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2화 (322/500)

322화

VUMAX 사의 개발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거래에 참여했다.

특수 부품이 어디에 필요한지 알고 싶기도 했고 또 신생업체인 곳이 어떤 식의 자세로 나오는지 보고 싶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저 멀리서 날아오며 계약의 미팅을 하자는 일.

심지어 그냥 체결류도 아니고 특수 제작 체결류가 필요하며 한국의 독점 판매권을 달라는 업체.

굉장히 배포 있지 않고서야 저리 말할 수 없었다.

‘기대되는군.’

뭔가 엄청난 제안은 오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그들의 자신감을 보고 싶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과연 그래도 뭔가 하나는 있구나 싶었다.

그냥 무작정 가슴의 열정 하나로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이 친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언제나 사무적으로 대하는 냉철한 친구지만 그건 일할 때뿐이다.

같이 맥주나 한잔 들이키고 나면 그만큼 유쾌해진다.

아니, 좀 재밌어진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켜보고 있자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뭐? 거기서 거기?

개발자로서 엄청난 자부심을 품고 있다.

특허도 얻었고 이미 인공위성에 납품 경험도 있는 튼실한 회사다.

그래서 질렀다.

「근데 가만히 듣고 있는데 기술력이 다 고만고만하다는 소리는 납득을 못 하겠군.」

하지만 납득이 되어버렸다.

이 친구는 대체 뭐지? 통역사 역을 자처한 직원일 뿐 아닌가.

근데 어느 순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모국어를 구사해서 당황하게 하더니 그대로 말을 때려 박아서 어버버해 버렸다.

작은 틈.

그걸 집요하게 노리며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근데 마음속에 품고 있는 꿈에 방아쇠를 당긴 것 아닌가.

「원하신다면 독일 쪽과 바운더리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시 영어로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바꾼 말은 파급력이 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친구가 우리를 많이 조사해 왔구나.

분명 공개된 정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기서 무언가를 보고 집요하게 노리는구나.

이미 여유로운 위치에서 어느 정도 안일했다는 마음을 인정해야 했다.

저 앞의 친구들은 이미 열정뿐만 아니라 거기에 준하는 무기를 가지고 왔다고.

「아직도 저희를 재보실 겁니까?」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들은 신생업체가 아니라 거의 대등한 관계로서 우리의 위치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이리 젊은 친구가 준비한 수라는 말인가.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젊은데?

「잠시 얘기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

잠시 나와서 이야기를 나눴다.

「어때? 나는 상당히 괜찮은 거래라고 보는데.」

「나도 그래. 근데 좀 놀랍네. 처음 봤을 때부터 예사롭지는 않았어.」

「어? 그래? 나는 그냥 경험 쌓으려고 같이 온 줄 알았는데. 통역사라는 말에 고개를 그렇구나 싶었고.」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인사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거 보통 놈이 아니다 싶었지.」

개발자는 처음에 했던 인사를 더듬어봤다.

뭐라고 했더라? 그래!

[고생은요. 앞으로의 좋은 인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수고도 아니죠.]

이 친구는 여기서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래서 쉽지 않게 말이 오갔구나 싶었다.

개발자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통역사보다는 오히려 로비스트 같군.」

「동감이야.」

두 사람은 계약을 체결할 전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 체결할 세부조항들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

한편 어린이집은 파자마 파티를 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다들 오늘 함께할 소중한 물건들을 자랑했다.

승준이 시하에게 축구공 모양의 쿠션을 보여주었다.

“시하야. 이거랑 같이 자면 사커꿈 꾼다~ 신기하지?”

“정말?”

“응. 사커 하면서 다 제치고 골대에 골 넣는 거야.”

시하가 신기하다는 듯이 베개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마치 자동차 핸들을 쥐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그걸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승준이가 사커 생각만 가득해서 꿈도 그런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근데 시하는 저게 뭐야?”

“아?”

시하의 가방과 함께 덩그러니 있는 큰 물체.

시하는 그걸 들고 그대로 머리 위에 썼다.

굉장히 커서 그런지 몸의 반이 다 들어갔다.

“형아페페야.”

“헐! 페페네!”

시혁이에게 선물 받은 페페 인형탈의 머리 부분을 들고 왔다.

오늘 형아 대신으로 간택을 받은 것이다.

