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어느 술집.
오상환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한 테이블에서 남자가 손을 흔들며 반겼다.
그는 미리 주문했는지 테이블에 맥주 두 병과 소주 한 병이 올려져 있었다.
“형 왔어? 내가 시간 맞춰서 시켰어. 이제 나온 거야.”
“그게 중요하냐? 회사는 왜 그만둔 거야?”
오상환은 아는 동생인 박한수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이직도 아니고 아무 준비 없이 그만두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었다.
박한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좀 충동적이긴 했지.”
“계획은 있는 거지? 그래도?”
“대충.”
“대충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오상환은 충동적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박한수가 술을 들이켰다.
“크으. 그놈의 사내정치가 뭔지.”
“밀려났냐?”
“제대로 밀려났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가만히 있으면 개떡 같은 부서로 이동할 것 같았거든. 근데 이럴 바에는 관두는 게 낫지 싶었어.”
“힘들었겠네.”
“푸흐흐. 사실 사표 내면서 진짜 만감이 교차하더라. 아, 이제 어떡하냐. 힘들겠다. 이런 생각.”
“제수씨는?”
“덕분에 사표를 낸 거지. 내가 뭔 힘이 있어서 사표 낼 용기를 가지겠어.”
“그만두라고 했다고?”
“응. 차라리 나 사업하고 싶다고 하니까 해보라고 하더라.”
“…….”
오상환은 솔직히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리 대담하게 그만두라고 할 줄은 몰랐으니까.
어쨌거나 사업이라고 해도 밑바닥부터 시작할 텐데. 자리 잡기도 어렵고.
“무슨 사업인데? 아니. 물어봐도 되냐?”
“교수 그만두고 나랑 같이 사업하려고?”
“미쳤냐?”
“역시 그건 안 되겠지?”
“당연히 안 되지. 일단 우리 승준 엄마는 허락을 안 해.”
“으음.”
그때 미리 시켜둔 꼬치가 테이블에 도착했다.
박한수는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내가 그래도 회사 다닌 짬밥이 있는데 못 하겠어?”
“무역?”
“무역은 무역이지. 외국에서 재화 물품을 수입해서 한국에 팔 거야. 그거부터 시작해 보려고.”
“계약은 따냈고?”
“일단 미리 따냈지.”
“계약서는 아직일 텐데?”
“걱정 마. 그거 가지고 뒤통수칠 회사는 아니야. 아는 사람도 있고.”
“걱정되긴 하네.”
박한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고 데니어(섬유의 굵기 단위) 섬유는 이미 두 개 확보해 뒀고, 고무 원료 RB백이나 테이프 정도 확보했지. 일단 거기서 시작하려고.”
“흐음?”
“근데 진짜 목표는 항공우주산업 쪽에 납품하는 거야.”
“아,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에 맞는 재화 물품 거래처를 따내는 게 문제지.”
항공우주산업.
이 부분이라면 강인대학교 전자공학과와 관련이 있긴 했다.
그냥 사소한 프로젝트 중 하나다.
교수의 추천과 성적 높은 학생들은 항공우주산업 회사인 KAI에 지원할 수 있다.
문제는 전국 대상이라 그 경쟁을 뚫기 쉽지 않다.
각설하고 항공우주산업에 납품하는 형태면 충분히 돈이 된다는 것이다.
“나로호가 성공적으로 쏘아 올려진 것도 2013년도지. 이제 타이밍이 좋을 시기야.”
“너 뭔가 알고 있나 보네?”
“당연하지. 근데 나도 도박적인 거긴 한데…. 원래 리스크가 큰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
사업이라는 게 리스크 없이 할 수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수입이 나오는 물품이 있다는 점에서 아예 도박적인 시작은 아니었다.
오상환은 한숨을 쉬었다.
“뭐야. 괜히 걱정했네. 난 진짜 심각한 줄 알았는데.”
“아니. 진짜 심각해. 이제 사무실 계약도 해야 되는데 나 혼자가 끝이야. 아, 물론 한 명 더 있긴 한데 꼬시는 중이라.”
“그래서?”
“그런데 말이지. 이게 외국을 상대하는 거니까 외국회사랑 연락하는 업무가 있단 말이지. 혹시 제자 중에 영어 잘하는 사람 없어? 공대니까 어느 정도 이쪽 분야는 알아먹을 것 같은데.”
“있다고 해도 일도 없는 신생업체에 맡길 순 없잖아.”
“왜 일이 없어! 설사 없다고 해도 일이야 따내면 되는 거지.”
“누가 영업직 아니랄까 봐.”
오상환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한수가 꼬치 하나를 뜯으며 말했다.
“나도 영어를 못 하는 건 아닌데 말이야. 이리저리 뛰려고 하면 역시 한 명은 있어야 돌아갈 것 같거든.”
“없어. 없어. 단기 계약이라면 몰라도. 그리고 임금 안 밀리게 줄 수 있냐?”
“으음. 사실 이제 시작하는 거라 막 확답은 못 주겠네.”
