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5화 (335/500)

335화

“이제 시하 해져. 형아처럼 머시께!”

나는 붓을 들었다.

시하는 형아가 되고 싶다. 근데 아무래도 얼굴에는 못할 것 같다.

눈을 감고 있는데 고민이 든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손에 총 모양으로 잘 그려놨는데 나는 멋있게 못 그리면 좀 그러니까.

요구사항이 너무 어려워서 머뭇거리게 된다.

음. 일단 검은색을 붓에 찍었다.

시하처럼 바로 색칠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잘 못 하겠다.

일단 선이 필요했다.

‘뭘 그리지?’

고민하다가 시하의 눈 아래에 점을 콕 찍었다.

이른바 눈물점이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아?”

“짜잔.”

시하에게 보여 주니까 눈을 껌뻑 떴다.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이다. 너무 귀엽다.

“이제 시하는 다른 사람이야.”

“???”

“아무것도 아니야. 형아가 멋있게 그려줄게.”

아무래도 시하에게 뻔뻔한 변장은 안 통하나 보다.

아니, 막장 드라마에서 점만 찍고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면 통했다고.

“좋아. 간다.”

“아아.”

광대를 중심으로 흰색을 가지고 엑스 표시를 한다. 교차점에 세로로 일자를 긋는다.

그다음 아치 모양으로 둥글게 이어 그린다.

그렇다. 거미줄을 그리고 있다.

시하의 볼에 귀여운 거미줄.

그 이상은 뭔가를 못 그리겠다. 근데 내가 잘하는 건 언제나 그림이 아니잖아.

이런 창의력은 시하가 발휘하는 거지 내 분야는 아니다.

“짜잔. 다 했어. 거미줄이야.”

“거미줄?!”

“응.”

“형아 아닌데? 시하 형아 되고 시푼데.”

“근데 시하야. 들어봐. 형아가 되는 건 멋있어지는 거잖아.”

“아?”

“하지만 이건 그냥 거미줄이 아니라는 말씀. 멋있게 될 수 있는 능력의 표시야.”

“능력?”

“응.”

나는 왼손가락 두 개를 세워서 인간처럼 움직였다.

오른손은 쫙 펴서 마치 거미줄인 척했다.

“이 능력은 거미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한마디로 상대방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거지.”

오른손이 왼손의 인간을 콱! 잡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이 능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으윽. 여기에 벗어날 수 없어.”

“!!!”

어느새 하나와 승준도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다.

후후후. 어쩔 수 없지.

“시하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 엄청 멋진 능력이지. 그거뿐만 아니야. 이렇게 묶인 적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공격이 필요하지.”

“공격?”

“응. 바로 시하가 그려준 이 총!”

나는 오른손을 총 모양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왼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똥폼을 잡으며 사격 자세를 취했다.

팔과 몸은 직각을 이룬다.

“빵! 여기에 불이 나가며 적을 없애지.”

여기에 시하가 좋아하는 결정적인 한마디.

“한마디로 시하랑 형아랑 가치야. 이 능력 두 개가 없으면 적을 물릴 칠 수 없어.”

“형아랑 가치?!”

이미 내 그림에 시하가 넘어왔다.

그래. 어차피 그림 못 그리는 거 스토리를 엮어서 시하의 관심을 돌리는 거다.

나처럼 그릴 수는 없지만 나랑 함께 멋있을 수 있다.

적을 없애는 거다.

이러면 시하가 끔뻑 넘어가는 거지.

근데 꼭 이렇게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었을까?

너무 과했다.

인제 와서 부끄러움이 올라온다.

자연스럽게 팔을 내렸다.

“머시써!”

아무래도 통했나 보다. 아, 능력자는 못 참지. 일종의 놀이니 아이들도 금세 빠져든다.

“우와! 시혁이 형아! 나도! 나도! 능력 그려줘.”

“하나도. 하나도. 같이 싸울래.”

아니,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나는 그림 못 그린다고! 어떻게 할까 생각했는데 이건 본인들에게 맡기자.

“그럼 하나랑 승준이 둘이서 능력을 그려주는 건 어때?”

“오빠는 이상한 거 그린단 말이야.”

승준이 피식 웃었다.

“나도 하나가 이상한 거 그려서 시혁이 형아가 그려줘야 해.”

“그건 오빠가 먼저 했잖아.”

그래. 아까 승준이 장난을 친 바람에 서로에게 불신이 생겨버렸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시하가 승준이에게 능력을 주고 내가 하나에게 능력을 그려줄게. 됐지?”

둘 다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로 마주 보고 그리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도 재밌게 그리고 있는지 한참 진행 중이다.

그럼 하나는 뭘 그려주지?

“하나가 갖고 싶은 능력 있어?”

“우웅. 없어.”

“그래? 그럼 나 마음대로 그린다?”

