했다.

“하나는 얼굴 할래! 오빠는?”

예상해 보건대 다리와 발이 있는 걸 고르지 않을까. 축구 하면 킥이니까.

“나는 여기 몸!”

의외로 상체 앞부분을 골랐다.

그래. 가슴으로 트래핑을 하는 것도 사커니까 그럴 수 있어!

온몸을 써줘야 축구지.

“형아. 시하는 다리 할래.”

의외로 시하가 다리를 골랐다.

어째서인지 궁금해지는걸.

“다리는 왜?”

“페페야. 페페.”

“???”

혹시 다리에서 내가 안 보이는 페페가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아무래도 시하는 저기에 페페를 그릴 상상을 했던 것이 아닐까?

벌써 머릿속에 스케치가 되었나 보다.

미술에 재능이 없어서 저게 대체 어떤 능력인지 모르겠다.

아, 그건가? 건축가가 지반을 딱 보고 음 저렇게 세우면 될 것 같은데? 같은 느낌.

우리도 이사하면서 아, 저기 책상이랑 옷장 넣으면 딱 각 나올 것 같은데.

뭐 이런 부류의 느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어떤 느낌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영상 찍을까?”

“아?”

“요즘에 안 올린 것 같아서 이거 영상 하나 찍으면 좋을 것 같아.”

“시하도 조아.”

뭐, 찍어보고 별로면 안 올리면 되지.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시하가 뭘 할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예쓰쌤이 저기서 이제 시작하자고 한다.

팔레트에 물감을 짠다. 역시 예상대로 파란색과 흰색 올려진다.

누가 봐도 페페를 그리겠구만.

붓을 들고 스윽 칠해버린다.

‘음. 바로 색칠인가.’

아까부터 느낀 건데 색칠을 하고 선을 살짝 그리는 느낌이다.

옆으로 본 종아리 부근에 페페가 탄생한다.

다리를 다 쓰는 건 아닌가 싶었다.

‘좋네.’

발 부분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오로지 페페에 집중한다. 나는 렌즈 너머로 비치는 시하의 그림을 보았다.

페페는 언제봐도 귀여워서 인기가 많을 것 같다.

어쩌면 여기 전시했을 때 저거 이모티콘 그림 아니냐고 손으로 가리키는 아이들도 있을지도.

아니, 뭐 그렇게 유명한 것까지는 아닌데 알 수 있잖아.

혹시 초등학생이라도 폰으로 페페티콘을 쓸지도 모르고.

물론 굉장히 재밌거나 괴짜 같은 임티를 많이들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인기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누구에게 묻고 있는 걸까? 그런 한심한 상념에 빠져있을 때쯤.

“응?”

시하가 페페를 다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흰색을 위로 뻗으며 칠하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빙하의 모습을 배경으로 칠하는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게 흰색이었으니까.

그런데 달랐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삼각형의 꼭짓점이 페페를 가리킨다.

저게 대체 뭐지?

“이케. 이케.”

거침없이 허벅지까지 영역을 침범하더니 그제야 살며시 입이 벌려진다.

시하가 배경으로 대체 뭘 그렸는지 알았다. 아니, 이건 배경이 아니다!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던 상상의 영역이다.

오히려 내 상상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스타킹을 신는 마네킹의 다리를 보면 허벅지가 좀 굽혀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대각선 위로 말이다.

그 부근에 시하가 그린 것은 또 다른 거대한 펭귄이었다.

“우와.”

배경으로 빙판을 칠한 줄 알았던 흰색은 커다란 페페의 배였으며, 작은 페페를 가리킨 삼각형은 커다란 펭귄의 손 부분이었다.

등과 몸통의 일부분은 다리라는 캔버스에 전부 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하의 상상력은 이 다리 너머로 쭈욱 뻗어가고 있었다.

‘미쳤다.’

만약 이게 실사화된 펭귄 그림이었다면?

순간 소름이 돋았다.

허벅지에 얼굴만 드러나 있을 뿐인데 이미 거대한 페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고 있다.

시하가 말한다.

“아기페페.”

“응.”

“형아페페.”

“!!!”

여기까지 와서 형아페페도 그린다고? 얼마나 형아페페를 그리고 싶었던 거야!

하여간 형과 동생이 같이 있는 것 같다.

둘 다 하늘을 보는데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어쨌든 마네킹 다리가 저리되어 있어서 페페가 하늘을 볼 수밖에 없긴 하지만.

마네킹 허벅지에 조금 남은 부분을 시하가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검은 하늘을 그린다. 그 사이사이에 별들을 그리는데 색들이 두 가지다.

분홍색 별들과 파란색 별들.

두 형제인 페페는 하늘에 있는 별무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 해따!”

정말로 멋진 그림이다.

“근데 발은 뭐야?”

“어룸이야. 어룸.”

“아, 얼음. 빙판이네?”

“아아. 빙빙이야.”

“그렇구나.”

빙판은 빙빙이라는 이름이구나. 나는 거기서 왜 아이스크림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우와. 시하 진짜 멋지게 그렸네.”

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구마구 칭찬해 줬다.

이 정도면 진짜 전시에서 볼 만하지 않아?

그때 예쓰쌤이 보시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진짜 잘 그렸어요. 대박! 여기 활용하는 게 무슨.”

“하하하.”

“이건 무조건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야겠는데요? 우와. 대박.”

“아, 그래요?”

“그럼요. 지금 프로그램 참여하는 애 중에 상위예요. 상위.”

