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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화 (331/500)

331화

집에 온 시하는 백동환과 밥을 먹었다.

그리고 물고기와 새우들에게 밥을 한 번 더 주고 나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백동 형아. 어깨 주물러 주께.”

“어? 그래.”

백동환은 앉았다.

시하는 작은 의자를 들고 와서 백동환 뒤에 놓았다.

“의자에 서서 주무를 정도로 난 크지 않아.”

“아냐. 의자에 이써야 해.”

시하의 말이 맞았다.

의자 위로 올라가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듯이 조심스럽게 놓았다.

딱딱.

피아노 건반과 다르게 누를 수 없었다.

굉장히 단단한 근육이 오히려 시하의 손가락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아?”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백동 형아. 여기 철 이써. 철.”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아냐. 딱딱해. 딱딱.”

“근육이 많이 뭉쳤나 보네.”

시하가 열심히 주물렀지만 백동환은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찔거린다.

“백동 형아. 안 눌러져. 시하가 두드려주께.”

“오! 그게 좋겠다.”

시하가 주먹을 쥐고 똥땅똥땅 두드리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오오오. 이제 좀 시원해진다.”

“시언해?”

“어! 어! 시원하다.”

물론 막 엄청나게 시원한 건 아니었지만 주물러 주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럼 하는 김에 등도 좀 밟아 볼래?”

“해 보께.”

백동환이 엎드리자 곧바로 시하가 올라탔다.

앞뒤로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이게 은근 균형을 잡으면서 움직여야 해서 생각보다 재밌었다.

“딱딱해.”

“근육이 많이 뭉쳐 있어서 그래.”

“정말? 철 너어찌?”

“내가 사이보그인 줄 알아?”

“사이보그 모야?”

“음. 나는 로봇이 아니라는 소리야.”

“백동 형아 로봇이면 재미께따. 시하 데리고 날아서 형아한테 가.”

“그런데 지금 형아가 비행기 타고 오는 중이라 서로 지나쳐 갈 텐데?”

“아냐. 백동 형아가 창문에 얼굴 들이밀어서 손 흔들면 대. 손 흔들면 형아가 백동 형아 보고 괴물이다! 하고 소리쳐.”

“대체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시하가 백동환 위에서 자세를 잡았다.

오른발은 앞으로 왼발은 뒤로. 팔을 살며시 벌린 체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마치 서핑보드를 타는 듯한 자세다.

“구러면 시하는 백동형아 위에 이케이케 타고 이써.”

“내가 날아라 슈퍼보드가 되어버렸구나.”

마사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리고 한참을 서핑을 즐긴 다음에 시하가 내려왔다.

“휴. 마사지 힘드러써.”

“마사지한 거였어?!”

“시하가 다 해써. 이제 백동 형아 등 말랑말랑해져.”

시하가 백동환의 등을 콕콕 찔렀다.

“말랑딱딱…….”

“딱딱하지? 하나도 말랑해지지 않았어.”

“아냐. 백동 형아. 다시 빨리 그뉴기 뭉쳐써.”

“그럴 리가 있나.”

“백동 형아는 가능해.”

“그럼 나는 평생 뭉쳐 있는 채라는 말이잖아…….”

시하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인다.

“백동 형아. 그거야. 그거.”

“그게 뭔데?”

“거봐. 촉촉.”

“응?”

백동환은 그게 대체 뭔가 싶어서 고민하다가 하나 떠오른 게 있었다.

“설마 겉바속촉?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거 말하는 거야?”

“마자! 백동 형아. 그거야. 그거. 시하가 마사지해서 바께는 딱딱하고 안에는 말랑해.”

“!!!”

어마어마한 논리에 백동환은 살며시 입을 벌렸다.

그런 엄청난 사실이?!

시하는 자기 할 일이 끝났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갔다.

“시하야. 어디가. 마사지 더 해 주고 가야지.”

“시하 바빠.”

“뭐 하려고?”

“그림 그려. 시하 바빠.”

“아, 그렇구나. 바쁘구나.”

“백동 형아. 시하가 나중에 노라주께.”

“내가 놀아주는 거 아니야?”

“아냐. 시하가 노라주는 거야. 시하가 형아한테 백동 형아 잘 돌본다고 말해써.”

“???”

백동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시하를 보았다.

누가 누굴 돌보고 놀아주는 건지.

그런데 마사지 받은 것만 생각해 봤을 때 의외로 시하가 놀아준 게 맞나?

