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빨간색이라고 해서 다 같은 빨간색이 아니다.
레드, 메탈 실버, 로즈 골드 등 다양한 색감이 나온다.
제품마다 다르며 발라서 눈으로 비교해 보면 금방 보인다.
바르는 하부 색에 차이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는데 시하는 그걸 구분할 줄 알았다.
다르다는 것만 아니라 어느 색이 더 가미되는지를 볼 줄 아는 것 같다.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 그런가요?”
“색감에 대한 뛰어난 눈이 있어. 이건 사실 타고나는 거거든.”
“흐음.”
시하는 그것도 모르고 어느 레드를 고를지 신중한 표정이다.
레드형아페페는 어떤 빨간색일까.
뭐, 그런 고민을 하는 것 같다.
“형아. 이 레드야. 이 레드.”
“아, 그래?”
도료 자체에 약간 블루펄이 들어간 건 탈락.
붉은빛 광택이 살짝 나는 걸 시하는 선택했다.
빛나는 걸 좋아하는 걸까?
아저씨는 좋은 선택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제 마스킹을 해볼까?”
“마스킹이요?”
“마스킹 테이프라고 다른 엄한데 칠하지 않게 붙이는 거야. 얼굴이 붉어지면 안 되잖아?”
“아…….”
“이건 솔직히 어려워서 내가 할게. 이렇게 둥근 부분은 더더욱 어렵지.”
“정말요? 감사합니다.”
“후후후. 고수들도 어려워하는 작업이거든.”
시하는 하고 싶은지 이미 손에 테이프를 쥐어져 있다.
할아버지가 하는 걸 보고 열심히 테이프를 잘라서 붙인다.
“근데 시하야. 왜 펭귄 눈에만 붙인 거야?”
“아?”
“일단 얼굴 전체에 붙이면 되잖아.”
“눈 가려써. 숨바꼭질이야.”
작은 원이 눈에만 붙여져 있다.
아무래도 시하는 페페의 눈을 가렸나 보다.
저게 뭐야?!
마스킹 작업이 아니라 그냥 테이프로 가지고 놀고 싶었나 보다.
“자, 다 됐다. 이렇게 하면 된단다.”
“와!”
“가장자리를 잘 밀착해서 붙이지 않으면 색이 튀어나가서 곤란하지. 중요한 작업이란다.”
“그렇네요.”
“근데 이 애는 앞면만 조심하면 되니 이렇게 눕혀서 칠하면 덜 튀겠지?”
“그것도 그렇네요!”
페페를 세워서 칠하면 혹시나 중력에 의해 흘러내리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예 눕혀서 칠하면 리스크가 그만큼 적어진다.
물론 붓을 잘 사용해야겠지만.
“아크릴 도료의 장점이 있어서 사실 이걸 꺼낸 거거든.”
“장점이요?”
“그래. 일단 냄새가 안 나지. 그리고 덧칠이 가능해져.”
“냄새가 안 나는 건 좋네요.”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나는 작업이면 시하에게도 좀 안 좋을 것 같다.
“그럼 이제 색을 칠해볼까?”
“네!”
“재미께따!”
아저씨가 먼저 붓을 들고 시범을 보였다.
빨간색이 칠해진다.
나도 그걸 보며 색을 칠했다.
진짜 색을 복잡하게 칠해야 하는 프라모델이 아니라서 좀 쉬웠다.
그냥 전체적으로 페페는 털빛이 레드로 뒤덮여 있으니까.
마스킹한 곳만 조심하고 좀 깔끔하게 하려면 한 번에 잘 칠해야 했다.
“시하야. 잘돼?”
“아아.”
시하가 거침없이 붓을 놀렸다.
색이 칠해지는 깔끔함은 옆에 있는 아저씨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뭐지? 비교하니까 나는 두 사람보다 뭔가 어설픈 느낌이 드는데?
색칠된 모습을 보니 그랬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감탄했다.
“이 애 진짜 천재네. 천재. 붓질이 장난 아니네.”
“그래요?”
“당연하지. 이렇게 4살이 붓질을 잘하는 아이가 어딨어? 아! 혹시 미술 선생님에게 배웠나?”
“4살이 무슨 학원이에요.”
“그렇지? 근데 요즘은 워낙 빨리 보내니까.”
“그런데 아저씨. 뭔가 지저분하지 않아요?”
“아, 그거? 일단 1차 도색이란다. 2차 도색까지 할 생각이다.”
“아하.”
“색이 좀 더 진해지고 깔끔하게 하기 위한 도색이지. 3차까지는 할 필요가 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포스터나 표어를 하는 느낌이다.
색을 더하는 작업.