시혁이 너무 큰 걸 들고 가서 상당히 곤란해했지만, 시하는 만족했다.

선생님도 저걸 처음 보며 깜짝 놀랐다.

대가리만 둥둥 들고 있었으니까.

“시하야. 나도 들어가도 돼?”

“대!”

승준이 고개를 숙여서 인형탈 얼굴로 쏙 들어갔다.

그렇게 페페 얼굴 하나와 그 밑에 달린 네 개의 다리는 기괴한 모습을 연출했다.

“으하하. 여기 눈으로 보이네!”

“보여!”

각자 페페 눈 하나씩 밖을 들여다본다.

“앞으로 출발!”

서로 안 넘어지게 앞으로 조심조심 출발하다가 결국 뒤엉켜서 쓰러졌다.

페페 얼굴은 데굴데굴 굴러서 앞으로 나아갔다.

톡.

하나의 다리에 맞으며 인형탈 얼굴이 멈췄다.

“페페다!”

“진짜 페페네?”

하나와 연주가 페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시하에게 전달해 주었다.

“고마어~!”

“응.”

“하나는 모 가지고 와써?”

“하나는 고양이 가지고 와써. 여기 고양이.”

하나가 안고 자는 베개를 보여주었다.

고양이가 두 발등을 보여주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다.

시하는 안고 자는 베개를 보며 눈을 빛냈다.

“기여어.”

“진짜 귀엽지? 하나가 좋아하는 베개야.”

승준이 끼어든다.

“하나야. 사커 베개가 더 귀엽지 않아?”

“아니거든! 그거 하나도 안 기여워.”

승준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두 손을 엑스 자로 교차해 고개를 저었다.

시하는 연주를 보았다.

너는 뭐 가지고 왔어? 하고 묻는 시선이었다.

연주도 알아들었는지 주섬주섬 가방에서 꺼냈다.

“아빠가 가지고 놀라면서 카드 줬어.”

연주의 손에 나온 건 트럼프 카드였다.

선생님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고 연주 아버님. 아이한테 트럼프 카드 주시면 어떡합니까. 이게 바로 미국인의 자유분방함인가요?

파자마 파티라고 해서 아마 저런 카드를 줬나 보다.

이건 뭐 초중고 수학여행도 아니고 말이야.

트럼프 카드 들고 오는 건 국룰이기는 하지!

쓸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카드 모야?”

“와. 카드다! 마술 카드!”

“연주 마술할 수 이써?”

뭐, 아이들에게는 포커나 훌라보다 마술 카드로 알고 있나 보다.

종수가 그걸 보며 검지를 흔들었다.

“쯧쯧. 그건 마술 카드 아니거든. 우리가 마술하며 갖고 놀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 뭔데?”

“그거는 말이지.”

설마 종수가 포커나 훌라를 알고 있는 걸까?

지식이 많은 종수이니 알지도 몰랐다.

“도둑 잡기랑 원카드를 하는 거야! 나는 해봐서 알아!”

“도둑 잡기랑 원카드?”

선생님이 미안해.

아무리 그래도 종수가 그런 게임을 알 리가 없지.

그래도 도둑잡기나 원카드라는 놀이를 아는 거 보니 부모님이 가르쳐주셨나 보다.

“응. 아빠가 가르쳐줬어. 근데 엄마가 아빠 등을 때리던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거야 그렇지.

애 앞에서 카드 들고 게임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래도 포커를 안 가르친 게 어디야.

“종수야. 도둑잡기 모야?”

“하하하! 다들 잘 모르는구나!”

종수의 어깨가 올라갔다.

이른바 종수 타임이 시작되어서 굉장히 신이 난 얼굴이다.

“손에 쥔 카드 중에 같은 숫자를 내는 거야. 없으면 순서대로 다른 사람의 카드를 뽑아서 내지. 근데 조커라는 카드가 있거든. 마지막에 그걸 가지고 있으면 도둑이야.”

“초코? 초코 도둑이야?”

“초코가 아니라 조커! 조커라고!”

“초코 도둑 나빠. 혼자 마시써 하면서 머거. 가치 머거야지.”

“그러니까 초코 도둑이 아니라고!”

종수가 정정해 줬지만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시하였다.

연주가 카드에서 조커를 보여주었다.

“이 애 이름이 조커야.”

“도둑이야?”

“응? 그건 모르겠는데?”

시하가 종수를 쳐다보았다.