그런 생각으로 헷갈릴 때 시하가 패드를 들고 나와서 열심히 페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걸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늘은 또 뭘 그리는지 궁금해서.

***

한국에 도착했다.

택시를 잡아서 곧장 집으로 향했다.

요금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 돈보다 한시라도 빨리 시하를 보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런 게 있다.

교통비 고민을 먼저 해야 하나 시간 고민을 먼저 해야 하나 할 때.

사실상 나는 어릴 때 돈부터 걱정한 것 같다.

좀 더 아껴야지. 아빠가 나를 위해 많이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빠를 더 도와야지.

아무래도 집안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그런 생각으로 뻗어 나갔다.

‘지금은 아니지.’

지금은 오히려 시간이 더 소중했다.

시하가 나와 많이 떨어져 있었다. 홀로서기는 어느 정도 해야 할 텐데 그게 필요한 건 시하가 아니라 나였나 보다.

안달이 난다. 걱정이 든다.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백동환이 있을 텐데도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백동환은 가까운 이웃일 뿐이지 않나.

가족이 아니다.

가족은 가족으로밖에 채울 수 없다.

채우지 못하는 빈자리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걸 알고 있다.

‘내가 외로운 거였어.’

내 남은 가족은 오직 시하뿐이었으니까.

정신적으로 기대는 건 나였다. 내가 집에 돌아갈 이유가 필요했다. 편안한 안식처가 필요했다.

내 마음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 있는데 시하랑 함께 있으면 그래도 새 이불처럼 뽀송뽀송해진다.

1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나는 가족의 부재에 대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다.

근데 이게 이상한가?

가족이 가족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평범한 가정이 어떻게 보내는지는 잘 모른다.

한 번도 평범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있었다. 다만 정말 잠깐 느껴서 기억에조차 남지 못했다.

나도, 시하도.

남들이 말하는 엄마와 아빠가 있는 평범한 가정이란 거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

우리 둘이 잘살면 되는 거다. 그러면 된다.

뒷바라지는 내가 하면 되는 것이고 평범하게 사랑받는 법과 주는 법은 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된다.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 넓은 등으로 무너지지 않을 기둥이 되는 부분을.

오히려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배웠기에 시하에게 그렇게 전해줄 수밖에 없다.

내가 아버지의 대신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도착했습니다.”

“아, 네. 여기요.”

카드를 건네주고 계산을 마친다.

택시에서 내리며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이끌며 다리를 빠르게 놀려 비밀번호를 누른다.

띡. 띡. 띡. 띡. 띠로링.

잠김이 풀리며 문고리를 잡는다.

“형아!”

문도 열기 전에 시하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시하가 도도도 달려오는 모습이 상상되었으니까.

이 얼마나 만나길 기다렸는지.

최대한 빨리 오겠다고 했지만 결국 두 밤째가 와버렸다.

문을 열었다.

“시하야. 안 자고 있었어?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형아!”

내 말에 대답해 주지 않고 와락 안긴다.

나도 시하를 품에 꼬옥 안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했다.

“우리 시하 진짜 대단하다. 형아 없이 하룻밤도 자고. 씩씩하게 잘 있고. 진짜 형아보다 훨씬 낫다.”

“아냐! 형아가 더 머시써. 군데 시하도 머시써. 시하는 형아 동생이니까.”

“푸흡. 그래. 우리 시하 형아 동생이니까 진짜 대단하다!”

나는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 치유된다. 역시 나는 시하가 곁에 있어야 한다. 아직도 내가 어린애 같다.

“레드 형아니까. 시하도 잘 자써. 시하 혼자 이불 빨래도 할 수 이써. 군데 백동 형아는 못 널어.”

“푸흡. 그게 무슨 말이야.”

그때 백동환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말하는 걸 기다리고 있어 줬나 보다.

“형님. 오셨습니까.”

“빨리도 인사한다.”

“갑자기 끼어들기에는 너무 좋은 장면이라서. 시하의 시간을 뺏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이제 가.”

“너무합니다! 시하는 그렇게 칭찬해 주셔놓고!”

“푸흡. 진짜 고마워. 아! 맞다. 내가 기념품 사 왔어. 너도 좋아할 거야.”

“오오오! 기대해도 됩니까?”

“옷이나 신발은 아니야. 시계도 아니고. 너한테 그런 건 웬만하면 안 맞을 거 같아서.”

“무슨 소립니까. 저 사이즈 M이면 됩니다. 평범합니다.”

“거짓말하지 마!”

사이즈 M이 네 팔뚝에 들어가겠냐고!

