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5화 (305/500)

305화

영상의 제목은 [개화(開花)].

거기에 맞게 서수현이 준 음악 하나가 꽃잎을 활짝 피웠다.

영상 시작을 알리는 하얀 백지.

검은 펜은 겨울을 상징하는 눈을 지우듯이 빠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하페페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번 주제는 꽃입니다. 예? 또 페페냐고요? ㅠㅠ]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페페는 사랑입니다.]

[오늘은 어떤 그림이 나올지 한번 지켜보시죠. 여러분들을 위해 꽃놀이를 준비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그림은 화면에 4등분으로 페페 4마리가 동시에 그려지는 연출을 했다.

실제로는 하나, 하나 새 레이어에 따로 그려서 녹화한 거지만 시혁은 그 장면을 하나로 모았다.

그렇게 해야 이 그림이 가지는 숨겨진 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하지만 뭐든 영상에는 의도가 숨어있는 법이니.

이왕 영상으로 올리는 거 충분히 활용하면 더 좋을 듯싶었다.

[‘인간’은 저마다 꽃 한 송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페페의 배에 문양이 그려진다.

[하지만 스스로 피워내기에는 쉽지 않죠.]

색이 더해지며 그림이 완성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살아갑니다.]

마치 종이접기를 하듯이 4등분 된 화면은 세로로 접힌다.

페페가 두 마리가 되었다.

화면이 아래위로 2등분으로 보이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맺는 유대]

그리고 가로로 접힌다.

화면은 하나가 되었다. 그림이 합쳐져서 그런지 하나의 페페는 머리가 땅에 나머지 하나는 하늘에.

[인간과 인간이 겪는 갈등]

다시 한번 접히더니 땅에 머리가 있는 페페의 얼굴이 올라왔다.

배에 한 송이 꽃문양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

그래서 영상의 제목은 [개화(開花)]였다.

어떤 개화인지는 이미 편집의 연출로 모두 설명하고 있었다.

시혁은 시하가 그린 그림에 ‘이야기’를 부여함으로써 더욱 특별하게 했다.

퍼즐이 가지는 재밌는 놀이에 꽃이 활짝 필 수 있도록 이야기라는 양분을 넣었다.

어쩌면 그냥 오! 합쳐지니 꽃이 나오네! 하고 신기하기만 할 뿐인 영상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막과 음악을 넣으면서 뭔가 의도를 더 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꽃 한송이를 품은 페페의 손 위로 [구독]과 [좋아요]의 푯말 두 개가 양손에 뿅 하고 생겨났다.

-처음에 꽃이 어딨지? 펭귄만 있는데 했는데 와ㅋㅋㅋ

-숨어 있었네ㄷㄷㄷ

-시하페페 진짜 대단하다!!!

-나는 그림 접히고 합쳐지면서 나오는 자막에 소름

-22222

-영화까지 노리는 연출!

-그건 너무 과장된 거 아님?

다들 이번 영상을 너무 좋아했다.

하지만 역시 장문의 글을 남기는 해석가가 존재했으니.

[역시 시하페페! 따뜻한 글을 남기는구나.

다들 그냥 보고 있겠지만 난 다 알았다구!

저번 영상은 봄이 왔구려!

그리고 이번 영상은 개화!

이를테면 에필로그 같은 느낌의 마무리지.]

그런 거 아니었다.

그냥 캠핑 가서 꽃 친구들을 보고 떠오른 영감이었다.

전의 영상 그림과 상관이 없었다.

[얼굴 모를 새들이 단 하나의 꽃을 피워내기까지 많은 유대와 갈등이 있었다는 거야!]

전혀 관련이 없다.

[와 진짜! 대단해! 드디어 시하페페의 ‘연작’인 건가!

이어서 그리는 시하페페의 그림!

다들 왜 눈치를 못 채는 거야!]

전혀 연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듯하다면서 답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픽시브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시하페페의 연작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해석가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

4월 중순.

해오름 동아리가 연극 하는 날이 왔다.

고맙게도 첫 공연에 초대받아서 시하랑 구경하기로 했다.

기대되었다.

시나리오는 다 읽었지만,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텍스트로 상상하는 것.

배우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것.

그 재미의 간격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있겠지? 글이 시각화된다는 감각은 대체 어떤 것일까?

홍보 영상에서 잠깐 봤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실제로 내가 썼던 파트를 눈앞에 보고 느끼고 싶다.

