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선생님은 프로그램 구성에 실수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영화 시청에 사랑의 촛불 타임이라니 너무도 정적이다.
사람은 밤에 감성적이게 된다.
그래서 준비한 알찬 프로그램인데 오히려 아이들의 체력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비축하게 해버렸다.
그래서 이 사태.
강인 어린이집 제1회 베개 싸움이 시작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로 그냥 놔두기로 했다.
너무 다치지 않는 선에서 즐기게 놔두면 체력을 빼앗는다.
그러면 애들이 알아서 곯아떨어질 것이다.
물론 선생님도 이제 지치는 것이 있어서 그렇다.
“시하야. 공격하자!”
승준이 선봉에 선다. 베개를 들고 그대로 종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종수도 가만히 당하지 않았다.
한쪽 팔을 들어 막고 반격했다.
퍽.
서로 난타전을 벌였다. 쉽사리 누가 이긴다고 할 수 없었다.
“승준. 도와주께!”
시하가 전쟁에 지원군으로 나섰다.
종수는 시하를 눈으로 견제하면서 승준을 공격했다.
“간다!”
시하는 엉금엉금 기어서 종수의 다리를 베개로 찔끔찔끔 찔렀다.
당연히 타격은 없었다.
솔직히 종수의 생각으로는 저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승준이 감탄하며 공격했다.
“역시 시하야. 하체를 공격하는구나!”
“???”
저게? 진짜 저게 대단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싸. 종수 너 에너지 많이 깎였어!”
“어? 이거 게임이었어?”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 진짜 쓰러뜨릴 수 없잖아. 너 많이 깎였다!”
“야! 갑자기 그런 설정을. 억!”
승준의 베개가 종수의 얼굴에 직격했다.
그래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호이호이. 호이호이.”
밑에 있는 시하는 도트 데미지를 주고 있었다.
흔히 게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짤짤이.
아주 치사하지만 에너지는 많이 깎는 공격이다.
“아하하. 종수 에너지 많이 깎였다. 이제 빨간색 에너지 됐어.”
“야, 너희 마음대로 정하지 마.”
“시하야. 좀 더 힘내자.”
시하는 ‘종수 많이 다쳐써!’라고 하며 계속 집요하게 다리만 노렸다.
그걸 지켜보던 재휘는 ‘으아! 종수 큰일났어.’ 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나도 도울게!”
아까 종수에게 베개를 맞은 하나가 참전했다.
재휘도 이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하나 앞을 베개로 가로막았다.
“악!”
하지만 하나의 베개는 안고 자는 고양이 베개.
길이가 길다. 린치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뾱뾱뾱.
창을 이용하는 장수처럼 고양이 머리로 찌르기 시작했다.
“으악!”
재휘는 오들오들 떠는 방패 병사처럼 베개를 들고 막고만 있었다.
그때 은우가 나섰다.
“재휘야 도와줄게! 받아라!”
활을 쏘는 병사처럼 빠르게 베개가 날아왔다.
하지만 그 화살은 하나에게 닿기 전에 떨어졌다.
“어?!”
“흠흠.”
바로 연주가 베개를 뒤이어 쏘아서 맞힌 것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화살로 맞추는 묘기.
그리고 베개는 하나 더 있었다.
“에잇!”
“푸하하. 맞는다!”
팟.
윤동이 한 손으로 베개를 잡았다.
마치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은 듯한 느낌이다.
정말 그냥 베개 싸움인데 그 양상은 전쟁터 못지않았다.
“푸하하. 한 손으로 잡았어.”
연주는 던지는 게 이제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되자 빠르게 베개를 주워서 재휘를 공격했다.
“앗. 연주야.”
“재휘야. 빨리 쓰러져.”
“너무해. 연주야.”
“어쩔 수 없어. 이건 게임이야.”
공과 사는 구별하는 연주는 냉혹했다.
퍽. 퍽. 퍽.
은우가 도와주러 다가갔다.
“간다!”
그렇게 서로 난타전이 이루어지고 끝나지 않는 승부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야! 나도 좀 도우라고! 재휘만 돕지 말고!”
그 와중에 종수만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이부자리가 엉망이 되고 아이들이 이제 지쳤을 때쯤.
포근한 밤이 찾아왔다.
다들 이불을 덮고 새근새근 잠을 잔다.
아까와 같은 폭풍은 이제 다 지나간 듯이 조용하다.
선생님도 그 모습을 보다가 대충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달빛은 커튼을 통해 희미하게 아이들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빛을 잃어갈 때쯤에 따뜻한 태양이 눈가를 두드렸다.
