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선물로 받은 세발자전거는 차 트렁크에 쏙 들어갔다.
그게 왠지 귀여워 보여서 웃음이 났다.
딱 이 나이 때 자전거가 트렁크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좀 더 크면은 알아서 자전거를 끌고 뽈뽈 돌아다닐 것이다.
“시하야. 이제 집에 갈까?”
“형아. 지베서 노라?”
“응. 그렇지.”
어린이집에 실컷 놀았는데 아직도 시하는 노는 게 부족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눈앞에 의외의 사람이 보였다.
“리사 누나!”
“알리사?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알리사가 기분 좋게 손을 흔든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거 전해주러요. 오늘 어린이날이잖아요.”
“어린이날도 알아요?”
“한국에서 아동복 팔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팔 수 있는 날을 다 챙겨야 하니까.”
“그럼 이건 옷이겠네요.”
“이번에 새로 나왔어요.”
파랑몰도 시즌마다 옷을 내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 참으로 부지런하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옷을 주니 고맙다.
“고마워요. 시하야. 여기 리사 누나가 옷 선물을 했네.”
“리사 누나 고마어! 시하, 리사 누나 옷 조아해!”
알리사가 살포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여기에만 있기 좀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죠? 집에서 같이 먹을래요? 뭐, 차린 건 없긴 한데. 아니면 밖에서 먹을까요?”
“저는 집밥 좋아해요. 지금 식당가면 사람들도 많고 또 차로 움직이기 번거로우니까요.”
“거기까지 배려 안 해줘도 되는데.”
우리는 집으로 들어갔다.
손부터 씻고 저녁을 준비했다. 사실 이렇게 급하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손님이 왔는데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대충 앉아서 티비 보고 계세요.”
“방이랑 구경하면 안 돼요?”
“뭐 볼 건 없는데.”
그때 시하가 엉거주춤 앉으려다가 벌떡 일어서서 알리사의 손을 잡았다.
“리사 누나. 시하가 알려주께.”
“아하하. 부탁해. 시하야.”
“시하가 가르쳐주께.”
시하는 이걸 하나의 놀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요리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햄이랑 달걀도 굽고 오늘 아침에 많이 해둔 김치찌개도 끓일 생각이다.
요리는 금방 나온다.
“여기 어항 이써. 피피, 일피, 이피, 삼피, 사피야. 얘는 티김이야. 티김.”
“우와. 시하가 키우는 거야?”
“시하가 키어. 이제 밥 져야 해. 밥 마니 머거~ 해야 해. 리사 누나도 해볼래?”
“응. 나도 해보자.”
먼저 시하가 집에 있는 가족들부터 소개한다.
살짝 돌아보니 알리사랑 시하가 물고기 밥을 주고 있다.
새우 밥은 따로 있다면서 시하가 알려준다.
아마 지금쯤 선생님 역할 놀이하는 기분으로 가르쳐주는 거 아닐까?
“이거 레드형아페페야.”
“아. 이거 나한테도 준 거지?”
“여페 그냥 페페도 이써.”
“응? 이건 파란색이네?”
“시하가 파란색으로 칠해써.”
3번 발판이 달린 레드형아페페.
그 옆에는 연습용으로 만들어두었던 페페 프라모델이 있었다.
내가 연습했던 2개 페페는 폐기하고 남은 페페는 시하가 파란색으로 칠했다.
아저씨가 주문한 프라모델이 100개보다 좀 더 많았으니까 할 수 있던 거였다.
“이게 더 갖고 싶네? 레드형아페페도 한정판이었는데 오리지널 색깔은 더 유니크해.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겠다.”
“유니쿠? 모야?”
“응? 유니크는 으음. 특별하다는 거야. 몇 개 없는 거라고 해야 할까?”
“툭별해! 페페 툭별해.”
“응응!”
한동안 여기저기 알리사를 이끌며 간단히 소개가 계속되었다.
“하장실이야. 시하랑 형아랑 샤어해. 똥도 싸!”
그런 정보는 소개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여기 형아랑 자는 데야. 페페탈도 이써. 여기 옷도 있꼬 시하 팬티도 드러이써!”
시하야. 팬티 넣어둔 곳을 소개해 주는 거니? 거기까지는 TMI가 아닐까?
알리사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 형아랑 시하랑 양말 가치 이써. 시하 양말 혼자 입을 수 이써. 리사 누나 양말 혼자 입을 수 이써?”
“응. 당연하지.”
뭔가 뿌듯하게 양말 신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뭔데. 뭔데 엄청나다고 자랑까지 하는데.
너무 귀엽다.
“알리사. 시하야. 밥 다 됐어.”
“리사 누나. 여기 싱쿠대야. 싱쿠대. 밥도 해.”
아직도 소개 안 끝났니?
***
시하가 밥을 다 먹고 방으로 들어가 패드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알리사와 나는 커피를 타서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눴다.