“그래. 도둑이다. 도둑. 야. 이시하. 카드게임으로 붙어보자.”

그렇게 어쩌다 보니 다들 둥글게 앉아서 카드게임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딜러와 심판 역을 맡았다.

“자, 그럼 선생님이 카드 섞는 걸 보여줄게.”

오랜만에 현란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촥촥촥!

두 개로 나눠서 둥글게 섞기.

촤라락.

아이들은 그런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샘. 신기해!”

“후후후. 다시 한번?”

촤라라라락.

카드가 아치 모양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원장님이 그걸 보다가 유다희 선생님을 등을 때린다.

찰싹.

“아야!”

“좋은 거 보여줍니다.”

“하하핳. 오랜만에 신났네요. 그래도 이거는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인싸…….”

“빨리 도둑잡기 진행해요.”

“넵!”

유다희 선생님이 똥폼을 잡으며 카드를 손목을 이용해 아들이게 나눠준다.

촥촥촥.

바닥을 쓸면서 아이들 쪽으로 날아간다.

“샘 대다내!”

“후후후.”

정말 별거 아니지만, 선생님은 만족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누려보는 허세 있는 역할이다.

아이들의 손 패는 아주 적다.

8명이니 각 6장씩 돌아가고 5명에게 1장씩 더 돌아간다.

“자. 똑같은 숫자랑 모양의 개수가 같으면 내는 거예요. 마지막에 조커가 있으면 그 사람은 도둑이고요.”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바라보았다.

몇몇이 같은 숫자를 내며 손에 있는 패가 줄어들었다.

“원래라면 둥글게 돌아가는 게 맞지만 여기서 룰을 변경해서 뽑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는 거로 하겠어요. 그럼 먼저 종수부터 할까?”

종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들이 의외로 포커페이스를 잘 지키는지 누가 조커를 가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재휘를 선택했다. 카드를 뽑고 같은 카드를 냈다.

재휘는 연주를 선택했다.

그렇게 점점 진행되었다.

지목은 뭔가 눈치게임 같아서 한 사람만 선택하면 게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남은 사람은 시하, 승준, 종수, 은우가 되었다.

“푸하하. 내가 승준이 꺼 뽑아야지.”

“은우야. 내 꺼 뽑아줘야지.”

“아, 종수 말고 승준이 꺼.”

그렇게 진행되다 보니 어느새 종수와 시하만 남았다.

둘 중 조커를 가지고 있는 건 시하였다.

“야, 이시하야. 네가 조커를 들고 있구나?”

“아냐.”

“뭐가 아니야! 우리 둘만 남았는데!”

시하는 두 장. 종수는 한 장.

누가 봐도 시하가 들고 있는 양상이었다.

“아냐. 시하 업써. 왜 없지?”

“뻔뻔하네. 이시하. 여기 다들 네가 가지고 있는 거 알거든?”

“종수 대다내! 어케 알았어? 대다내!”

“아니. 대단할 게 없잖아. 누가 봐도 너라니까. 당연한 거거든!”

“아냐. 이거 아라서 대다내.”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당연한 사실을 대단하다고 하니 종수는 뭔가 놀림당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시하는 그런 뜻으로 전달한 게 아니지만.

“흐음. 이거 할까?”

종수는 신중하게 오른쪽 카드에 손이 갔다.

“종수 정말 이거 하꺼야? 정말?”

“어? 후우. 이시하. 나 속이려고 그러는 거지?”

“그거 하면 안 조아. 진따야.”

“진짜겠지! 발음 조심하라고!”

“시하가 걱정대서 그래. 그거 하면 도둑대. 도둑. 진따야.”

“야!”

종수는 오히려 시하가 속이는 거라고 확신했다.

카드를 슬슬 뒤로 빼며 말하는 모습이 다급해 보였으니까.

선택에는 망설임이 없다.

휘익.

“아악! 조커잖아!”

종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심리전인 줄 알았는데 진짜 사실대로 말한 거였다.

시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이는 거라고 착각해서 뽑아버렸다.

왜 그랬을까. 자꾸 찐따라고 말하길래 거기에 말려버렸다.

물론 시하는 실제로 찐따라고 안 하고 진따라고 발음했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거기서 거기였다.

시하가 볼을 긁었다.

“시하가 진따라고 해찌!”

“야!”

속 터지는 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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