시하가 눈을 떴다.
“형아?”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형아는 없었다.
그제야 형아가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는 걸 생각해냈다.
일어나면 형아가 보여야 하는데 승준이 배를 긁는 것만 보였다.
하늘에는 태양이 떠 있었는데 시하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시하의 태양은 아직 여기 없었으니까.
“우웅.”
일어나서 페페 인형탈의 머리를 잡는다.
다행히 곁에는 페페가 있었다.
각진 구석에 거꾸로 두고 그 안에 쏙 들어가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눈을 감는다.
원래 형아의 머리가 들어가는 페페의 인형탈 속에서 다시 선잠에 빠진다.
“으응?”
선생님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이상한 장면이 보였다.
“푸흡.”
손으로 입을 막는다.
시야에는 시하가 구석에서 페페 인형탈에 쏙 들어가 벽에 기대어 잠을 자는 게 보였다.
대체 언제 저기 들어가서 자고 있었던 걸까?
분명 밤에 잘 때는 이불에 쏙 들어가 있었는데.
뭔가 혼자 보기 아까와 폰을 꺼내 사진을 딱 한 장만 찍는다.
여러 장 찍는 소리에 애들이 깰까 봐 딱 한 장만.
이걸 남겨두지 않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선생님은 시하를 안아 들고 이부자리에 놓아 이불을 덮었다.
페페의 얼굴은 시하의 배 위에 올렸다.
이러면 일어나도 외롭지 않겠지 싶어서.
‘장하다. 장해.’
여기 있는 아이들 모두가 장하다.
엄마, 아빠 없이 오늘 하룻밤을 잔 거니까.
비록 친구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것이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 주지는 않는다.
다만 친구들이 함께 있기에, 홀로서기에 도움이 된다.
언젠가 아이는 엄마, 아빠 품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고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될 것이다.
곁에 자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엄마, 엄마를 찾는 것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찾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친구랑 놀러 나갔다 올게! 이런 말을 자주 하겠지.
“커서도 쌤. 쌤. 찾아주면 좋겠다.”
아이들이 자신을 잊어버리거나 안 찾아올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꿈을 꿔 본다.
늘 보는 엄마랑 아빠, 형아를 찾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그 속에 선생님을 조금은 기억해 주라고.
너희와의 이런 추억을 나만 기억하는 건 너무 서글프지 않냐고.
여느 학교 선생님처럼 그냥 또 스쳐 지나가는 학생이 아니라 기억에 남는 학생, 스승의 날에 찾아오는 학생이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커튼을 걷었다.
“날씨 좋다.”
태양이 떠 있는 하늘은 너무나도 푸르렀다.
마치 선생님의 작은 바람인 꿈처럼.
***
계약이 끝나고 비행기 시간까지 좀 남았다.
어딜 돌아다닐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념품 가게 정도는 볼 시간이 되었다.
이왕 멀리 나갔는데 선물 정도는 사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싶다.
나를 따라온 박한수는 기념품 가게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다른 곳을 구경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럴 수 있나. 우리 에이스 가는 길을 잘 배웅해 줘야지.”
“근데 진짜 늦게 가도 돼요?”
“일요일이면 집에 도착은 할 거야.”
“월요일에 출근하면 피곤하실 것 같은데.”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집에 있는 게 더 피곤하지.”
“!!!”
혹시 그냥 집에 안 들어가고 싶은 거 아닐까?
가끔 이렇게 집을 떠나 일탈을 즐기시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결혼 생활이란 대체 무엇일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에이스!”
“그만 좀 해주세요.”
너무 부끄럽다. 사장님은 수치심이라는 게 없으신 건가?
이제 띄우다 못해 대한민국까지 들고 오신다.
여기 한국인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괜찮아. 여기 아무도 못 알아들어.”
“알아듣는 사람 있으면 전 바로 뛰어서 도망쳤을 겁니다.”
“역시! 치고 빠지는 걸 잘하네! 그때 계약 때도 캬아. 나 그런 무기가 있는지 처음 알았잖아.”
“그냥 지지부진하길래 확실히 꺼낼 수 있는 패를 꺼낸 것뿐이에요.”
“이번에 사업 따내면 확실히 빵빵하게 챙겨줄게.”
“제발 그래 주세요.”
“나 박한수!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남자가 아니다!”
“네. 알겠으니 제발 목소리 좀 낮춰요. 뭔가 싶어서 저기 점원이 쳐다보잖아요.”