“시하야. 연극 재밌겠다. 그치?”

“형아는 안 해?”

“응? 나는 연기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못 해.”

“아냐. 형아 잘해.”

그래. 네 눈에 내가 뭐든 잘하는 거로 보이겠지. 레드 형아니까.

사실은 잘하는 것도 있고 못하는 것도 있는 거지만.

“시하야. 봐봐. 여기 포스터네.”

“시하 포스터!”

극장 입구에 포스터가 붙어 있다.

시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포스터를 올려다보았다.

“형아. 신기해. 시하 포스터 이써.”

“그러게.”

자신이 그린 그림이 연극의 홍보할 포스터로 붙여져 있으니 신기하겠지.

주변 사람들도 연극을 보러왔는지 포스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거 진짜 잘 그렸지 않아?”

“단순한데도 명확한 의미가 있긴 하지.”

“예고편 보고 포스터 나오는 거 봤는데 꼭 보러 가고 싶더라.”

나는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하 포스터 보고 연극 보러 올 생각했다던데?”

“정말?”

“응. 시하 좋겠네.”

우리는 기대감을 안고 극장에 들어갔다.

자리는 앞자리를 마련해둔 모양이라 거기에 앉았다.

관객들이 꽉 채워져 있었는데 첫 공연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처럼 초대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보길 잘한 거 같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퉁.

불이 꺼진다.

“시하야. 시작한다.”

“형아. 쉿. 여기서 조용히 해야 해.”

“푸흡. 우리 시하 잘 아네.”

“시하 다 아라.”

무대의 불이 켜졌다.

예고편처럼 자금의 수급이 나오며 시대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발성이 좋은지 소리도 귀에 잘 들렸고 의외로 표정도 잘 보였다.

뒷자리였어도 재밌게 볼 수 있었겠다 싶었다.

‘흥미롭네.’

일련의 아는 흐름대로 연극이 진행되는데 남주와 여주의 비중이 6:4 정도는 되어 보였다.

특히 여주가 가진 정보의 부분에서 어떤 디테일이 더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보통 13시경에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이 일상입니다. 은밀하게 만나는 여성이 있고요. 외도를 하는 중입니다.”

여주 유은미가 장교의 은밀한 사생활부터 세세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책상에 종이를 펼치더니 무언가 그리는 시늉을 한다.

“미나모토 장교가 사는 건물. 1층, 2층, 3층은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종이를 들며 세트장에 마련된 칠판에 종이를 붙였다.

놀랍게도 책 2권 분량에 건물의 설계도까지 전부 세세하게 들어 있었다.

거길 지키는 인물들 배치와 돌아다니는 루트까지.

“사살하려면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명확히 이쪽에 걷도록 유도해줄 사람을 심어둬야 하며 정확히 방아쇠를 당길 대담함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도망칠 루트는….”

그녀가 그 일대의 지도를 단순히 그린 뒤에 빨간펜으로 그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잔인한 선고가 떨어졌다.

“죽어야 합니다. 그럴 기백을 가질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말에 한 남자가 반박했다.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지.”

“???”

“김주혁이.”

남주의 이름이 말해진다.

불이 꺼지고 다른 장면으로 바뀐다.

김주혁과 유은미는 다시 만나게 되고 헤어진다.

계획은 사살에 성공하지만 결국 도망에 실패했다.

김주혁이 과감하게 턱 아래에 총을 갖다 댄 뒤에.

불이 꺼졌다.

그는 살아남지 못했고 화려하게 사망했다.

그녀는 살아남았고 조용히 숲을 밝혔다.

[그리고 1990년.]

내레이션이 한 번 나오고 불이 켜지며 김주혁과 유은미가 나온다.

벤치 의자에 앉아 있는 유은미 옆으로 김주혁이 다가온다.

저벅저벅.

‘환생한 건가?’

사람 하나 들어갈 사이의 간격을 벌리며 앉는다.

둘의 시선은 관객을 보고 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김주혁이 말한다.

“봄이 왔구려.”

“네?”

“꽃들이 가득해서 좋소.”

“아…….”

유은미가 별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이 코웃음을 친다.

김주혁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꽃구경 좋아합니까?”

“아니요.”

“그럼 여기 왜 있는 거요?”

“사람들 얼굴이 활짝 펴 있어서요. 꽃보다는 그게 더 좋아서. 근데 저 아세요?”

