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시하페페 채널에서 하나의 영상이 올라왔다.
오늘도 여전히 따뜻한 그림을 전해주러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시하페페입니다.]
[한 달 만인가요? 자주자주 올려줬으면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아마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종종 찾아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하얀 배경이 나온다.
시하가 그림을 그리면서 녹화 앱을 꼬박꼬박 켠 덕분이다.
여전히 그림은 익숙한 페페로 시작된다.
몸에 덕지덕지 검은 기름이 묻는다. 손에는 스패너를 가지고 있다.
연극에서 보았던 걸 그리는 중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때가 탑니다.]
[좋은 거일 수도 있고 나쁜 거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만 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사회의 냉혹함이나 여러 이데올로기.]
두 번째 그림은 분홍색 페페다.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있지만 몸을 감싸는 누더기 이불을 덮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칭되는 모습을 담았다.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는 사람도 저렇게 몸이 누더기가 되어 있습니다.]
[겉에 보이는 빛이 너무 강해서 저희가 볼 수 없을 뿐.]
세 번째 그림은 남녀 페페가 서로 만나는 모습이다.
심장 부근에 하트가 그려져 있다.
남녀 페페의 하트에는 검은 기름이 묻어져 있다.
가운데로 붉은 선이 긋는다.
마치 넘어가면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서로가 자신의 단점만 보여서 쉽게 용기 내지 못하는 만남.]
[우리는 얼마나 놓치고 있는 걸까요.]
네 번째 그림.
두 페페가 연인이 된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
맞닿아 있는 심장의 하트는 하나가 되어서 기름때 없이 깨끗하다.
물론 페페의 몸에 있는 기름때와 누더기 이불은 그대로 있다.
다만 불투명도를 낮춰서 옅게 보이는 모습을 연출했다.
[용기 내어 서로의 장점을 바라봅니다.]
[서로의 멋진 점을 알고 있기에 칭찬합니다.]
[몸에 있는 때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미 마음만은 뽀송뽀송한 새 이불이 되었으니까요.]
[서로는 이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그림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상의 제목은 ‘칭찬’이었다.
이걸 본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외쳐! 시하페페!!
뭘 외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등장하는 댓글 하나.
-오늘도 따뜻한 이야기야.
-와! 스토리 멋지다.
-근데 마지막에 때랑 허름한 누더기 이불은 옅어졌지만 안 사라졌네. 소름.
-맞아. 그것마저 서로가 받아들였단 거지.
-옅어진 건 오히려 서로의 장점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선명해서 그럴 거야.
-마음이 깨끗해지는 부분이 더 소름.
-외쳐! 시하페페!!
-그만 좀 외쳐! 내가 외칠 거야! 시하페페!!
사람들이 각자 느낀 것을 댓글로 남기고 있었다.
이제는 욕설이 아니면 자동으로 올라가서 답글을 다는 것도 많았다.
그중 가장 많은 답글이 달리는 글이 있었으니.
바로 해석가라 불리는 아이디였다.
[역시 사람이 좀 많아지니까 숨겨진 비밀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많군.
잘 봐. 시하페페는 그 정도가 아니라구.
뭐든 이유가 있단 말이야.
너희들이 했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숨겨진 무언가를 못 봤다는 건 역시 안타까울 수밖에 없네.
시하페페는 유명한 사람이 말한 구절을 글로 표현한 거야!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거지? 이미 제목으로 그렇게 힌트를 줬는데!
심지어 설명과 그림으로도 많은 힌트를 주고 있어.
3번째 그림에서 서로가 자신의 단점을 본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거야말로 서로의 위치를 다르게 보는 거야.
네 번째 그림은 사실 장점을 칭찬함으로써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걸 말하고 있지!]
해석가가 신나서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길어도 너무 길었다.
사람들은 대충 훑어보고 결론 부분을 보았다.
[시하페페가 말하는 유명인의 구절.]
[사람은 남을 칭찬함으로써 자기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자기를 상대방과 같은 위치에 놓는 것이 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 말을 인용한 거야! 역시! 시하페페!]
그런 거 아니다.
그저 시혁이 쓴 글이 우연히 그렇게 보일 뿐이다.
마침 시하가 홀로서기를 해서 칭찬을 마구마구 해줬을 뿐이고 장하다는 마음에서 정한 것이다.