“괜찮아. 여긴 우리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어.”
“그게 중요해요?!”
박한수 사장님은 아무래도 외국에 나와서 자유분방함을 느끼는 것 같다.
계약도 따내겠다. 이제 한국에서 무궁호의 체결류 지원을 할 수 있게 준비만 하면 된다.
사실상 이건 될 것 같기도 했다.
“전 시하가 좋아할 만한 걸 볼 거니까 사장님도 기념품 살 거 사시죠.”
“내가 사줄까?”
“괜찮아요. 사장님이 사면 무슨 선물이겠어요.”
“그럼 같이 보자고. 내가 이런 선물은 재주가 없어서.”
이런.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달라붙어서 곤란하다.
어쩔 수 없다. 그냥 쭉 둘러보면서 빨리 골라야지.
‘오!’
기념품을 보니 스웨덴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먼저 축구 유니폼.
이건 승준이 참 좋아할 것 같다.
시하랑 함께 잘 지내줬으니 선물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이거 픽.
“응? 시하가 축구 유니폼 좋아하나?”
“아뇨. 이건 시하 친구에게 줄 생각이에요. 이번 파자마 파티에서 시하랑 함께 하룻밤을 잘 보내줬을 거니까 감사의 표시로.”
“오. 친구들 선물도 챙겨?”
“그냥 이래저래 고마워서요.”
시하랑 잘 지내줘서 정말 고맙다.
승준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시하를 옆구리에 끼고 잘 지내주었다.
만약 승준이 없었다면 시하가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기간이 참 길었을 것이다.
‘시하랑 하나는 어떤 선물이 좋을까?’
바이킹 인물들의 피규어가 있고 뭔가 무서운 늙은 요정들 피규어도 있었다.
술잔들도 바이킹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와, 이거 좋다.”
“여기 맥주 마시면 진짜 좋겠는데?”
오크통 모양으로 되어 있는 맥주잔이 보였다.
해적 만화에서만 보던 나무 맥주잔.
앞에는 순록이나 스톡홀름의 건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좋을 것 같은데요?”
“나도 이거 하나 해야겠네. 집에서 맥주 따라 마시기 좋겠어.”
나는 시하가 뭔가 주스나 마실 때 좋을 것 같아서 사는 거다.
장난감으로 갖고 놀기도 좋을 것 같았다.
해적 놀이를 한다던가.
물론 시하가 그 놀이를 한 적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할지 모르니까.
이제 하나 선물만 남은 건가?
“근데 사장님은 아내분 선물 같은 건 없어요? 저기 순록 무드등도 괜찮아 보이는데.”
“으음. 쓸데없는 거 사 왔느냐고 할 거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해도 좋아하실 거예요.”
“흠흠. 그렇겠지? 어째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네?”
“잘 알긴요. 제가 뭘 알겠어요. 하하. 만나 뵌 적도 없는데.”
“아니야. 오랜만에 이런 무드등 선물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와인도 함께 사가시죠. 그러면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오! 그럴까? 무드등만 가져가면 뭔가 싫어할 것 같은데 와인이랑 같이 가져가면 괜찮지.”
박한수 사장님은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나 ‘오.’ 하면서 감탄을 뱉었다.
나도 손바닥보다 작은 배 모형을 하나 고르고, 하나의 선물로 스톡홀름의 정취가 느껴지는 마그넷을 하나 골랐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선명히 그려진다.
빨리 시하가 보고 싶다.
“이야. 다 샀다. 덕분에 좋은 기념품들 샀어. 아내가 좋아하겠다.”
“애들은요?”
“아, 애들? 걔들은 뭐 알아서 하겠지. 엽서 하나씩 던져주면 되겠지.”
“푸흡. 그래도 저런 작은 나무배 같은 거 좋아할지도 몰라요. 공부하는 책상에 올려두면 좋으니까.”
“아, 나도 그렇게 살까?”
의외로 선물에 관해서는 팔랑귀였다.
아마 애들이 학생이라서 이제 장난감 같은 걸 안 좋아하니 뭘 골라도 별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성인도 아닌데 술잔을 선물할 수도 없으니.
“잠깐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살게.”
“천천히 하세요. 저 아직 비행기 시간 남았어요.”
“오케이.”
나는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보니 맑은 날씨다.
거기 한국은 밤이겠지? 나는 태양을 보고 있는데 시하는 꿈나라에서 달을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달은 태양에 의해서 빛나고 있으니 어쩌면 내가 보는 빛이 시하에게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달빛이 어루만져 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