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하지만 후원에 찍혀있는 금액은 달라지지 않았다.
“형아. 시하도 볼래.”
“어? 응.”
자세를 낮춰서 시하가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손가락으로 하나, 둘 하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70만 원 정도 되었다.
그것도 하루 만에 말이다.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는데 이런 후원이 터진 거면 엄청나게 미친 거였다.
확인해 보니 한 사람이 무려 300만 원이나 후원했다.
“형아 마나! 서이야! 서이!”
“응. 많지? 형아도 깜짝 놀랐네?”
300만 원을 후원한 사람은 나도 아는 아이디였다.
맨날 시하가 그림이나 올릴 때 늘 함께했던 사람.
아이디 이름은 interpret.
사람들에게 해석가로 불리고 있었다.
후원을 이렇게 투척하는 걸 보면 부자인 걸까?
하루에 300만 원은 평범한 사람이 쓰기에 부담스러울 텐데?
아무튼, 이런 후원금을 받았는데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금액이 많든 적든 마지막에 말은 해야 했는데.
후원은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냥 추첨하는 데에만 집중한 결과다.
지금이라도 감사의 공지를 올리자.
“시하야. 이렇게 많이 후원해 주셨는데 고맙다고 올리자. 알았지?”
“시하가 또 마이쿠에 고마어여~ 하까?”
“푸흡. 스트리밍은 한동안 할 생각은 없어.”
“왜?”
“으음. 그냥? 우리는 비밀인 컨셉이거든.”
이른바 신비주의 컨셉이다.
내 바람으로는 시하가 성인 되었을 때까지 지켜졌으면 한다.
나이가 어리다는 거. 충분히 화제도 되지만 은근한 무시가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인터넷 세상은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엄청 못된 사람들도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실제로 일러레 중에 별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없기도 하고.’
익명성이라는 건 여러 가지 소문이 부풀려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보호가 되어서 좋은 것 같다.
물론 익명이라는 무기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 맞다. 시하야. 어린이날 때 형아도 같이 있을까?”
“아? 왜? 형아. 왜 어린이집 와?”
시하가 눈을 반짝였다.
좋아하는 게 온몸에서 뿜뿜 나온다.
“궁금해?”
“궁굼해.”
“선물이 선물이니만큼 그때는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시하 선물 가치 들고 가려고?”
“그것도 있는데 어린이집에서 줄 선물이 엄청나거든.”
“형아. 어린이집 선물 아라? 샘이 주는 거?”
“형아는 다 알지.”
“!!!”
시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지를 잡아당기더니 허리를 낮추라고 지시한다.
손을 모으며 내 귓가에 속삭인다.
“형아. 시하가 비밀 지켜주께. 시하에게만 알려져.”
“푸흡. 안 되는데?”
“왜? 시하가 말 안 하께. 비밀지키께.”
“이건 선생님하고 약속해서 알려줄 수 없어요. 약속 안 지키면 나쁜 어린이지?”
“형아. 어룬이야. 어룬. 갠차나. 갠차나.”
“아니. 어른이니까 더 약속을 지켜야지.”
요즘 의외로 논리적으로 파고 들어온다는 말이야.
혹시? 시하는 예체능 계열이 아니라 이과에 재능이 꽃피는 거 아닐까?!
지금부터 덧셈, 뺄셈을 가르쳐야 하나?!
“우웅. 구럼 힌투! 힌투는 약속에 안 들어가 이써!”
시하가 엄청나게 똑똑해졌다.
그런 맹점을 파고들다니…. 어른의 방식을 터득해 버렸구나. 이시하!
기특해서 하나쯤은 던져줘도 되지 않을까?
“그럼 힌트입니다.”
“시하 아라!”
“아직 힌트도 말 안 했는데?”
일단 너는 알고 보는구나.
“그럼 힌트 안 줘도 되겠네?”
“아니! 시하 몰라!”
“푸흡. 아, 그래. 힌트 줄게. 선물은 말이야. 발이 세 개나 달려 있어!”
“!!!”
“시하가 좋아하는 서이!”
“시하 아라!”
시하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배를 쭈욱 내밀었다.
아무래도 정답을 눈치챘나 보다.
역시 대단하다. 이시하!
정답을 말해도 안 가르쳐줄 거지만.
“뭔데?”
시하가 살며시 허리를 굽혔다.
손으로 지팡이 짚는 시늉을 한다.
“할부지. 할모니.”
“땡!”
“!!!”
시하야. 설마 어린이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선물을 준비하겠니?