괴테는 생각도 안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답글로 소름이라는 말을 달았다.
-미쳤어! 정말이잖아?!
-저 한 구절을 스토리로 풀어서 보여줬다고?!
-사랑의 용기에 비유해서 일반인들도 공감할 수 있게 말하네?
-와! 그걸 찾아낸 해석가도 어지간하다. 진짜.
-시하페페! 왜 자꾸 숨기는 거냐구!!!
-이제 하다못해 그림으로 인용을 해?!
그런 거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하페페의 대단함을 찬양했다.
픽시브에서 따라온 사람들의 댓글은 이제 찬양하는 것이 일종의 재미였다.
물론 진짜 그럴듯한 해석에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도 했다.
***
시간이 참 빠르다. 이미 연극은 마무리가 되었고 덕분에 내년에도 이 각본으로 연극을 한다고 한다.
내년에 또 내가 쓴 글의 일부가 연기로 나타나 공연이 된다고 하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아~ 아~”
시하는 선풍기 앞에서 입을 벌리며 소리를 내고 있다.
작년에도 저러더니 지겹지도 않은지 올해도 이상한 목소리를 낸다.
“형아. 이상한 목소리 나와.”
“그러네. 신기하네.”
“아~ 아~”
“배 뚱뚱해지는 건 안 해?”
“시하가 벌써 해써.”
아무래도 벌써 배에 바람 넣는 건 했나 보다.
코스가 딱 있지!
선풍기조차 장난감이 되어버린 이 사실을 어쩌면 좋을까.
“형아~ 형아~”
“왜?”
“오늘 모하고 노라?”
“으음. 글쎄. 뭔가 하고 싶은 거 있어?”
“시하는 형아랑 놀면 다 조아.”
“크흑!”
그런 대사는 또 어디서 배웠어.
감동에 젖어 있는데 살며시 뭐 하고 놀지 고민이 든다.
솔직히 밖은 나가고 싶지 않다.
오늘 좀 더워서 나가서 놀다가는 내가 먼저 지쳐버릴 것 같다.
그렇다고 집 안에만 있기에는 좀 그래.
그런 내적갈등에 부딪치고 있다가 일단 너튜브부터 보기로 했다.
“그럼 시하야. 시하페페 채널에 업로드된 영상 볼래?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말해줄게.”
“영상!”
시하가 앉아서 영상을 본다.
편집을 잘했는지 보는 것이다. 옆에서 ‘형아. 머시써!’ 하며 말해준다.
넌 맨날 형아가 멋있지?!
그런 생각으로 보고 있는데 메일 한 통이 눈에 띈다.
어린이 미술관에서 온 메일.
계속 무슨 프로그램을 한다는 메일이 오긴 했었는데 이것저것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근데 오늘 이렇게 눈에 띄게 되었으니 된 거 아닐까?
혹시 좋은 전시가 있으면 보러 가고 싶다.
물론 시하가 참여하면 또 재밌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보디페인팅 전시]
“와.”
“형아. 왜? 머라 적혀 이써? 시하가 일거 보까?”
“너 읽을 줄 모르잖아.”
“아냐. 시하 한글 공부해서 이제 잘 일거. 책도 혼자 일글 수 이써.”
“그래? 그럼 그림책 이제 형아가 안 읽어줘도 되지?”
“!!!”
그 말에 시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아냐. 시하가 다 일글 수 업써. 시하 아는 거 일거서 다 몰라.”
아무래도 아는 것만 읽을 줄 알아서 전체적으로 책을 완독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럼 여기 메일 읽어볼까?”
“아라써.”
시하가 메일을 하나하나 읽었다.
“바보 페페 짜잔!”
하나도 맞지 않았다. 보디페인팅 전시다.
‘페’가 들어있어서 페페라고 말하는 건 아니잖아.
‘ㅂ’이 있어서 바보라고 읽는 건가?
“안녕하세여. 페페에여. 오늘은 바보 페페에 대해서 알려주께여. 페페가 이써써. 머리에 돌을 마자써. 바보가 대써. 공주님 만나서 천재가 대써.”
뭐냐. 전혀 메일과 상관없는 내용은.
어디 착한 어린이만 보이는 글씨가 따로 있나?
아니면 이 메일의 글이 사실은 어떤 암호로 되어 있어서 해석하고 있나?