그림이 마르면 다시 색으로 한 번 덧칠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렇게 보면 진짜 색칠하는 게 도화지가 아니었을 뿐이지 하는 방식은 비슷한 거 같다.
“색칠하는 건 뭔가 비슷비슷하구나?”
“그래서 더 재밌지!”
아저씨가 껄껄 웃으셨다.
“할부지. 쉿! 시하 열심히 해야 해.”
“어? 어, 그래. 미안하다. 집중을 깨서.”
시하에게 혼나는 아저씨.
근데 우리 시하는 집중이 엄청나다. 좋아하는 걸 해서 그런지 열심히 색칠한다.
이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아저씨가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100개나 되니까 엄청 숙달될 거다. 저 모습을 보니 숙달이 필요할까 싶지만.”
“저는 필요한 것 같아요.”
“넌 좀 필요하지.”
100개를 시하가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저 정도면 노동이다. 노동.
어느새 우리는 1차 도색을 끝내고 2차 도색을 시작했다.
깔끔하게 살려서 레드페페를 완성했다.
“형아. 다 해써!”
“그러네?”
“너무 재미써! 시하 또 하고 시퍼!”
“아, 그래? 아직 많이 남았거든? 얼마든지 하고 싶은 만큼 해봐. 100개나 있는 거 알지?”
“시하가 다 할래!”
“푸흡. 그래.”
그게 잘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하가 다 한다고 했다.
물론 아저씨와 나도 도와줘야겠지만.
“그럼 분업을 하지. 서페이서 작업은 시혁이가 하고 나는 마스킹을 할게. 시하는 색칠을 하면 되겠구나. 어때?”
“괜찮겠네요.”
시하가 색칠하는 동안 서페이서 작업을 빨리 끝내면 좋을 것 같다.
무려 100개나 내가 해야 하니까.
“그럼 시작하지.”
우리는 그렇게 맡은 바를 다 하기 시작했다.
***
확실히 분업하니까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아저씨는 마스킹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색을 칠했는데 작업 속도는 누구보다 빠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도색을 대충 하는 건 또 아니었다.
반복과 숙달.
여기에 최적화된 것 같았다.
“엄청나네요.”
“하하. 대단한 건 시하지. 애가 무슨 이렇게 오랫동안 작업을 해.”
틈틈이 쉬기도 했는데 시하는 정신없이 붓을 놀리고 있다.
조금 신기했다. 뭔가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물론 그림을 그릴 때도 거기에 관한 집중력이 확연히 올라가긴 했지만.
“그러게요. 재밌나 보네요.”
“근데 펭귄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충분히 금방 끝날 것 같은데? 빨간색만 칠하면 되고.”
그것도 그렇다.
의외로 작업량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다.
건조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있을 뿐이지.
100개가 많아 보였는데 아저씨가 도와준 덕분이지 벌써 50개는 했다.
1차 도색을 쭈욱 하면 그동안 말라 있기에 금방 2차 도색으로 마무리.
그 반복이었다.
시하는 이상하게 1차 도색도 깔끔한 편을 자랑했지만.
“이러면 나는 다른 작업을 해야겠다.”
“아! 여기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다 안 도와줬는데?”
“이제 일 좀 하신다는 소리 아니었나요?”
“일이 어딨어. 오늘은 쉬는 날이야.”
“???”
“솔직히 묻는 건데 저 100개 전부 계속 집에 둘 생각이야?”
“으음.”
사실 100개라는 양이 너무 많기도 하고 그렇다고 도색까지 했는데 갖고 놀기는 참으로 애매했다.
“내가 100개라고는 했지만 사실 105개쯤 주문을 넣었거든.”
“그래요?”
“그럼. 연습용 5개지.”
“아…….”
“근데 네가 한 거 빼고는 100개가 채워질 것 같단 말이지.”
저기요? 제가 한 건 왜 뺍니까! 완성품에도 안 넣어주는 거는 겁니까?!
초보치고는 잘한 편 아닙니까?!
“프라모델의 발판도 내가 준비하긴 했어.”
아저씨가 상자 하나 더 가지고 오시더니 쿵 하고 놓았다.
열어보니 진짜 발판이 있었다.
페페의 발에 맞춘 홈이 파여 있었다.
“어라? 이건?”
“내가 주문한 거지. 빙판 생각나는 발판.”
“와아.”
“일부러 육각형으로 만들었어. 그래서 집에 둘 생각이야?”
“으음. 뭐 선물해도 되고 팔아도 되긴 하죠.”
“사실 팔 생각이었지?”
“하핳. 들켰나요?”
시하의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100개는 너무 많고 놓아둘 때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일단 시하가 바라는 걸 들어준 다음에 이걸 선물이나 파는 건 어떻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기념으로 사진으로 남겨두면 되니까.