“시혀기 오빠가 아무거나 그려도 하나는 다 조아.”

“!!!”

그런 영광스러운 대사가 있다니.

내가 제일 잘 그리는 거로 그려줘야 했다.

어릴 때 낙서하면서 마법 지팡이이라는 걸 많이 그렸다.

사람은 졸라맨인데 마법 지팡이만은 퀄리티가 꽤 괜찮았다.

게임도 지팡이가 많으니까.

“손등에 그려줄게.”

“응!”

역시 초승달 모양의 지팡이가 멋있고 짱이지.

그 가운데 떠 있는 마름모 모양의 보석도 그리면 완벽하다.

지팡이 잡는 부분은 엑스 자로 교차한 문양이 계속 그려지며 내려간다.

실용성? 그런 건 마법 지팡이에 필요 없다.

무조건 멋있으면 된다.

“우와! 마법 지팡이다!”

“하나는 마법 지팡이가 뿅 하고 나와서 마법을 부릴 수 있어.”

“진짜?”

“응. 어때? 능력 좋지?”

“응!”

아기들이 좋아하는 분홍색 요술봉은 아닐지라도 이런 마법사 지팡이면 충분히 좋아할 만하다.

여자애들은 지팡이 좋아하지 않나?

물론 하나는 검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옆을 힐끗 보니 시하도 승준에게 멋진 능력을 그려주려고 하는 모양이다.

얼굴은 이미 해골이 되어버렸으니 팔뚝에 그리는 것 같다.

승준이 옷을 걷어서 보여 준다.

“여기에 멋있게. 알았지?”

“시하가 머시께 그려주께.”

어디서 본 건 있는지 팔뚝에 그려 달라고 하네.

근데 과연 시하는 무엇을 그릴지 궁금하다.

고민이 끝났는지 붓이 거침없다.

흰색이 원을 그린다. 원 안에 원을 하나 더 그렸다.

안의 원에 들어가는 번개 모양을 삐죽삐죽 그린다.

아무래도 전에 해적 놀이를 했을 때 번개를 생각하며 그리는 것 같다.

“오오! 이거 뭐지?”

“찌릿찌릿이야.”

“번개네!”

분명 시하는 찌릿찌릿이라고 했는데 승준은 번개라고 해석한다.

저거저거 통역사 해도 되겠는데?

“흰색으로 하니까 뭔가 멋있다. 번개라서 노란빛으로 할 줄 알았는데.”

사실상 번개라고 하면 흰색으로 보이긴 하는 것 같다.

번쩍거리는 것도 있긴 하니까.

“아냐. 파란색도 이써.”

시하가 파란색에 붓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흰색으로 그려진 그림의 테두리를 따라 칠하기 시작한다.

옅게. 아주 옅게 말이다.

두 번의 터지는 잘 하지 않는다.

색이 진해지지 않게 하는 것 같다.

“오오오! 멋있어!”

“찌릿찌릿 능력이야.”

“번개 능력이구나!”

여기 사실 보디 페인팅하러 온 게 아니라 어디 영화촬영을 온 건가?

특수분장팀에게 화장을 받는 거지.

뭐, 애들이 만족했으면 됐다.

그건 그렇고 정말 단순하게 그린 것 같으면서도 멋졌다.

저게 바로 재능이라는 걸까.

승준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능력자 놀이하자!”

좀 봐주라. 여기 그런 놀이를 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러면 하나가 마법 쓰고 오빠가 번개 공격 해. 시하가 붙잡아 두고 시혀기 오빠가 총을 빵야빵야 쏘는 거야.”

여기서 아이들이랑 그렇게 놀면 나의 정신력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집에 가서 놀자! 응?!

그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예쓰쌤이 오셨다.

“와! 진짜 잘했네요? 제가 뭘 더 해주거나 그러지 않아도 되겠네요.”

“하하하.”

예쓰쌤은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하는 걸 좀 봐주며 더해 주거나 아니면 조그맣게 그려주고 하는 것 같았다.

아직 보디 페인팅 시작도 안 했는데 이래도 되나 싶다.

“오늘 프로그램은 이런 것에 친숙해지는 거니까요. 그럼 좀 쉬거나 노는 시간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아앗, 안 돼…….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해 보니 이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뭔가 수업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놀거나 쉬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여기 미술관은 구경할 것도 많으니까.

“형아! 놀자!”

“어? 응. 그래.”

당연히 어린이 미술관인 만큼 놀이 시설이 있었다.

***

쉬는 시간이 생겼다.

아이들은 다들 흩어졌다. 놀이방으로 가는 부류도 있었고, 구경하러 내려가는 부류도 있었다.

잠깐 차 마시러 카페 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놀이방 가는 쪽이다.

“시하야. 가자! 저기 괴물을 쓰러뜨리는 거야. 하나야. 너도 빨리 와.”