“형아. 다 일거써!”
저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라.
응. 시하야. 아무리 그래도 그 내용 아니야.
그리고 뭔가 스토리가 바보 온달이 생각나네?
아무튼, 시하에게 알려줄 건 알려줘야 할 것 같다.
“보디페인팅을 한다고 하네.”
“보디페페?”
“아니. 보디페인팅이라고 몸에 그림을 그려서 어때? 멋있지? 하는 거야.”
“몸에 그림 그려?”
“응. 예술로서 승화하는 작업이라고 할까? 이번에 그런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네? 아마 완성되면 전시할 거고.”
읽어보니 아이들은 마네킹 몸으로 그림을 그리고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페이스 페인팅을 진행한다고 한다.
진짜 작가들도 참여하는데 보디페인팅을 통해 영상을 찍어서 전시할 거라고 한다.
하긴 모델들이 전시를 위해 몇 시간씩 조형물로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여기 프로그램에 한번 참여해 볼래?”
“시하 해 볼래. 몸에 그림 그려.”
“응. 그러자.”
참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런 경험은 쉽게 하지 못하니까 이때 한번 해 보는 거다.
어린이들이 만들어가는 미술 전시관.
정말 신기하기는 하다.
한국에 이런 곳을 지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신기하고.
어쩌면 입시 미술만 대중들에게 잘 알려졌을 뿐이지 이런 곳이 종종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런 곳이 좀 다양한 지역에 생겼으면 좋겠네.’
여기 말고는 이런 곳을 찾기 힘들긴 했다.
아이들이 미술 쪽으로 직업을 다 선택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기회의 장이 있는 건 굉장히 좋은 것 같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여기를 참여한 아이 중에 유명한 인물이 나올지.
아, 그럼 한 명은 정해져 있네!
시하는 분명 유명해질 것이니까.
“형아. 오늘 모하고 노까?”
“아…….”
이 프로그램은 왜 참가 신청하자마자 바로 하지 않는 거지?
도돌이표 같은 고민이 다시 돌아왔다.
진짜 오늘은 뭐 하고 놀면 될까?
***
오늘은 일단 승준과 하나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스웨덴에서 산 기념품을 전해 줘야 하고 같이 놀기도 좋을 것 같아서.
일단 연락을 해 봤는데 승준 어머니가 와도 된다고 하신다.
선물을 들고 가지만 빈손으로 들어가기는 뭐 한 거 같아서 음료수라도 사 갔다.
“안녕하세요.”
“아, 시혁 씨. 어서 오세요.”
승준과 하나가 튀어나왔다.
“시하야! 안녕!”
“시하야, 안녕!”
“승준, 하나. 안녕!”
어린이집에서 실컷 같이 있었을 건데 여전히 아이들은 만나며 즐겁게 인사한다.
나는 가방에서 승준과 하나의 기념품을 꺼냈다.
“이건 승준이 거.”
“와! 사커 유니폼!”
“스웨덴의 축구 유니폼이야. 스웨덴 국기 표시 있지?”
“시혁이 형아. 고마워!”
“이건 하나 거. 마그넷이라고 하는 건데 자석이야.”
“예쁘다! 시혀기 오빠. 고마워. 소중히 할게.”
둥근 벳지 같은 느낌의 마그넷.
스톡홀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예쁜 사진이 박혀 있다.
반짝반짝하기도 해서 여행 갈 때마다 모으면 좋기도 하다.
“애들한테 이런 거 안 사주셔도 되는데.”
승준 엄마가 뭘 이런 걸 사 왔냐는 듯이 웃음을 보낸다.
“파자마 파티 때 시하랑 잘 놀아준 게 고마워서요.”
“에이. 우리가 고맙죠. 애들이 얼마나 시하를 좋아하는데. 시혁 씨도요. 이게 얼마나 좋은 친구인데.”
“그럼 서로 고마워하는 거로 해요. 하하하.”
“그래요. 그럼.”
승준과 하나가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시혁이 형아. 오늘 뭐 하고 놀아?”
“시혀기 오빠. 오늘 뭐 하고 놀아?”
“???”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시하가 해맑게 묻는다.
“형아. 오늘 모하고 노까?”
제발 좀 봐주라. 정말.
“해적 놀이 할까?”
겨우 생각해낸 게 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