왜 자꾸 말 거냐는 얼굴로 유은미가 김주혁을 쳐다보았다.

김주혁은 털털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모르오.”

“네?”

“예전에는 알았을지도.”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감지했는지 유은미가 먼저 자리를 떴다.

김주혁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먼저 내리는구려. 그러면 됐소. 잘 도착한 거 같으니.”

그가 일어서자 무대 옆에서 천이 하나 내려왔다.

손으로 걷으며 걸어 들어간다.

“같은 역에서 또 봅시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김주혁의 말투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건가?

시나리오 뒷부분이 바뀌었다.

김주혁은 1990년대를 한 번 보았고, 두 번째로 들어가 본 것이리라.

‘마지막 장면은 분명 환생한 두 명이 만났던 거로 기억하는데 바뀌었네. 이래서 꼭 왔으면 했던 건가?’

연극이 끝났다.

배우들이 나와서 인사를 한다.

짝짝짝.

나와 시하는 열심히 박수를 보냈다.

멋진 마무리였다.

***

해오름의 연극은 순풍에 날개를 단 듯이 잘되어 가고 있다.

봄에는 연인들 간의 로맨스나 코미디가 있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잘나가고 있나 보다.

그리고 은근히 김주혁과 유은미의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캐치하는 것도 있었다.

두 사람은 동료애로 표현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유은미는 모르겠는데 남주인 김주혁은 확실히 좋아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천을 걷어 걸었던 이유는 유은미가 벤치에 앉아 있었으니까.

처음 미래를 봤을 때는 들어가지 않았으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기차 장면이랑 오버랩되는 느낌이 좋았지.’

같은 장면이지만 전혀 다른 상황이 은근 웃음을 자아냈다.

감탄과 함께 말이다.

“시하야. 뭐 해?”

“아?”

의자 두 개 위에 이불이 덥힌 아지트.

거기서 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온다.

연극을 본 뒤로 그게 멋졌는지 이러고 놀고 있다.

“형아. 지금 미래야.”

“아닌데?”

“아냐! 미래야!”

“응. 그래. 미래라고 하자.”

시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시하 어디써?”

“응?”

“커진 시하 이써야 해.”

“얼마나 커졌는지 모르겠는데?”

“서이!”

“3년이면 7살인데?”

“아냐. 더 커써.”

아직 더하기를 배우지 않았지 참.

“흐음. 많이 커서 지금 학교로 갔어.”

“학교!”

“근데 이 꼬마 시하는 어디서 나타났을까? 형아의 시하는 이제 대학교 다닐 정도로 컸는데.”

“!!!”

시하가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다가 손짓을 한다.

나는 거기에 맞춰서 귀를 가까이 대어주었다.

“형아. 비밀인데.”

“응. 응.”

“하늘에서 이불이 내려와써.”

“그렇구나.”

“빨래해서 조은 냄새 나써.”

“빨래한 이불이었구나?”

“그래서 아코 해서 이불 더어! 해서 벗어써.”

“그렇구나.”

“여기에 와써.”

“오오오!”

하늘에서 빨래한 이불이 떨어질 경우도 별로 되지 않는데 하필 시하 머리에 와서 미래로 보냈다니.

엄청난 상상력이구나.

“그래서 지금 시하는 몇 살?”

“너이!”

“와! 네 살 시하는 정말 오랜만에 본다!”

나는 시하를 높이 안아 올렸다.

시하가 신이 나는지 팔을 파닥거렸다.

실제로 과거에서 시하가 오면 진짜 신기할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시하가 언제 애를 나았지?! 하고 의심부터 할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누구냐!

“형아. 시하 어디 학교 가써?”

“응? 형아처럼 강인대학교 갔지.”

“형아랑 가타!”

대학생이 돼도 ‘형아랑 가타’라니. 이 설정은 좀 무리수 아닌가?

“그리고 과는 어디냐면…….”

그때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백동환이 있었다.

“백동 형아!”

“응? 시하야. 안녕.”

“백동 형아. 안 놀라?”

“어? 뭐가?”

“시하 네 살이야!”

나는 어리둥절한 백동환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환아. 많이 놀랐지? 시하는 대학생인데 왜 여기 4살 시하가 있는지.”

백동환이 입을 열었다.

“형님. 어디 아프신?”

뒤진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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