“그렇다니까. 그 힘든 곳 누가 가려고 하냐? 요즘 애들 안 그런다.”
“끄응.”
회사 창립 초기 멤버.
분명한 혜택이 있다. 크게 키워 나가면 나갈수록 그 혜택은 기하급수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꿈에 부푼 생각일 뿐이다.
현실은 굉장히 냉혹하니까.
“진짜 도와줄 사람 없어? 아, 진짜? 혹시 계약 따내면 거기에 따른 성과급도 줄 건데?”
“그건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지.”
“아니, 진짜 그쪽 사업만 따면 안정권으로 접어드는데. 이걸 안 받는다고? 초기에 투자해야 재미를 보지.”
“그건 모르겠고 그냥 마셔라.”
둘은 술을 들이켰다.
사람 좀 구하려는 박한수는 시무룩해졌다.
“아, 형. 한 3개월이라도 좋으니까 해줄 사람 좀 알아봐 주라. 임금 못 주면 내가 밀리더라도 꼭 줄 테니까.”
“흐음.”
사실 진짜 말한 대로 계약을 따낸 거면 임금이 밀릴 일은 없었다.
한국에 팔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물론 박한수가 팔리지도 않는 걸 들고 올 일도 없었다.
그만큼 능력이 있는 놈이었다.
그렇지만 초창기 회사를 이끈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외국어 잘하고, 항공우주산업은 아니더라도 섬유나 자동차에 들어갈 부품 등을 아는 외국어 능력자. 이게 뭔 개똥 같은 소리야. 그런 제자가 있으면 대기업 넣으라고 했겠…….”
“역시 없겠지?”
“응?”
“응? 왜 그래?”
“있네?”
오상환은 순식간에 누군가의 이력이 떠올랐다.
섬유 쪽 하비니스 기업과 일한 적도 있으면서, 독일의 멜츠 자동차 기업과도 일했으며, 심지어 외국어도 잘하는 누군가를.
“뭐야! 있으면 소개해 줘! 나 급해!”
오상환은 꼬치를 들고 입에 넣으며 오물거렸다.
“물어는 볼게. 물어만.”
***
밤에 잠도 안 자고 시하랑 밖을 나왔다.
오늘 달을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어째서인지 묻지는 않았다.
그냥 산책하면서 물어보려고.
“시하야. 달 있네. 달.”
“형아. 그거 아라?”
“뭘?”
“달님에 토끼 있대. 떡 만든대, 떡!”
“그래서 달 보러 나가자고 한 거야?”
“눈 크게 떠야 대. 토끼 보여.”
“지금 보여? 난 안 보이는데?”
시하가 걸으면서 하늘 위를 본다.
눈을 크게 뜨는 것보다는 힘을 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저래도 토끼는 없기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토끼가 있어도 보이지 않겠지만.
“안 보여.”
“크게 떠도 안 보일 거야. 저기 달로 가면 토끼가 있는지 볼 수 있을걸?”
“정말? 달님에게 어케 가?”
“우주선을 타고 저기 달나라로 가는 거야.”
“우주선 모야?”
“아, 우주선은 말이지. 바로 이거!”
말로 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더 빠르다.
하나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런 비행기 같은 로켓인데 하늘을 쭈욱 날아서 저기 달까지 도착할 수 있어.”
“달님에게 간 사람 이써?”
“응. 있대.”
“대다내! 토끼 바써?”
“어?”
토끼를 봤다고 해야 하나? 못 봤다고 해야 하나?
꿈 많은 시하 어린이의 동심을 지켜줘야 할지 아니면 거짓말하는 형아가 되지 않기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도 리스크가 크다는 점에서 문제다.
뭐야. 그냥 이득만 얻을 수 있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형아. 달님에서 토끼가 이케 해. 떡 사세여! 떡! 싸게 해주께! 서이 개. 천 언이야. 천 언!”
토끼에게서 익숙한 시장 아줌마들이 보인다.
갑자기 달토끼가 친숙해진다.
“이렇게도 한다던데? 찹쌀떡~ 메밀묵~”
“메밀묵?”
“먹는 거 있어.”
“마시써?”
“응?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맛은 조금 있지.”
엉뚱한 이야기로 빠진 덕분에 달에서 토끼를 만났는지는 대답을 못 해 주었다.
뭐, 이렇게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날도 있어야지.
“그럼 시하는 달에 가면 토끼에게 떡 사줄 거야?”
“시하 대지저굼통에 돈 마나. 떡 마니 사주께.”
“얼마나 사주려고?”
“할무니 주꺼야.”
무려 떡 5만 원 치나 된다.
3개에 천 원이었으니 만 원이면 30개. 5만 원이면 150개나 된다.
만약 사게 된다면 어린이집에 나눠줘야겠다.
“엄청 많이 사네?”
“토끼가 열심히 해쑤니까. 마니 사져야 해.”
“이야. 시하 착하네. 근데 토끼가 더 사달라고 하면 어떡해? 막 백만 원치 사달라고 하면?”