“그 정도까지는.”

“아니. 진짜라니까요. 아마 여기 말고 저쪽 반에 쫌 하는 애가 있긴 한데. 그래도 이건 상위죠.”

“좀 하는 애요?”

“네. 여기 프로그램을 자주 참여하거든요. 뭔가 박살 내는 걸 좋아하는 아이긴 하지만.”

“아하.”

어? 나 그거 크리스마스 행사할 때 본 거 같은데?

혹시 그 작품의 아이인가?

뭐, 상관없겠지.

이런 그림으로 대결해서 뭐 하겠나.

지금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시하도 좋아서 만족한 표정이지 않은가.

“형아. 이거 사진 안 찌거?”

“아, 그래. 그래. 사진 찍어야지. 잠시만.”

나는 일단 찍고 있는 영상을 이리저리 잘 보이게 한 번 더 촬영했다.

그리고 각도를 잘 맞춰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시하 잘해써?”

“엄청 잘했지. 혹시 이게 엄청 비싸게 팔릴지도 몰라. 막 그런 거 있잖아. 부자가 와서 이 작품 내가 사겠네! 하고 말이야.”

“얼마에여? 싸게 해주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싸게 해주면 안 돼.”

“왜?”

“비쌀수록 가치가 있다고 할까?”

“구럼 비싸게 해주께!”

“푸흡. 그래.”

“형아. 이거 얼마야?”

“어? 형아가 가격 정하면 돼?”

“아아.”

흐음. 나는 사실 그림이나 작품 같은 걸 사 본 적은 없다.

그리고 거기에 가격을 얼마나 매기는지도 잘 모른다.

그럼 내 마음대로 메기면 되지 않겠나.

“가격은 우주만큼?”

“!!!”

시하가 눈이 커졌다.

놀란 표정보다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큰일나써!”

“왜?”

“시하 주머니에 우주 안 드러가. 큰일나써!”

“푸흡!”

너는 그냥 돈은 주머니에 넣을 수 있으면 되는 거지?

하여간 귀엽다.

근데 시하야. 너 통장에 있는 돈 다 꺼내도 주머니에 못 넣어.

물론 통장이나 카드는 넣을 수 있겠지만.

“형아. 할부지한테 가야 해.”

“응?”

“마술로 다 너어. 구럼 우주도 너을 수 이써.”

그럴 리가 있겠니?

어마어마한 상상력이네. 마술이면 다 되네.

너한테 할아버지 마술사는 대체 어떤 존재니? 우주까지 주머니에 넣을 정도라니.

아까 놀았던 능력자보다 더한 것 같다.

***

승준과 하나도 어느새 완성되었다.

먼저 얼굴을 고른 하나는 노란색으로 예쁜 나비를 그렸다.

3자 모양의 날개 두 개가 붙어있는 간단한 그림.

특이한 점이 있다면 눈에 꽃을 그렸다.

눈꺼풀이 꽃잎이 되어 활짝 폈다.

근데 마네킹의 눈 자체가 사람처럼 타원을 그리고 있어서 뭔가 예쁜 원에 핀 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비가 꽃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얼굴 전체적으로 쓴 게 아니라 한쪽만 썼다.

하긴 다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시혀기 오빠. 하나 꺼 어때?”

“엄청 예쁜 꽃인데? 나비가 꽃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도 좋아.”

“나비 귀엽지?”

“응. 나비 엄청 귀여워.”

“헤헤헤.”

하나도 나름 만만치 않은 상상을 발휘한다.

역시 시하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걸까?

뭐, 하긴 우리가 꽃을 몇 번 보러 다니긴 했으니까.

“시혁이 형아. 내 꺼도 봐봐.”

“응.”

승준이 몸통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승준이답다 할 수 있고 괴상하다고 하면 괴상할 수 있었다.

어떤 점이 괴상하냐고?

“복근에 축구 골대가 있네?”

“응! 사커 골대야.”

“6개나 있네?”

“응. 많아.”

복근에 여섯 개의 네 모.

한마디로 골대가 모여 있었다. 이거 참. 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게 나온 것인지.

“여기 사커공도 있어.”

“그러네? 두 개나 있네?”

뭐라 참 위치를 표현하기에 그런 곳에 축구공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거 일부러 그런 거지?!

“아, 재밌다!”

“하나도 재밌어.”

“시하도!”

그래도 아이들이 즐겨줘서 참 고마웠다.

어찌 보면 그냥 그림 그리는 거라 지루할 수도 있는데 뭔가 다들 진지하게 열심히 한다.

누가 보면 심각한 작품을 만드는 줄 알겠다.

근데 막상 까보면 유쾌한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

나는 그 차이가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시혁이 형아. 이거 이제 들고 가?”

“어? 아, 아닐걸? 이거 여기 전시한다고 하던데?”

“진짜?! 내일?”

“아니. 여기 전시가 끝나고 테마 바뀔 때?”

“에이. 뭐야.”

“금방 바뀔 거야.”

여기 미술관 전체를 한 번에 바꾸는 게 아니라 한 구역을 바꾼다고 해야 하나?

의외로 여기는 건물이 크긴 해서 이것만 전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현직 작가들도 전시하기도 하니까.

그때 시하가 말했다.

“갠차나. 갠차나. 사진 찌그면 대.”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

시하는 벌써 그 진리를 알고 있나 보다.

“그럼 다 같이 작품 앞에서 사진 찍을까?”

나는 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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