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오랜만에 어린이 미술관에 도착했다.
여전히 전시는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바꿀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거겠지.
오늘 할 것은 보디 페인팅.
나도 어디 뉴스로만 보았지 실제로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형아. 시하 여기 아라.”
“응. 전에 와 봤지?”
“시하가 산타 그려써.”
VR로 그렸던 그림.
그거 배경 하나는 정말 좋았는데. 그리고 시하의 그림이 전시된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우와! 이번에는 나도 그린다!”
“하나도! 하나도!”
쌍둥이들도 같이 왔다.
승준 엄마는 애들이 좋아하는 걸 흐뭇하게 바라본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잘 선정되셨네요.”
“운이 좋았죠. 시혁 씨는 운이 아니에요?”
“아, 저는 그때 권유받아서 그런지 신청만 하면 거의 통과더라고요. 그때 이후로 처음 신청하기도 했고.”
“역시 시하는 그림을 잘 그리죠? 그때 재능이 넘쳐 보이던데. 그쪽으로 진로를 가게 할 건가요?”
“아니요. 그냥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어요. 잘한다고 다 이런 직업을 가지는 건 아니니까요.”
“아, 하긴. 근데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뭔가 그렇잖아요. 이 아이가 이런 재능이 있으면 꼭 거기 가는.”
“발전시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그렇게 관여하고 싶지도 않아요.”
지금은 그림을 좋아하니까 참여시키는 것뿐이다.
만약 내가 이 재능을 위해 이것저것 간섭하고 지원해 준다면 시하는 이것에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물론 피아노에 재능 있는 아이를 피아니스트로 훈련하거나, 골프에 재능 있는 아이가 골프를 하게 하거나, 축구에 재능 있는 아이가 축구팀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신화 같은 기록을 치운 사람들이 존재하고, 인터뷰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일까.
‘모르지.’
어느 분야든 탑을 찍으려면 꼭 필요한 게 있다.
끈기. 이 일이 질릴 정도로 훈련한다.
즐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걸 즐거움만으로 찍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솔직히 그런 능력 면을 보기보다는 시하가 고민하며 무언가 선택을 해서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돈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정신에 중심을 뒀으면.
마음에 끌려가지 말고, 넘어져도 언제나 일어설 수 있으며, 뚜벅뚜벅 한 걸음을 우직하게 내디뎠으면.
풍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전까지는 내가 지켜줘야지.
“얘들아. 가자.”
우리는 프로그램이 진행하는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안에는 한 20명의 아이와 부모님들이 있는 것 같다.
듣기로는 40명 정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인원수 때문에 다른 쪽에서 따로 진행하나 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쓰쌤이에요.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보디 페인팅이라는 걸 할 건데 여기 이 마네킹에 그림을 그릴 거예요.”
시하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손가락으로 마네킹을 가리킨다.
“형아. 몸만 이써.”
“그러네.”
상체만 달랑 있는 마네킹.
얼굴만 달랑 있는 것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있는 건 없었고 그냥 따로따로 있어서 뭔가 로봇이 망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분리된 것이 그림을 그릴 면적도 적어서 꽤 괜찮은 것 같다.
“먼저 익숙해지기 위해서 얼굴이나 우리 팔에 한번 그려볼까요?”
“!!!”
아무래도 마네킹에 먼저 작품 할 걸 그리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재밌게 놀 수 있게 페이스 페인팅이라도 할 모양이었다.
부모님들도 참여할 수 있다고 하니.
아, 하긴. 거울 보고 자기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건 좀 그런가.
“형아. 형아가 시하 얼굴에 그려져?”
“어?”
“구럼 시하가 형아 얼굴에 그려주까?”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나 보니까 아이들끼리 짝지어서 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님이랑 같이하는 아이도 있다.
승준과 하나는 서로의 얼굴에 하기로 했나 보다.
“으음.”
분장이라는 거 살면서 해본 적 없는데 오늘 하게 될 것 같았다.
물론 그냥 작은 그림을 그리는 거지만 시하가 뭘 그릴지 모르잖아?
“알겠어. 형아가 열심히 할게.”
“시하 머시께 그려야 해.”
“응. 혹시 원하는 그림이 있어?”
뭔가 말해도 그대로 그려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시하처럼 막 잘 그리는 건 아니니까.
“시하는 형아!”
참 어려운 주문을 하는구나.
화장은 성형이라고 하지만 얼굴을 형아처럼 바꾸는 건 힘들지 않을까?
