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처음 출근할 때 느낀 건 황량한 사무실이라는 것.
물론 사람이 없으니 클 필요는 없다.
별거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신생업체에 이것저것 기대하는 것도 사치스럽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한 것은 앞으로 사장님이 어떻게 꾸려가느냐이다.
먼저 프로젝트.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첫날에 말이 없었는데 무언가 가르치고 싶었는지 자기가 딴 계약서를 들고 오신다.
“영어를 좀 해도 말이야. 전문용어나 이런 걸 모를 수가 있거든. 이건 제품 데이트 시트야.”
“아. 이런 거.”
어떤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지 또는 압력은 얼마나 견디는지에 대한 성능.
제품 이름은 영어와 숫자들의 조합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RC-3000-15.
이런 식으로 말이다.
다른 것도 영문과 숫자의 조합이었다.
“대충 다 쉽게 해석이 되네요. 이걸 파는 거죠?”
“응. 아무래도 거래처를 뚫으려면 이걸로 시작하는 거지. 지금은 일이 없어. 사무실도 사실 필요가 없지.”
“한가하네요.”
“아니. 발로 뛸 타이밍이지. 적어도 우리는 여기 이 재료라는 무기가 있잖아.”
“항공우주산업은요?”
“그건 이미 도전을 시작했어. 사실 도박 같은 수이기는 하지만.”
“흐음.”
“그쪽이 궁금한가 본데 일단 이 일부터 배워. 회의는 음. 그래! 내일 아침에 하자. 요즘 아니? 회의는 오전에 하고 업무는 오후에 처리한다는 거? 물론 급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회의실에 모일 테지만. 우리는 일이 없으니 그런 거 없지.”
“아, 그러네요.”
“거기서 분명 정신없이 바빠질 거라고 띄워줘야지!”
박한수 사장은 나를 데리고 이리저리 끌고 갔다.
참으로 텐션이 높은 사람이다.
회사 일을 오래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달랐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가면이라고까지 느껴지지 않지만 억지로 긍정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행동이 보인다.
진짜 그러냐고 물어보면 곤란하다.
그냥 그렇게 보이고 느껴진다. 나는 남들보다 살짝 남의 안색을 잘 살피며 살아왔으니까.
“사장님은 잘되실 거예요.”
“응?”
“낙천적인 사람이 잘된대요.”
“그건 너무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 아니야?”
“그건 아니고. 으음. 아! 현실적 이상주의라고 할까요?”
“오호.”
“실패하면 어떻게 될 걸 명확히 알지만 그래도 성공을 꿈꾸며 가는 거니까. 명확히 각오하고 실패하지 않게 꼼꼼히 쌓아가는 건 확실히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는 거죠.”
“크흠. 그런가?”
“네. 행동도 그렇게 하려고 하시잖아요. 아니에요?”
박한수는 나를 의외라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이런 표정이었다.
“얼굴에 너무 드러내면 사기당하실 거 같은데요.”
“하하하. 걱정 마라. 나 박한수! 바퀴벌레도 질려 하는 끈질김이니까.”
“근데 사표 내셨던데요?”
“바퀴벌레 정도는 아니지만 꿀벌 정도로 끈질김을 갖고 있다.”
곧바로 정정하시는 게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아부도 무척 잘할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예상은 적중한 것 같다.
거래처에 갔는데 인사를 크게 하신다.
어떤 사람은 또 왔냐면서 헛웃음을 내뱉는다.
아무래도 한두 번 방문한 것 같았다.
분명 거절했을 텐데도 이렇게 자주 방문하는 건 민폐가 아닐까?
하지만 박한수 사장님은 개의치 않았다.
이래저래 안부도 묻고 전에 그건 어떻게 됐냐며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 건 확실히 대단해 보였다.
“사실 전에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응?”
“이거 저도 회사에 있을 때 미팅하고 해봤단 말이죠. 근데 여기 제품보다…….”
가끔 별거 아닐 수 있는 팁들을 슬쩍슬쩍 알려주신다.
길게 있지는 않았다.
거래처도 일해야 하니까. 딱 커피 한 잔 마실 시간.
임무를 마친 듯 거침없이 나왔다.
나는 구경만 할 뿐 입 한 번 뻥긋하지 않았다.
“뭔가 말에서 노하우가 느껴지던데요? 근데 이것만 받아먹을 수 있잖아요.”