“매번 옷 줘서 고마워요.”
“그냥 새로 나올 때마다 하나씩 챙기는 건데요. 뭐.”
“그래도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한두 번은 모르겠는데 계속 챙겨주잖아요.”
“그냥 고마워서 그래요. 시혁 씨 아니었으면 파랑몰 무너졌을지도 몰라요.”
“제가 봤을 때는 저 아니었어도 안 무너졌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알리사는 그 고비를 잘 넘겼을 것이다.
그 당시 스티브 백의 자서전을 쓰게 되어서 여러 가지 기회가 맞닿았을 뿐이다.
내가 봐 온 알리사라면 분명 충분히 털고 일어나 그 나쁜 아루아루 대표에게 엿을 먹여줬을 것이다.
굉장히 활동적이고 진취적이다.
“아니에요. 그때 위로를 안 해줬으면 무너졌을지도 몰라요.”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맡겨만 주세요.”
후르릅.
따뜻한 커피가 입가심이 된다.
한국에서 익숙한 믹스커피를 알리사는 맛있게 마시는 거 같다.
“집으로는 갔어요?”
“네? 집이요?”
“아! 한국 집 말고요. 미국에 계신 부모님에게요.”
“방학 때 갔다 왔어요. 건강하게 잘 계시더라고요. 사실 한 달간 지긋이 있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하겠더라고요.”
“아, 회사 때문에?”
“네. 한 2주는 있었는데 3일은 미국 공장을 돌아본다고 다 날린 거 있죠?”
“스티브 백도 만났겠네요?”
“당연하죠. 일 얘기도 실컷 하고 왔어요.”
확실히 파랑몰은 작년과 확연히 달라진 것 같다.
벌써 이런 글로벌한 기업이라니.
일단 알리사의 존재가 확연히 크다. 거기 사람들을 어떻게 구워삶아 먹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한국인이 미국에서 가서 공장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순탄치 않았을 것 같다.
심술부리는 곳도 있었을 거고 빡빡하게 구는 곳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알리사라고 해서 그런 곳이 없다고는 못하지만 말이다.
“현지 가서 계약하러 돌아다니면 많이 힘들겠죠?”
“발로 뛰는 건 힘들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어요. 의외로 잘 받아주고 환영해 주는 것도 있더라고요.”
“어떻게 환영하는데요?”
“이야. 젊은 사람이 고생한다. 너 정말 멋있다. 응원하고 싶다. 뭐 이런 거요. 은근히 어린 얼굴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청년들을 응원해 주시는 분들인가?”
“네. 아닌 분들도 많았지만 뛰다 보면 그런 분들이 꼭 있거든요. 그래도 저에게는 무기가 있었잖아요. 더 쉬웠죠.”
“그렇죠.”
스티브 백의 회사라는 무기가 있었다.
유통 쪽을 만드는 데 있어서 새로운 사업을 하지만 그만큼 비전이 있다.
거기에 끼게 되는 건 매력적이다.
“근데 그게 걸림돌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왜요?”
“좀 그렇잖아요. 공유 경제가 허상 같은 면이 있으니까.”
“으음. 으음.”
어찌 보면 사람들의 환심을 끌어모으면서 적자를 감수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적자일까?
많으면 돈이 된다. 충분히 사람들을 모았다는 시점에서 수수료를 올리는 순간부터 대체재가 없다는 위치로 끝난다면?
점유율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
괜히 유통이 제일 돈을 많이 번다는 게 아니다.
“그래도 저는 이렇게 계약 따내는 게 맞나 봐요. 잘 적응하는 거 보면. 처음 알았어요.”
“막상 해봐야 아는 것이 있죠.”
“시혁 씨는 약간 중립적이기는 한데 그래도 혼자 하는 게 더 편하죠?”
“으음. 그런 성향이 있긴 하죠. 상황이 그렇기도 하고.”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셨다.
컵에서 입을 살짝 떼며 말한다.
“그것도 괜찮은 거 같아요. 혼자 다 썰고 다니는.”
“썰긴 누가 썹니까?”
어린이집 아이들도 그렇고 무슨 묘사를 폭력적인 사람으로다가…….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돼요. 다가가는 건 제가 잘하니까.”
“네?”
“그렇잖아요? 묵묵히 혼자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중.”
“…그건 그렇죠?”
그 위치에서 일을 잘하는 타입이라는 소리인가 보다.
아직 한국식 표현에 어색함이 있는 걸까?
“전 같이 끌고 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늘 먼저 다가가고.”
“대표니까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시혁 씨도 시하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고요.”
커피를 다 마신 알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 제가 할게요!”
“예? 아니에요. 됐어요. 손님에게 설거지는 무슨.”
“저 설거지 잘해요.”
“못한다는 게 아니잖아요.”
알리사는 그저 싱긋 웃으며 고무장갑을 꼈다.