그런데 시하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이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냥 나중에라도 처리할 일이 생기면 굿즈로 판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내 설명에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하거나 그럴 거 같았어. 그래서 내가 이걸 준비했지.”
발판이야 원래 프라모델을 만들면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왜 아저씨가 따로 준비했는지 알았으니까.
“이거. 숫자가 새겨져 있네요?”
“후후후. 그렇지.”
발판의 숫자가 각각 1부터 100까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뒤통수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숫자를 세기는 게 별거 아닌 거 같지? 하지만 굿즈 장사할 때는 굉장히 필요한 일이야. 넘버 시리즈.”
“넘버 시리즈…….”
“이 숫자가 굉장히 팬들에게는 가치가 있거든? 숫자 10안에 든다. 내 숫자는 행운의 7이다. 77이다.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지.”
“그래요?”
“같은 거를 받는데 뭔가 특별한 느낌을 준단 말이야. 한정 판매의 추첨. 그런데 넘버까지 10 안팎이거나 특별하다? 이건 못 참지.”
똑같은 상품인데 숫자가 새겨지면 더 특별해진다.
과연…. 굿즈 사업은 심오하구나.
“근데 이건 대량생산이 아니라 100개만 만드는 거잖아. 그것도 특별한데 숫자까지 있으면 굉장히 가치가 뛰어나지는 거지.”
“헐…….”
숫자만 새겼을 뿐인데 굉장히 가치 있는 게 되어버렸다.
“내가 왜 작업한 걸 순서대로 놓았는데.”
“그러고 보니…….”
작업 순으로 순서대로 놓는 건가?
그렇게 물어보니까.
“맞아. 후후후.”
“거기까지 생각하시다니.”
“근데 1번은 시하가 가지고 있어야지.”
“아. 1번.”
넘버원은 확실히 만든 작가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엄청나게 지식이 늘어난 느낌이다.
언젠가 쓸데가 있겠지?
임티가 너무 잘돼서 개인적으로 굿즈를 만들어서 팔 수도 있잖아?
열심히 기억한 다음에 머릿속에 저장했다.
“흠흠. 그럼 나는 마무리 작업을 해야겠다.”
“마무리요?”
“도색이 끝이 아니야. 저대로 두면 어디 부딪치거나 긁히면 칠이 벗겨진다고. 피막 작업해야지. 스프레이를 뿌릴 거야.”
“아…….”
보호하는 작업까지 해야 마무리하는구나.
아저씨가 스프레이를 뿌렸다.
치익. 치익.
“형아. 시하 이제 쉴래!”
“응? 그래. 많이 쉬어.”
셋이서 50개 넘게 했으니까 쉬긴 해야지.
엄청 작업을 많이 했다.
“시하야. 근데 여기 와서 발판 봐봐.”
“발판?!”
“이거 빙판 같지?”
“!!!”
시하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빙판 같은 느낌이라서 손으로 열심히 비벼본다.
“안 미끄러어.”
“그건 당연하지. 진짜 빙판이 아니니까.”
“안 차가어~”
그 정도로 정밀도로 올리고 싶으면 진짜 빙판을 가지고 와 깎아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얼음이라도…….
“그래도 좋지?”
“조아!”
“근데 시하야. 이거 다 만들고 사진 하나 찍자. 그리고 100개는 다 집에 둘 거야? 누구 나눠주고 팔지는 않고?”
“아?”
시하는 살며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웅.”
아무래도 새로운 선택지를 주니 갈팡질팡하는 것 같다.
“사실 100개 집에 다 둬도 돼. 시하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건 형아의 선물이지만 시하가 만든 거기도 하니까.”
시하는 눈을 깜빡 떴다.
“시하 형아 가치 하고 시퍼! 시하도 선물 주고 시퍼. 형아랑 가타!”
“근데 어린이날 선물을 어린이가 주는 건 이상하지 않을까?”
“아? 안 이상해. 시하 형아 동생이야. 형아랑 가타!”
이게 무슨 논리야…. 대체 형아 동생이라는 위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아 동생이 대체 뭐길래…….
뭐, 내가 선물해 주는 것을 따라 하고 싶은 거 아니겠나.
하여간 귀엽다.
“그럼 여기 1번 발판만 남기고 다 선물하거나 팔까?”
시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역시 하나만 남기고 다 파는 건 좀 싫겠지?
50개는 남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
“응? 뭐라고?”
시하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뱉는다.
“…서이.”
“응? 세 개 남기자고?”
“아냐. 서이 발판.”
아…. 1번보다 3번이 좋은 거냐?!
서이를 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