일단은 노력해 본다고 말은 해뒀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일단 컬러 팔레트를 받았다.
얼굴에 바를 수 있는지 크림으로 되어 있었다.
꼭 생긴 게 화장품 같다. 아니, 얼굴에 바르는 용도로 나온 거니까 화장품이 맞는지도.
“형아 어디 해 주까?”
“어?”
아무래도 시하가 먼저 그리려는 모양.
근데 아까 얼굴에 해주기로 하지 않았나?
주위를 둘러보니 얼굴에 하는 사람도 있고 팔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그걸 봐서 물어보는 것이리라.
그래. 얼굴은 부담스러우니까 팔에 할까?
“팔에 해줘.”
“그럼 시하가 손에 해주께.”
“???”
팔에 해달라고 하는데 손에 해주는 시하였다.
이미 정했으면서 왜 물어본 건데!
“시하가 형아 머시께 그려주께.”
“응. 고마워.”
시하 앞에서 손을 보여 주었다.
붓을 들더니 빨간색부터 콕콕 찍어서 검지와 중지를 바르기 시작한다.
그림부터 안 그리고 색칠부터 한다고?
뭐 알아서 하겠지.
“형아. 보면 안 대!”
“보면 안 된다고?”
“시하 짜잔 할 거야. 보면 안 대.”
“알았어.”
나는 옆에 있는 승준이랑 하나를 쳐다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시하의 그림은 공개하기까지 비밀인 모양이다.
“푸하하. 나 먼저 그린다?”
“오빠. 얼굴에 그릴 거야?”
“당연하지.”
“하나도 얼굴에 그릴래!”
“그래. 그럼. 나 먼저 그린다?”
“응.”
승준이 붓을 쥐더니 고민도 없이 검은색을 쓴다.
붓을 하나의 볼에 댄다. 아무래도 그 부근에 그림을 그리려는 모양이다.
“오빠. 예쁘게 그려줘야 해. 알았지?”
“알았다니까.”
그리 대답하며 노래를 부른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앗! 그 노래는?!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더래~ 지렁이가 세 마리. 아이 무서워. 아이 무서워. 해골바가지.”
하나의 볼에 예쁘기는커녕 해골이 그려져 있다.
“앗! 오빠! 해골 그렸지!”
“아니야. 노래만 해골이야.”
“진짜?”
“아하하. 응.”
수상한 웃음에 하나는 의심스러웠지만, 거울을 볼 수 없어서 일단 믿기로 했나 보다.
하나야. 너 얼굴에 해골 그려져 있는 거 맞아.
“아직 다 안 그렸어. 가만히 있어 봐.”
“응.”
다시 시작된 노래.
“6월 6일은 왕의 날! 6월 6일은 산에 올라가는 날.”
하나의 해골에 6 모양의 팔다리가 생겼다.
배에 복근까지 완벽한 모양이다.
아니, 승준아. 너 나중에 하나에게 맞는 거 아니야?
“이제 색칠해야지. 하나가 좋아하는 핑쿠색으로 해줄게.”
“응!”
해맑은 하나의 목소리.
아니. 시하야. 형아 네 그림 보면 안 돼? 보고 있기 괴로워.
승준 엄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냥 지켜보는 중이다.
앞으로 올 예정된 파란을 알면서 내버려 두는 건가. 이게 바로 교육법인가.
“분홍색. 분홍색. 예쁜 분홍색.”
하나의 얼굴에 복근을 가진 핑크 해골이 완성되었다.
예쁜 건 이미 물 건너갔다.
하여간 승준이의 장난기는 못 말린다.
“엄마. 폰 보여져.”
그리고 폰에 찍힌 자신의 얼굴을 본 하나는.
“이익!”
단단히 뿔이 났다.
핑크 해골을 보고 좋아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차라리 주름 말고 해골로 해적 표시를 만들었으면 또 예뻤을지 모르겠다.
“오빠! 해골이잖아.”
“푸하하! 아 웃기다.”
“야. 오승준!”
“오빠 보고 오승준이라니!”
“얼굴 대. 얼굴. 오승준 너 죽었어.”
“아, 싫은대~”
승준이 하나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다.
그리고 스르륵 나타나는 승준 엄마의 도움.
팔을 잡더니 의자에 앉혀서 손으로 얼굴을 고정했다.
“아악! 엄마!”
“승준아. 이걸 자업자득이라고 하거든? 뭐든지 자신의 한 일에 책임을 지는 거란다. 하나야. 어서 그리렴.”