“이러면 못 뺐지!”
“어린앱니까?”
고무장갑 차지한 사람만이 설거지할 수 있다.
뭐 그런 걸까?
나는 피식 웃으며 더는 거절을 못 했다.
알리사가 설거지를 하고 손을 씻은 뒤.
“이제 저 갈게요.”
“고마워요. 설거지도 해주고.”
“저도요. 아 참. 시혁 씨.”
“네?”
“아까처럼 설거지한다고 할 때 밀어내지만 마세요.”
“???”
당연히 손님에게 시키는 건 조금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저 그냥 손님 아니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요.”
“특급 손님이니 밀어내면 옷 가져오는 계약을 파투낼 수도 있어요. 의외로 까다로운 거래처니까.”
“푸흡. 예측 불가능한 거래처인데요?”
“그럼 더 좋구요.”
나는 고개를 돌려 시하를 불렀다.
“시하야. 알리사 간대.”
“아?”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배웅을 했다.
“리사. 바이바이!”
“응. 시하야. 바이바이.”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알리사가 문을 열고 떠나갔다.
나와 시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시하가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으니까.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
쌍둥이의 집.
하나랑 승준은 아빠가 오기를 꼬박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바로 어린이날!
선물을 기대하는 것도 있었고, 오늘 어린이집에서 받은 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승준 엄마는 현관 앞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이미 한차례 자랑이 끝난 것이다.
띡. 띠딕. 띡. 띡. 띠리리~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린다. 문이 열렸다.
“아빠! 다녀오셨어요!”
“아빠! 다녀오셨어요!”
쌍둥이들이 아빠를 반겼다.
오상환은 앞에 기다리고 있는 쌍둥이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앞에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어?”
“아빠가 선물 가져오잖아!”
“아빠. 선물은?”
“아빠 기다린 게 아니라 선물 기다렸어?!”
오상환은 살며시 시무룩해졌다.
언제부터 아이들이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물들었는지.
“아니. 아빠도 기다렸는데?”
“아빠 보고 시펐는데?”
“그래?!”
오상환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품에 있던 선물을 내려놓고 쌍둥이들을 안았다.
“흠흠. 오늘 어린이날이라 둘에게 선물을 준비했어.”
“아빠! 이거 사커화야?”
“응. 그럼. 승준이 갖고 싶다던 사커화지. 발에 꼭 맞을 거야.”
승준이 상자를 뜯어서 곧장 축구화를 신었다.
하나는 거대한 포장지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하나는? 하나는 모야?”
“하나는 커다란 곰 인형이지요.”
하나가 갖고 싶어 하던 곰 인형.
생각보다 곰인형이 상당한 가격을 자랑했다.
그래도 막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다.
커다란 포장지를 감싼 리본을 풀자.
“와아! 곰 인형이다!”
하나가 커다란 곰 인형의 품을 덥석 안았다.
키보다 더 커서 안고 자기 좋아 보였다.
승준 엄마가 말했다.
“아빠한테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지.”
“아빠 고맙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오상환이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이들이 이렇게 선물을 기뻐하는 게 행복했다.
흔히 말해서 돈 쓸 맛이 났다.
“아빠. 나 시하가 만든 프라모델을 받았다!”
“하나도 받아써!”
“오! 그랬어? 시하 대단하네. 두 형제가 아주 재능이 넘쳐.”
아이들이 세발자전거도 자랑했다.
오상환 교수는 별로 싫지도 좋지도 않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자전거는 앞으로 트렁크에 실어서 어디 갈 때 끌고 가겠구나 싶었으니까.
솔직히 앞의 미래가 흔히 그려져서 곤란했다.
승준 엄마가 말했다.
“그래도 저 자전거 뒤에 손잡이가 있어서 유모차처럼 끌고 갈 수 있더라고요. 정말 좋죠?”
“아, 그래?”
확인해 보니 정말 봉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저거라도 없었으면 아이들이 자전거 내버려 뒀을 때 끌고 가기 곤란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저런 편의성이라면 덜 귀찮을 것 같았다.
“사커화! 사커화!”
“곰 인형! 곰 인형! 자전거 타자!”
승준은 축구화를 신고 자전거를 탔고, 하나는 곰 인형을 안장 위에 올렸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오상환 교수에게 전화가 울렸다.
“어. 네가 웬일이야?”
「오랜만입니다. 형님.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십니까? 같이 술 한잔 좀 했으면 합니다.」
“뭐? 왜? 무슨 일 있어?”
「회사 때려치웠습니다.」
“어? 갑자기 왜?”
「그건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친한 동생이었다.
그만두었다는 말이 너무 의외여서 오상환 교수는 곧바로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른다. 무언가 있었던 것 같다.
오상환은 아이들을 보았다.
만약에 어떠한 사정으로 그만두고 싶을 때.
과연 나는 그만둘 수 있을까?
고개를 젓는다.
아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