시하가 저런 대답을 하니까 어떤 수수께끼가 생각난다.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
답은 인간이었지.
“정답! 지팡이!”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줄래?
원래 한 번 답을 내면 거기에서 빠져나가기 힘든 법이다.
***
어린이날.
시하와 나는 어린이집으로 박스를 한 아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하 3개. 나 6개.
어린이집 아이들과 선생님께 줄 선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샘! 안녕하세여!”
“어머. 시하야. 그 박스 뭐야?”
“샘 선물.”
“이거 나 주는 거야?”
“어린이날 선물이에여.”
“선생님은 어린이 아닌데?”
“오늘만 어린이 하면 대여.”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선생님이 상자를 품에 안았다.
원장님도 고맙다고 받았는데 풀어보지는 않고 선반 위에 놔둔다.
“우와. 시하야. 뭐야?”
“이거 선물이야. 시하가 만드러써.”
“정말?!”
승준이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하나도 옆에서 시하 대다내! 하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연주는 가만히 상자와 시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고마워. 시하야. 풀어봐도 돼?”
“고마워. 시하야. 소중히 할게.”
“고마워.”
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상자를 풀어봤다.
“헐! 레드형아페페다!”
“와! 레드오빠페페다!”
저기 쌍둥이들아? 왜 형아와 오빠를 굳이 붙이는 거니?
그냥 레드페페라고 하면 되잖아!
연주가 선물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나도 이거 캐릭터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진짜 귀엽다.”
아무래도 연주의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역시 귀여운 건 진리지.
종수랑 재휘도 꽤 기쁜 것 같았다.
“시하가 이렇게 대단한 걸 만들다니. 다음에 내가 더 굉장한 건 만들어서 선물해줄 거야!”
“종수 하팅!”
“아니, 응원해 달라는 건 아니었어!”
“종수 더 대다난 거 만드러. 대다내!”
“아직 안 만들었었어!”
종수는 기뻐하는 거 맞겠지?
근데 뭔가 으음 모르겠다. 시하와 종수의 관계성을 말이다.
친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또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시하야.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나중에 내가 레드형아페페 옷도 만들어 입혀줄게.”
“정말?”
“응. 이 애 알몸이니까.”
아니! 원래 동물들은 알몸이라고! 아니지. 몸에 난 털이 옷이라고!
알몸이라고 하지마…….
그렇게 말하면 이름이 레드형아페페니까 마치 내가 알몸인 거 같잖아!
“푸하하. 알몸이래. 알몸. 누드페페네. 누드페페!”
은우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를 잡고 쓰러져있다.
“아냐. 레드형아페페가 레드페페 입고 이써.”
응. 시하야. 한마디로 인형탈을 쓰고 있는 설정이라는 거지?
역시 시하밖에 없다.
“푸하하. 레드페페 입고 있대! 푸하하!”
대체 어떤 점이 웃음 포인트지?
은우의 웃는 지점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별로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잠깐 여기 있었는데 특이한 아이라는 건 알겠다.
랩도 잘했지.
“시하야.”
“왜?”
윤동이 시하에게 다가가더니 손목을 덥석 잡고 무언가 건네준다.
보니까 청포도 사탕이다.
“너 먹어.”
“아? 고마어~!”
윤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프라모델 상자를 가방에 넣었다.
아이들이 무슨 선물을 얻었는지 파악해서 뜯지도 않은 것 같았다.
“너도 이거 먹고 조용히 해.”
“푸하하. 청포도. 푸하하. 우웁.”
사탕을 까서 은우 입에 그대로 넣어버린다.
흠. 뭔가 신기한 관계구만.
“시혁 씨. 시혁 씨.”
“네? 왜 그러시죠?”
“이거 진짜 시하가 만들었어요?”
“아…. 프라모델 형태는 제작 주문한 거고 색칠이나 이런 건 도움을 받긴 했는데 시하가 만든 게 맞아요.”
“우와. 진짜 대박.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선생님과 아이들은 한참 동안 레드페페에 대해서 신기해했다.
선생님이 ‘핫’ 하고 정신을 차린다.
“자. 자. 여러분! 오늘 어린이날이죠?”
“네!”
“그래서 이번에 선생님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 다들 궁금하시죠?”
“아니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이들은 레드페페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선생님도 눈치챘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레드페페가 강력하긴 하지.
하지만 알림장에 본 내용이라면 어린이집에서 준비한 선물도 상당했다.
“선생님이 준비한 선물도 엄청나다고요!”
“시하 아라.”
“네?”
“지팡이야. 지팡이.”