“히히!”
하나가 신났는지 붓을 들었다.
과연 어떻게 복수할까?
“오빠! 눈 감아!”
“아, 싫어!”
하지만 들이대는 붓에 승준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가 눈 주위로 크게 원을 그린다.
판다라도 만들어 버리는 건가.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아니! 저 노래는!
“으아악!”
승준이 어떻게 될지 직감했는지 입을 열어 비명을 지른다.
이걸 지켜보던 애들은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보인다.
너희들이 여기에 큰 웃음을 선사하는구나.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더래~”
승준의 입가에 네모가 만들어지고 비가 내린다.
“지렁이가 세 마리! 아이 무서워. 아이 무서워. 해골바가지.”
이마에는 주름이 있고 얼굴형에 전체적으로 하나가 해골을 그린다.
근데 턱 부분은 좀 남겨두었다.
“아직 안 끝났어. 6월 6일은.”
아. 그 이유는 해골의 몸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비대해진 해골 얼굴에 개미만 한 몸이 완성되었다.
아, 저거 뭐야. 진짜 웃기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아이들도 푸하하 웃는다.
“이제 색칠해 주께.”
하나는 해골 몸만 흰색으로 색칠하고 마무리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복수라서 뿌듯해했다.
너희 정말 재밌게 노는구나.
“해골바가지는 색칠 안 해 주께. 너무 많아.”
“으아악!”
승준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얼굴 자체가 해골이 되어버렸다.
한참을 보더니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사진 찍어줘!”
“어?”
“이거 남겨야지!”
“어, 그래.”
의외로 승준은 이상한 얼굴이 마음에 든 것 같다.
혀를 위로 내밀면서 인상적이게 찍는다.
뭐라고 할까. 저거 나중에 분명 흑역사일 것 같은데.
정상적인 사진은 없을 것 같은 느낌.
“나도 찍을래.”
하나는 옆에서 승준이에게 꿀밤을 먹이는 포즈를 취했다.
승준 엄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일상이죠. 뭐.”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자 시하가 ‘다 해따!’ 하며 소리를 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어보았다.
“봐도 돼?”
“형아. 눈 감고 바야 해.”
“눈 감으면 안 보이는데?”
“아냐. 감아야 해.”
아무래도 내가 눈 감았다가 그림을 봐야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멋있는 그림이길래 그러는 거지?
혹시 페페 아니야?
“감았어.”
“시하가 눈 가리께.”
의자를 가까이 대는 소리가 들린다.
눈덩이에 시하의 손으로 추정되는 감촉이 느껴진다. 작다.
근데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그 짜잔을 위해서?
뒤로 돌아서 눈을 가릴 정도로 해야 하다니. 어디서 뭔가 본 건 있는 모양이다.
“형아. 손 위로 드러야 해.”
“어.”
손 치웠을 때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손을 들어야 한다니.
웃기긴 하다.
“간다. 짜잔!”
“근데 시하야. 짜잔 한 건 좋은데 손은 떼야 형아가 보지.”
짜잔만 하면 뭐 해! 손이 눈에 붙어 있는데. 눈을 못 뜨겠어!
“아코! 시하가 실수해써! 실수. 실수.”
시하가 내 눈에서 손을 뗐다.
‘짜잔’ 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눈을 뜬다.
손이 보인다.
“어?”
“형아. 머시써!”
나는 자연스럽게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내 손은 붉은색이 감도는 총이 되어있었다.
검지와 중지는 총구와 총신으로 되어 있으면서 손등에는 손잡이가 그려져 있다.
생각보다 진짜 재대로 된 페인팅인데?
다른 아이들도 감탄을 뱉는다.
“우와! 쩐다!”
“손으로 총을 만들 생각을 하네?”
“진짜 멋있다.”
승준과 하나도 시하에게 칭찬을 뱉는다.
“시하야. 진짜 멋있어. 시혁이 형아가 더 멋있어졌네!”
“우와. 시하야. 하나도 예쁜 거 그려져. 오빠가 이상한 거 그려줬어.”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진짜 멋있어졌네.”
시하가 허리에 손을 하고 배를 쭈욱 내밀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푸흡. 나는 웃음이 나왔다.
“형아.”
“응.”
자신만만하게 무언가 말했다.
“그거 레드 형아 건이야.”
이름까지 정해 뒀니? 근데 중간에 ‘형아’는 좀 빼자. 너무 부끄럽잖아.
아무래도 이건 레드 형아의 무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