억지로 넣으면 찢어질 게 분명했다.

일단 캐리어를 열었다. 뭔가 사 오기는 했는데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다.

“잠시만. 아, 여기 있다. 짜잔. 시하야. 선물!”

“형님? 제 선물은?”

“있어 봐. 시하부터 챙기고.”

“너무하십니다.”

시하가 커다란 맥주잔을 받았다.

해적이 들고 있을 법한 오크통에 사슴이 크게 박혀 있는 맥주잔.

“이거 해적이 술 마실 때 쓰는 거래. 엄청 크지?”

“아? 시하 어려서 술 마시문 안 대!”

“술 대신 포도 주스 따라 먹자. 그러면 되지.”

“!!!”

“해적 놀이도 하면 되겠다. 그치?”

“시하 토끼 해적도 만드러써.”

“아, 그 유에포.”

예전에 만든 토끼 유에포가 생각난다.

한쪽 귀를 덮으며 해적이 되는 거였지.

“시하가 후쿠 선장이야. 후쿠.”

“그래. 그래.”

“형아는 후쿠 선장 형아야.”

나 해적 돼도 형아 역이니? 어떻게 뭔가 바뀌지 않아?

마치 배우가 하나의 이미지에 고정된 것처럼 나는 해적을 해도 형아 역이다.

“백동 형아는 배야.”

“난 왜 인간조차도 아니야?!”

“백동 형아 커서 배 하면 대. 군데 백동 형아가 사람 하면 배에 모타. 커서.”

“난 대체 얼마나 큰 사람이야?!”

백동환의 이미지는 이미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인가?

아무튼, 백동환에게도 선물을 주자.

“으음. 사실 그냥 갬성으로 사 왔는데 뭘 좋아할지 몰라서 두 개 사 왔어.”

“오오오! 정말 기대가 됩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나는 주섬주섬 하나를 꺼냈다.

휴대용 위스키병. 물병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그냥 뭔가 멋있어 보여서 가져왔다.

외국 영화에서 보면 저 철제 스테인리스가 뭔가 멋져 보였거든.

가운데 동그랗게 순록도 그려져 있어서 멋들어졌다.

“와. 좋은데요?”

“근데 내가 생각한 이미지는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작아 보이지?”

“착각입니다. 절대 작지 않습니다.”

“아니야.”

“그건 그렇고 다음 선물은 뭡니까.”

“아, 이거 좋아할지 모르겠는데. 피큐어야.”

나는 바이킹 피규어를 꺼냈다.

늠름한 바이킹이 창을 들고 휘날리는 턱수염을 가지고 서 있었다.

아주 우락부락한 팔뚝이 근육을 보여주고 있었고, 남자다운 눈빛과 얼굴이었다.

시하가 외쳤다.

“백동 형아랑 똑가타!”

“푸흡.”

나는 웃음이 터졌다.

백동환은 절대 아니라는 듯이 부정을 한다.

“시하야. 나는 수염이 없잖아. 안 똑같아.”

“그뉴기 이써. 엄청 딱딱해.”

백동환도 솔직히 피규어가 조금은 자신을 닮은 느낌을 받은 것 같은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왜? 별로야?”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시하가 저 닮았다고 하니까 놔두기 좀.”

“응?”

“그게 뭔가 자기애적인 사람이 자신의 피규어를 만들어서 집안에 놓아 장식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괜찮아. 너 안 닮았어. 근육이 네가 더 커.”

시하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마자! 백동 형아가 더 커! 백동 형아가 이겨!”

“대체 나는 왜 바이킹이랑도 싸워야 하는 거지?”

괜찮아. 포기하면 편해. 넌 그런 이미지야.

내가 형아 이미지로 박혀 있는 것처럼 백동환은 거의 사기급 근육 초월자로 이미지가 박혀 있나 보다.

그래도 설정 자체는 나쁘지는 않잖아?

헐크 같은 느낌이라서 좀 별로인가?

“형아. 시하 포주 주스 머글래.”

“이 밤에?”

“갠차나. 갠차나. 시하 다 먹고 치카치카 하면 대.”

“그래. 다 같이 주스나 먹자.”

포도 주스를 꺼내서 따랐다.

나는 평범한 컵에, 시하는 오크통 맥주잔에, 백동환은 휴대용 위스키병에.

“건배!”

쨍!

우리는 포도 주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이런 평범한 대화와 장난이 내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케 했다.

“형아랑 가치 머그니까 더 마시써!”

“응. 형아도.”

포도 주스가 더 맛있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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