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아무리 생각해도 시하를 데리고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전과 상황이 달랐다.
일단 비즈니스 건으로 빡빡한 일정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것이다.
알아보니 대략 왕복 24시간에서 28시간이 걸린다.
하루가 통째로 사라지는데 시하가 심심할 뿐만 아니라 힘들다.
그리고 비행기 가격. 나야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면 되지만 시하는 따로 낸다고 했을 때 항공사마다 다르지만 평균 100만 원쯤 든다.
아무리 그래도 여행도 아닌데 비행깃값 100만 원을 덜컥덜컥 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오늘 시하를 설득해야 한다.
“시하야. 형아가 일 때문에 잠깐 외국에 가거든. 비행기 타고 말이야.”
“아? 시하는?”
“시하는 못 데리고 갈 거 같은데?”
“아냐. 형아랑 가치. 형아랑 가치 가.”
“비행기에서 하룻밤 자야 해서 엄청 힘들어. 몸이 너무 힘들 거야. 심심하기도 하고.”
“시하는 형아랑 이쓰면 안 심심해. 재미써!”
“크흑.”
그런 멘트를 날리다니. 좋아. 시하의 비행기 표를 알아볼까?!
아니지. 내가 설득당하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비행기 표가 너무 비싸서 같이 가는 건 조금 곤란해. 형아가 많이 놀아줄 수도 없어요.”
“갠차나. 갠차나. 시하는 형아랑 조금만 이쓰면 대. 시하가 아라서 노라.”
“크흑.”
논리적으로 완벽하다.
너무 견고해서 뚫을 수 없었다. 가히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구리고 시하는 돈 마나. 시하가 비행기 돈 내께. 비행기 아찌. 얼마에여. 시하가 돈 주께여. 하께.”
“크흡.”
실제로 시하의 통장에는 돈이 많기 때문에 비행깃값을 얼마든지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쓰고 싶지 않다.
내가 시하를 키우면서 어린이집 어머니도 만나고 승준 아빠도 만났는데 다들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있었다.
일단 기본적인 보험, 그리고 주식 통장 같은 걸 만들어 조금씩 넣어주고 있으셨다.
뭔가를 물려주는 게 있다.
나야 주식은 하나도 모르고 이리저리 생활비로 쓰고 보험도 넣고 있어서 빠듯한 생활이다.
근데 여기서 시하의 돈까지 쓰고 싶지 않다.
물론 벌어둔 돈은 많다.
꽤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1년을 봤을 때의 얘기지 펑펑 물 쓰듯이 돈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으음. 승준이랑 하룻밤 자고 있으면 형아가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안 돼?”
“안 대. 시하는 형아랑 이써야 해. 형아한테 시하 업쓰면 큰일 나!”
내가 큰일 나는 게 아니라 네가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사실 나도 떨어지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좀 그랬다.
가면 시하를 돌봐줄 사람도 없지 않은가.
나는 가만히 앉아서 시하의 눈을 마주쳤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가 미안해. 진짜 금방 돌아올 테니까. 늦어도 두 밤은 자고 나면 볼 수 있으니까.”
“우웅.”
시하가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전처럼 백동환이 같이 갔으면 놀러 가는 형태로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백동환도 일이 있는데 14시간을 비행기 타며 오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통화도 자주자주 할게. 영상 통화로!”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 있는 동안은 통화할 수 없었다.
참으로 안 되는 게 많네.
“형아. 빨리 오꺼야?”
“응. 진짜 빨리 올게.”
“달님이랑 두 밤 자면 와?”
“응. 달님이랑 두 밤 자면 형아가 와.”
“다움에눈?”
“응?”
“다움에 시하 또 나두고 가꺼야?”
“아니. 다음에는 시하 꼭 데리고 갈게.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그래.”
관광할 시간도 여의치 않을 게 분명하니.
그리고 이번 거래가 끝나면 비행기 타고 외국 갈 일도 없을 것이다.
시하는 두 눈 꼭 감았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가따오면 시하 말 잘 드러야 해.”
“푸핫. 알았어. 형아가 시하 말 잘 들을게.”
“시하랑 마니 노라져야 해.”
“응응. 시하랑 많이 놀게.”
“안 자고 서이 밤 놀아야 해.”
“안 자고 밤새 놀게.”
나는 시하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얼마나 많이 양보하였는지 안다. 나도 사정이 있지만 그건 4살 아이에게 중요치 않았다.
나밖에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시하가 피피랑 일피, 이피, 삼피, 사피, 티김이 밥 잘 주고 이쓸께.”
“응. 응. 아, 얘들 밥은 백동 형아가 줄 거야.”