“그래도 상관없어. 물고기 잡을 때 떡밥을 많이 뿌리면 먹으러 달려오잖아. 뭐라도 잡아야지. 그리고 올 때마다 가르쳐주는 게 아니야. 텀을 두고 몇 번 가서 날 좋게 본다 싶으면 던져보는 거지.”
“와. 그걸 생각하며 가는 거예요?”
“쉿. 잠시만.”
박 사장이 펜과 수첩을 꺼내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보니 오늘 대화를 나눴던 걸 기록하고 있었다.
사소한 것들. 정말 별거 아닌 사적인 일들.
그냥 이야기하다 보면 툭 던져진 것들.
그리고 오늘은 뭘 이야기했던 것까지 간략하게.
앞의 페이지를 보니까 오늘 툭툭 던질 수 있었던 건 전에 왔을 때 이러한 기록 때문인 것 같았다.
박 사장이 다 적었는지 수첩을 닫고 이렇게 말했다.
“별거 아닌 걸 기억해 주면 좋아하는 건 여자 친구만은 아니지.”
“기뻐하나요?”
“아니. 의식적으로 이 사람이 이걸 기억해? 는 못하지. 하는 사람도 있지만. 둘 다 좋아. 소소한 감동으로 가슴에 툭툭 남거든.”
프로젝트에 끌려서 왔는데 박한수 사장님의 일면을 본 것 같았다.
회사에서 영업을 어떻게 했는지 그 노하우를 말이다.
“꼭 봐라. 나중에 연락 온다. 술 마시고 형, 아우 하는 것만 영업이 아니거든.”
“헤에. 그렇긴 하죠.”
“아, 너도 대기업 쪽에 일하긴 했었지. 계약도 따냈다며?”
“뭐, 어쩌다 보니까요.”
“협상도 기술인데 대단하네.”
그렇게 2주 정도가 흘렀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은지 그 어떤 곳에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박 사장님은 힘든 기색 없이 씩씩하게 하려고 한다.
그 기다림 사이에 많이 배웠고, 외국 회사와 연락하는 업무도 조금 해봤다.
하지만 박 사장님이 조금 안타까워 뭔가를 말해야 하나 싶었다.
커피를 자주 마시니 홍차를 사서 사무실에 두었다.
하나를 타서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홍차예요. 먹어보니 맛있어서 사무실에 뒀어요.”
“아니. 이걸 왜 네 돈으로 사. 그냥 회삿돈으로 사도 되는데.”
“그러면 선물이 아니잖아요? 생색은 조금 내야죠.”
“아, 그건 맞다. 나한테 잘 배웠네! 근데 너무 직접적으로 말하는 거 아니야?”
“요즘 사람들은 돌려 말하는 거 모른다던데요?”
“푸핫. 그래그래. 티를 내야지. 잘하는 모습도 티를 내고 선물하는 것도 티를 내고. 그게 맞지. 회사 생활 잘한다?”
“잘 보여도 월급은 그대로인데요?”
“야.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 빵빵해질 거다.”
살며시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가 없어진다.
나도 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말이다.
그저 확인해본 것이다. 지금 기분은 어떤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사장님.”
“응?”
“통역은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에요.”
“그렇지?”
“왜 그런지 모르죠?”
“외교를 잘하게 해줘서?”
“그것도 맞아요. 근데 또 다른 게 있어요.”
“뭔데?”
“때로는 역사의 목격자가 된다는 것.”
“!!!”
“저는 지금 통역사로 여기에 와있죠.”
그러니 여기서 아마 제가 역사의 목격자가 되지 않을까요?
이건 내가 건네는 위로의 말이었다.
박한수 사장은 씨익 웃었다.
“요즘 사람들은 돌려 말하는 거 못 한다며?”
“사람마다 다르죠. 뭐.”
그때 전화가 왔다. 계약하자는 전화가.
어쩌면 역사에 글자도 새겨지지 않을 작은 걸음이 될 시작이 다가왔다.
***
시혁이 2주간 일을 하는 동안 시하도 그사이에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바로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줄 선물이었다.
“시하야. 이날이 스승의 날이거든. 스승의 날 알지?”
“시하 아라. 샘 날이야. 샘 날.”
“응. 선생님의 날이지. 선생님에게 열심히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는 날이지.”
“시하 아라. 어릴 때 해써.”
“작년에 한 거 말하는 거지?”
작년의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주고 끝이 났다.
스승의 날 노래도 불렀다.