“오빠. 같이 가.”

“아라써!”

도도도 공 풀장으로 뛰어가는 아이들.

시하가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손짓한다.

어? 거기 어른이 들어가기에는 많이 비좁을 것 같아.

멀리서 손만 흔들어주자.

“형아 가치!”

“형아는 지금 총알을 열심히 넣어야 해. 나중에 갈게.”

“아라써! 빨리 와야 해!”

나는 시하를 떠나보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좀 앉고 싶다.

여기서 지켜봐도 아이들이 무슨 놀이를 하고 어떤 말을 하는지 잘 들렸다.

“시하야. 저기 적이 있어.”

승준이 가리킨 곳을 보자 세워진 그물망이 있었다.

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시하도 보여.”

정말 보인다고?

시하는 손가락으로 그림이 그려진 볼은 톡톡 두드린다.

게임도 아닌데 두 번 클릭하면 능력이 써지는 건가?

“적이 잡혀써. 지금이야.”

“하나야. 공격하자.”

“하나는 지팡이로 레이저 쏠게.”

지팡이 엄청나네. 레이저면 다 끝장나는 거 아닌가.

“나는 전기공을 던질 거야.”

승준이 공풀장의 공을 하나 집더니 힘껏 던졌다.

적은 공격에 맞고 쓰러졌는지 세 아이 다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앗! 이제 힘이 다 됐는데 위험해. 다른 적들이 오고 있어.”

“오빠. 어떻게 알아?”

“나는 전기로 와이파이 돼서 알고 있지.”

시하도 거기에 참여했다.

“시하도 다 아라!”

“시하는 어떻게 아라?”

“시하는 그냥 다 아라. 다 바써.”

이유가 없다. 이유가. 그냥 다 알고 다 보이나 보다.

뭐지? 저 능력이 훨씬 발전해서 그런 능력까지 각성한 걸까?

“여기에 숨자.”

아이들이 풀장 아래로 꼬물꼬물 숨었다.

공을 통해서 안 보이게 하는 작전인가 싶다.

“다 숨었지?”

“다 숨었어.”

“다 숨어따!”

근데 숨기는커녕 허리와 엉덩이가 다 보인다.

너희들. 얼굴만 잘 숨기면 다 숨은 거지?

너희들 눈에만 안 보이면 되는 거지?

그 안에서 뭔가 속닥거리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이제는 충분히 놀아서 쉬는 시간도 끝나가는 모양이니 마무리를 해줘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이들 쪽으로 갔다.

이제야 말소리가 들린다.

“갔어? 갔어?”

“아직이야. 아직 안 갔어. 발소리가 들려.”

미안. 그거 내 발소리야.

“시하가 훠이훠이 하까?”

파리 내쫓듯이 내쫓을 모양이다.

그런다고 적이 도망칠까? 이리 애들이 약해져 있는데.

“으윽. 빨리 힘을 충전해야 해. 전기 코드 꽂아야 하는데.”

승준아. 너의 번개 능력은 가정용 220V로 충전하는 거였니?

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웃긴다.

“하나도 이제 건전지 떨어져서 마법 못 써.”

그래. 마법 지팡이든 요술봉이든 장난감은 건전지를 넣어서 소리와 빛이 나긴 하지.

어마어마한 설정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그러면 시하의 충전 방식은 뭘까?

“시하는 형아랑 가치야 해. 형아랑 가치 이써야 충전대.”

나랑 같이 있으면 거의 무한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구만.

아주 사기적인 능력이다.

아마 시하를 쓰러뜨리려면 나를 먼저 쓰러뜨리거나 떨어뜨려 놓아야 할 것이다.

모든 설정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탕! 탕! 탕! 얘들아. 형아가 다 쓰러뜨렸어. 이제 밖으로 나와도 돼.”

“!!!”

시하가 먼저 고개를 벌떡 들었다.

“형아!”

승준이 얼굴을 들고 시하의 머리를 다시 풀장에 쏙 넣었다.

“바보야. 가짜로 변신한 사람이야. 빨리 숨어.”

“아?”

“이거 봐봐. 나도 해골 얼굴로 변장하고 있잖아. 시혁이 형아도 가짜라고. 우리를 불러서 공격할 게 분명해.”

“!!!”

뭔데. 뭔 그런 흥미진진한 설정인데.

그건 그렇고 이제 좀 갔으면 좋겠다.

“얘들아. 이제 시간 다 되어 가는데 가야지.”

“저 봐. 아까 시혁이 형아가 말했잖아. 나중에 우리랑 논다고. 근데 지금 밖으로 가자고 하잖아. 가짜야. 가짜.”

아니, 저기 승준아?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걸 여기 써먹는다고?!

노는 것에 진심인 아이들이었다.

굉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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