“아?”
“벌써 말 다 해놨어.”
“백동 형아랑 시하랑 잠자?”
“응? 형아는 일단 승준 엄마에게 말해서 승준이랑 하나랑 같이 자게 할 건데?”
“아냐. 시하 백동 형아랑 잘래.”
“으응? 일, 일단 물어볼게.”
친구랑 같이 밤을 보내면 외롭지 않을까 했는데 백동환이 더 마음에 편한가 보다.
“그럼 백동 형아랑 두 밤 자는 거야?”
“아냐.”
“으응?”
이건 또 무슨 소릴까?
“한 밤 승준이랑 하나랑. 한 밤 백동 형아.”
아…. 천잰데?
정해지자마자 바로 계획을 세우는 이시하였다.
***
부모 둘이서 애를 키우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스레 느낀다.
그리고 뭔가 사정이 있을 때 친정에 맡길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나는 그게 조금 부럽다.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러운 것 같다.
백동환에게 부탁하는 건 어렵다.
아무리 친하다고 하지만 이런 부탁은 많이 어렵다.
가족도 아니고, 친척도 아닌데.
알고 지낸 지 1년이 넘었을 뿐인데.
그 사람의 호의에 기대는 것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지.
나는 언제나 홀로 해결에 왔기에 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건지도 몰랐다.
남이 나에게 기대야 안심이 되는 사람.
내가 남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숨기는 사람.
이상하게 꼬여있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나란 사람은.
“그래서 부탁 좀 해도 될까?”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어린이집에 데려와서 하룻밤 자면 되는 거죠?”
“응. 최대한 빨리 올 건데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당연히 그렇겠죠. 일단 가는 시간만 그렇게 되는데. 경유하면 어쩔 수 없죠.”
“잘하면 너한테 안 맡기고 올 수도 있어. 일단 가보고 상황을 봐야 아는 거지만.”
“어휴. 경유로 14시간 걸리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시죠. 두 밤 자는 것도 빡빡하긴 합니다.”
“으음. 걱정돼서.”
“아니요. 오히려 잘된 거 아닙니까.”
“어?”
“서로 하룻밤 정도 떨어져 있는 건 훈련돼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자주 그러면 안 되지만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우리 편한 생각 아닐까?”
백동환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부모에게. 아니지 형에게 의존하는 것도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의존할 나이잖아?”
“너무 과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는 말이죠. 뭐. 사실 교육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아니야.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아무튼, 부탁할게.”
“예. 맡겨 주세요. 그래도 시하는 어린이집도 잘 다니니까 문제없을 겁니다. 안 가려고 하는 아이도 많으니까요.”
“음. 그렇지?”
의존성이 너무 강하지는 않은 거지?
아무튼, 무슨 외국 한 번 가는데 너무 준비해야 할 게 많다.
아직도 말할 사람이 있다.
승준 엄마에게는 미리 말해 놓았고 이제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말하면 되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시하를 챙기고 어린이집을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여!”
“네. 안녕하세요. 시하도 안녕!”
나는 선생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데리고 올 때 승준 엄마가 한 번 올 거고 그다음 날에는 백동환이 올 거라고.
그 말을 선생님과 원장님이 듣더니.
“시혁 씨. 그럼 이런 건 어떨까요?”
“어떤 거요?”
“마침 저희가 부모님에게 떨어져서 다 같이 하룻밤 자는 걸 해보려고요.”
“아…….”
“애들 독립성도 길러줄 수 있고요. 물론 명칭은 파자마 파티예요!”
“파자마 파티…….”
이 어찌 훌륭한 교육이란 말인가.
시하가 외롭지 않게 달님이랑 한 밤 대신 친구들이랑 한 밤 보내는 거다.
승준이랑 하나 집에서 자는 거랑 다른 이야기다.
거기보다 여기 어린이집이 더 편하게 잠 잘 수 있을 것 같다.
왜냐면 여기서 낮잠도 잘도 자니까.
“정말 좋은데요?”
“그러니 파자마를 준비해 주세요. 좋아하는 장난감도 들고 오고요.”
“아하. 정말 좋네요.”
이러면 계획이 바뀐다.
다 같이 어린이집에서 자고 다음 날에 백동환이 시하를 데리고 오면 될 것 같다.
정말 운이 좋아서 내 일이 빨리 끝나면 시하가 굳이 두 밤을 자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형아. 모해?”
“응? 아, 시하야. 승준이랑 하나랑 자는 대신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다 같이 파자마 파티하면서 잔다던데?”
“파자마 파티 모야?”
“응? 아, 잠옷 입고 파티를 하는 거야.”