“???”
시하야. 그거 아니야.
아직도 거기서 못 벗어났니?
“에이. 지팡이야? 그거 별론데. 사커 할 때도 못 쓰는데.”
“아이돌이 지팡이 춤추면 되겠다.”
“지팡이??”
아이들 반응은 다양했다.
선생님이 절대 아니라고 팔을 엑스 자로 만들었다.
“자, 여러분. 어린이날 선물은 바로~오! 세발자전거입니다!”
아이들이 다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세발자전거를 선물로 받을지 꿈에도 몰랐던 표정이었다.
시하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발자전거 모야?”
“그건 밖을 보시면 알아요. 나가 볼까요?”
선생님이 문을 열었다.
따라다라라~ 따라라라라라~
선생님도 나랑 같은 수준이시구나. 절로 브금이 나오는 거 보면.
“짜잔! 세발자전거입니다!”
밖으로 나가서 보자 8개의 자전거가 나란히 있었다.
다들 싸우지 않게 똑같은 색깔이었다.
“우와! 시하야. 가자!”
“아아!”
“하나도 빨리 타볼래! 연주야.”
“응.”
아이들이 신나서 세발자전거로 달려갔다.
선생님이 그런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잠깐!”
“네!”
“이건 모두 조심해서 타야 해요. 알았죠?”
“네에!”
“그리고 요 앞에 있는 운동장에서만 타야 해요. 차 있는 곳에 가면 위험해요. 알았죠?”
“네에!”
다들 대답은 씩씩하게 잘한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오늘 내가 시하를 보러 온 것도 혹시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뭐,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타는 건데 사고가 날 일이 있지 않겠지만.
운동장 안에는 차가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기도 했다.
“그럼 다들 타지 말고 조심히 끌고 운동장으로 가요!”
“네에!”
대답은 잘하는데 다들 세발자전거의 아름다운 자태에 눈을 빼앗겼다.
강인 재단에서 이번에 어린이날이라고 선물 살 돈을 꽤 줬나 보다.
저거 못해도 하나당 8, 9만 원은 할 텐데.
“형아! 레드야. 레드! 레드자전거.”
“시하 좋겠네.”
자전거도 레드고, 페페도 레드고, 심지어 시하 차도 레드다.
온통 빨간색이니까 정신이 혼미하네.
근데 빨간색 광택 흐르는 게 또 예쁘긴 해!
세 개다 전부.
“갈까?”
“응!”
운동장에 도착했다.
축구 골대 있는 곳처럼 잔디가 있는 곳은 아니다.
정확히는 육상선수들이 달리는 트랙처럼 바닥이 되어 있는 곳.
강인대에는 운동장이 참 많았는데 여기도 그중 하나였다.
“자, 다들 트랙 위에서 한 바퀴 도는 거야. 알았지?”
“네!”
시하가 나를 보았다.
“형아. 타. 시하가 태어주께.”
“거기 형아가 타면 안 움직일 건데? 그리고 탈 때도 없어.”
순간 설렐 뻔했다.
뭐야. 오토바이 태워주는 남자도 아니고.
“시하가 업어주께. 그럼 대지~”
“형아 무거워서 안 돼.”
“안 무거. 안 무거.”
시하가 나를 업은 체로 자전거를 태울 수 있다면 완전 천하장사감이다.
사람들이 나중에 금메달리스트로 키우라고 할지도 몰랐다.
역도 선수. 이시하!
뭔가 안 어울리네.
“그럼 진짜 업힌다?”
“갠차나. 갠차나.”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아무래도 내가 다리를 들고 시하 등에 찰싹 업힌다는 상상을 한 모양인데…….
“간다.”
“아아.”
나는 시하의 등에 업혔다.
정확히는 그냥 몸을 붙이고 다리는 좌우로 벌려져 있다.
뭐야. 이거. 수치스러워!
“형아. 발 드러야 해.”
“진짜 든다?”
“응!”
나는 발은 들지 않고 살짝 체중을 시하에게 기댔다.
“형아. 무거.”
“형아가 무겁다고 했잖아.”
“시하 할부지 대. 지팡이 필요해.”
“푸흡.”
웃겨서 봐준다.
나는 시하의 등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전거 타보자. 처음 타보는 거잖아.”
“형아. 시하가 힘 더 세져서 나중에 태어주께.”
“그래. 고맙다!”
힘 안 세져도 된다.
세발자전거를 태운 형아의 모습이 썩 보기 좋지 않으니까.
되지도 않겠지만 진짜 그렇게 타고 있으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