딱히 선생님이 챙기지는 않지만,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학교 앞에도 꼭 카네이션을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시하 선물 주까? 레드형아페페 말고 페페로?”
“그거 10만 원 정도에 팔았으니까 김영란법에 걸리지 않을까?”
“아? 개란밥?”
“계란밥이 아니라 김영란법. 으음. 아! 시하가 그림 그려주는 건 어떨까? 형아 생일 때 텀블러에 그림 꽂아줬잖아.”
“시하 그림 잘 그려.”
“그럼 텀블러 살까?”
“아냐. 그거 형아 꺼야. 똑가치는 안 대~”
시하는 시혁이만의 고유한 선물을 주고 싶은 거라 침범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시혁은 감동 어린 표정이 되었다.
“크으. 시하야. 역시. 그럼 편지 쓸까? 선생님에게 시하가 고맙다고 편지 쓰는 거야.”
“편지?”
“응. 시하가 한글도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쓸 수 있을 거야. 모르면 형아가 도와줄게.”
“시하 할 수 이써.”
시혁은 사실 시하가 할 수 없을 걸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스티커 학습지를 했다고 해도 연필을 쥐고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초성인 ‘ㅇㅅㅎ’는 완벽하게 적고 나머지는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적어도 자기 이름은 확실히 쓸 줄 알았으면 싶었다.
“그럼 편지를 써볼까? 그림 편지도 괜찮아. 먼저 ‘선생님께’라고 쓰자. 쓸 줄 알아?”
“시하 아라.”
시하가 편지지 위로 펜을 잡고 쓰기 시작했다.
“우웅. 이케. 이케.”
[ㅅ니깨]
초성은 완벽했다.
시하는 이걸 가리키며 샘님께, 라고 했다.
“잘했어. 조금 틀렸지만 거의 다 적었네!”
시혁은 시하의 손을 잡고 글자를 고쳐주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옆에 해석을 달았다.
[ㅅㄴ깨]-선생님께.
그런 다음에 시하가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했다.
“생일 추카해여.”
“아니, 아니. 스승의 날은 생일이 아니지.”
“샘의 날 추카해여.”
시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선생님의 날을 축하해 주고 싶은 가 보다. 어라? 원래 축하하는 날이었나?
‘ㅊㅋㅊㅋ’라고 썼다.
어디서 이런 초성을 배웠지?
“또. 또. 우웅. 이거 저글래. 매일매일 노라져서 고마어여.”
“응. 응.”
[매미매미 노라 고구마]
아무래도 스티커에 있는 단어들을 기억해서 삐뚤삐뚤하게 적었나 보다.
근데 아는 것만 적어서 말하는 의미는 전해지지 않을 것 같다.
옆에 무조건 주석을 달 수밖에 없다.
근데 배웠던 건 은근 기억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혹시 그림으로 기억하는 건 아닐까 싶다.
“형아. 시하 그림도 그릴래.”
“응. 선생님이 엄청 좋아하시겠다.”
간단히 적은 말 밑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트. 하트. 하트.
겹겹이 쌓이는 하트가 꽃잎처럼 활짝 핀다.
그 아래에 꽃다발처럼 포장되고 큰 리본이 그려진다.
“카네이션이야. 카네이션.”
“그래?”
꽃잎이 하트라는 점에서 참으로 기발한 생각인 것 같다.
편지 내용보다 이 그림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끝?”
“아냐. 언장샘 편지도 써야 해.”
“아, 그랬지.”
시하가 또 편지를 쓴다.
아까와 같은 내용이었다. 그림은 달랐다.
페페를 그렸는데 머리카락이 뽀글뽀글하다. 마치 원장선생님이 파마한 머리 같았다.
심지어 페페가 앞치마도 했다.
원장선생님이 자주 입으신다.
“근데 왜 원장선생님만 페페를 그리고 유다희 선생님은 없어?”
“아?”
“응?”
“언장샘 페페 조아해. 다이 샘 꽃 조아해.”
다이 샘이라니. 시하야. 발음 조심하자. 데스노트 같은 느낌이잖아. 무섭잖아.
아무튼, 시하는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걸 그려줬나 보다.
맞춤형 그림이라는 거지.
“꽃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시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두 손을 입에 모았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시하 다 바써.”
“뭘?”
“샘 꽃 바다써. 문도 삼춘이 져써. 다 바써.”
도환이 형. 어쩌다 시하에게 그 장면을 목격되게 한 겁니까.
사랑의 목격자 이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