“정말?!”
시하가 눈을 반짝였다.
뒤에서 듣고 있던 쌍둥이도 만세를 외친다.
너희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자는데 괜찮겠어?
아마 파티라는 말에 그런 생각도 없을 게 분명했다.
시하도 좋아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시하를 데리고 가는 길.
나는 파자마 파티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시하는 이런 경험을 해봐서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하야. 잠옷 새로 살까?”
“아?”
그냥 편한 반바지와 반팔티면 되지 않나 싶은데 그래도 명색이 파자마 파티인데 갖출 건 갖춰야 하지 않나 싶다.
“파자마 파티니까 파자마를 입어야지.”
“페페 옷 입으까?”
“그거 이제 작아서 못 입잖아.”
“아냐. 시하 구겨지면 대.”
“그렇게까지 입고 싶다고?!”
어릴 때 입던 페페 잠옷은 이제 떠나보내 줘야 할 때이다.
물론 시하가 반대해서 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걸 입는 건 아니지.
아마 페페 잠옷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죽, 죽여줘…….
“하나 사자.”
“형아는?”
“응?”
“형아랑 가튼 거. 시하는 형아랑 가튼 파자마.”
“어? 그럼 나도 하나 사는 거로.”
시하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세투야. 세투! 라며 말하기도 했다.
아, 나는 파자마 필요 없는데! 괜히 또 돈 쓰겠네!
이제 자린고비 정신이 머리에 남아서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이 파자마를 사면 한 5년을 입을 거다!
어라? 파자마의 목소리가 미리 들리는데?
죽, 죽여줘…….
웬 환청이 들리는지 모르겠다.
“그럼 집으로 가지 말고 파랑몰로 가자. 아직 퇴근 안 했을 거야.”
“리사 누나!”
“응. 리사 누나 회사지.”
파랑몰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들어갔는데 다들 마무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 시혁 씨! 오랜만이네요. 시하도 하이.”
“리사 누나. 하이!”
“근데 어쩐 일이세요?”
“아, 시하가 어린이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거든요. 그래서 혹시 파자마도 파는가 싶어서.”
“잘 왔어요. 이제 여름이니까 시원한 파자마를 팔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그래서 지금 팔고 있어요.”
“오!”
“디자인도 간단해서 만들기 좋았죠.”
“어떤 디자인이 있는데요?”
“이런 거 어때요?”
“???”
여아용 파자마를 나한테 보여 주네.
프릴이 달린 원피스 파자마.
물론 시하는 귀여워서 저거 입어도 소화를 하겠지만.
아, 잠깐만?! 어른용도 있는데?!
“이거? 여아 건데요?”
“아, 잘못 꺼냈다.”
“진짜 잘못 꺼낸 거 맞죠?! 누가 봐도 원피스인데?”
“농담이에요. 농담.”
옆에서 시하가 형아도 가치?! 라고 말해서 식은땀이 흘렀다.
넌 형아랑 똑같은 거면 어떤 디자인이든 상관없는 거냐!
페페 아니면 관심도 없지?
“짜잔. 바닐라 아이스크림 파자마.”
“오. 귀엽다.”
“형아랑 가튼 거?!”
시하야. 디자인을 보자. 어른용도 들고 있기는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시하야. 디자인 어때? 괜찮아?”
“형아랑 가튼 거면 갠차나!”
“…….”
내가 알아서 고르면 된다는 거지?
근데 나도 입기에는 너무 귀염귀염한 느낌이 들지 않나? 뭔가 상큼하고 달콤한 느낌인데.
그래도 예쁘긴 예쁘다.
면적 넓은 종이컵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둥글게 해처럼 튀어나와 있다.
“그럼 이걸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알리사는 알아서 사이즈를 골라서 내게 넘겼다.
뭔가 으음. 우리 몸 치수에 대해서 잘 알지 않나?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아이스쿠림 먹고 시퍼.”
잠옷을 보니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가 보다.
알리사가 말했다.
“아, 그럼 이 밑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데 저녁 먹고 같이 가실래요?”
“그럴까요?”
알리사가 대충 정리한다고 말해서 잠깐 기다린 후에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약간 매콤한 카레를 선택.
먹고 나니 더 달콤한 음식을 입에 넣고 싶어졌다.
그리고 대망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했다.
알리사가 먼저 주문을 했다.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하나 주세요. 시하는 뭐 먹을래?”
시하가 알리사를 휙 보다가 점원을 다시 쳐다보았다.
“시하는! 닐라닐라 바닐라 주세여!”
아주 자신만만한 주문에 점원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하야. 그런 식으로 주문하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