시하가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구러면 시하가 돈 업써. 미안해. 해야 해.”
“사주지는 않는구나?”
“대신에 시하가 파라 주께. 시하가 책도 파라써.”
달에서 지구로 가져가 팔아줄 생각인가 보다.
천재인데?
드디어 이시하. 달과 지구를 잇는 유통 쪽의 큰손이 되는 건가!
“근데 지구에서 잘 안 팔리면 어떡하지? 토끼가 돈 못 벌게 되는데?”
“갠차나. 갠차나. 다 파라.”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시하 형아 동생이야. 그래서 다 파라.”
“!!!”
근거가 상당한데?
레드 형아 동생이니 다 잘 팔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어디서 팔 건데? 시하야. 100만 원이면 3천 개나 된다니까! 이렇게 산만큼 쌓여 있다니까?”
“서이천 개?! 산만쿰?!”
개수를 말하니까 이제야 감이 오나 보다.
3천 개는 알아듣지 못해도 산만큼은 알아들었겠지.
“시하 방법이써.”
“응.”
“어린이집에 파라. 문도 삼춘, 백동 형아, 리사 누나, 개굴 누나. 또. 또.”
지인 장사냐! 전에 달콤한 맛 좀 봤다 이거지?!
홍 아찌도 나오고 할부지도 나오고 아는 사람 총출동이다.
“너튜부에 이벤투해. 이벤투. 전에 시하가 레드형아페페 파라써.”
“그랬지.”
이건 가능성이 있는데? 똑똑한데? 벌써 광고도 알고.
“근데 레드형아페페는 산만큼 못 팔았는데?”
“!!!”
이쯤 되면 어디까지 대답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이시하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인가.
“시하 방법 생각나써!”
“응? 어떤 거?”
“집 만드러. 집. 헨젤과 구레텔이야.”
“아…. 대단한데?!”
“구래서 마녀한테 파라~!”
쿠키랑 초콜릿으로 만든 집 대신 떡으로 만들다니.
이게 바로 한국판 과자 집인가.
벌써 부동산이 돈이 된다는 걸 알아본 시하였다.
물론 이건 내 헛생각이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달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며 산책을 마쳤다.
***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오상환 교수님이었는데 혹시 생각 있으면 신생업체에 들어가 보지 않겠냐는 연락이었다.
3개월. 아마 하는 일은 별로 없을 수 있는데 그래도 재밌는 프로젝트를 준비한다고 한다.
항공우주산업.
노리는 계약은 이쪽인데 과연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노력에 달렸다고.
모르는 분야인데 자세히 들으면 그래도 꽤 알고 있는 것도 있다.
일단 자재들.
섬유 관련과 필름 관련이 있었고, 이런 것들은 자동차와도 연관이 있었다.
“흐으음.”
「역시 안 되겠지? 안 되면 다른 사람 알아보고. 사실 나도 부탁하는 게 민망하긴 하네.」
문제는 임금이었는데 솔직히 금액은 크지 않았다.
차라리 번역을 더 하는 게 나을 정도다.
하지만 성과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부분이 끌린다.
얼마나 될지 모르겠는데 다른 회사 사람들을 보니 인센티브가 연봉의 배 이상을 받으며 일한다더라는 풍문을 들은 적 있다.
지금까지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이리저리 받아왔는데 이건 신생업체의 정규직이다.
물론 1년간 일할 생각이 없으니 계약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계약을 따내면 성과금을 준다니 어찌 보면 재밌을 것 같다.
“계약은 외국에서 따내는 거죠?”
「왜? 관심 있나?」
“의외로 통역보다는 영업 쪽이 제 적성에 맞는 거 같아서요.”
「뭐,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지.」
“그렇긴 하네요. 저도 4학년이니 이제 도전할 수 있는 시기는 얼마 안 남은 것 같고.”
「아직 젊잖아. 충분하지.」
“저한테 시하가 있잖아요. 빨리 정착하긴 해야죠.”
「아…. 그랬지. 상황이 다른 사람이랑 다르지.」
해외 기업과 밑바닥에서부터 계약을 따내는 경험.
한 번쯤은 해보고 싶긴 하다.
심지어 이미 구상은 해뒀다고 하니 뛰어들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거기서 보고 배우는 것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일거리는 많이 없다고요?”
「어. 아직 신생이라 일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야.」
“그럼 해볼게요.”
번역할 시간이 충분히 있을 것 같다.
작년이라면 아마 못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학교 강의가 꽤 있어서 세 가지 일을 못 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학교는 강의가 별로 없어서 사실 다니나 마나 하는 중이니.
그리고 다음 날.
사랑스러운 금송아지를 보는 듯한 박한수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반갑다! 나 박한수가 오래 일할 수 있도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 여기 온 걸 절대 후회 없도록 하겠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모시며 살겠… 은 아니고! 돈은 절대 밀리지 않겠다! 너의 사표는 가슴에만 품고 꺼내지 말도록!”
“…….”
벌써 사표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