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그림을 자세히 보자. 여전히 페페가 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배에 있는 검은 문양이다.
무엇을 그렸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특이한 검은 반점이라고 보면 될까?
“시하야. 이게 뭐야?”
“이거야. 이거.”
시하가 패드를 잡더니 휙휙 다른 그림을 보여주었다.
똑같이 정면에서 본 페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총 네 개였고 배에 다른 검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도 모르겠다.
“으응?”
“형아. 바바. 친구 만드러써.”
“친구?”
“꽃 친구.”
시하가 페페 하나를 세로와 가로로 점선을 그려서 4등분 시켰다.
다른 페페도 마찬가지.
그려진 순서로 시계방향으로 퍼즐을 맞춰서 모아보니.
“어?”
각각 페페에게 있던 문양의 4조각들이 합쳐지며 꽃이 나타났다.
검은 반점은 이 꽃 모양이 나오는 비밀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와아.”
대체 이걸 어떻게 생각한 거지?
4마리를 합쳐야 비로소 보이는 꽃 한 송이.
그래서 시하가 친구들을 만들었다고 했구나…….
영감은 아마 어제 꽃을 코팅한 것에 비롯된 것이다.
이 검은 반점으로 숨기는 건 어디서 힌트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하야. 대박이네. 넌 천재야!”
“시하 형아 담아써.”
“담긴 어디 담니? 닮았다겠지.”
“아아. 형아 담아서 똑똑해!”
자꾸 나를 어디 담는 시하였다.
아무튼, 이걸 영상으로 올리면 다들 난리가 날 것이다.
어떤 반응일지 이미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시혀기 형아. 나도 다 그렸어!”
“하나두! 하나두!”
승준이가 아지트를 그린 모양인데 텐트처럼 안 보이고 뭔가 이글루 같은 느낌이다.
이거 이글루도 아니고 그냥 동굴 입구 아닌가?
“우와. 승준아. 진짜 잘 그렸네! 완전 아지트랑 똑같아! 아니, 업그레이드됐어!”
“헤헤헤!”
어느새 뒤에 온 백동환이 다운그레이드 아닌가? 하는 말이 들렸지만 나는 다리를 찰싹 때리는 것으로 제압했다.
다음은 하나였는데 역시 예상대로 나무에 꽃들이 잔뜩 있다.
벚꽃처럼 작은 꽃잎들이 피어 있는 게 아니라 큼지막한 꽃들이 여러 개다.
“우와! 하나야. 꽃들이 정말 크네! 진짜 강조하면서도 잘 그렸어! 역시 하나네!”
“헤헤헤!”
뒤에서 백동환이 나무가 아니라 꽃다발 같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조용히 해! 원래 그림은 강조하고 싶은 걸 일부러 크게 그리는 법이야!
옛날부터 쓰이는 그림의 강조법이라고!
“그럼 나도 보여줄게. 바로 하늘과 구름!”
“아?”
“앗! 시혁이 형아. 구름이 왜 성처럼 생겼어?”
“왕자님이 사는 구름이야?”
백동환이 ‘하울의 움직이는….’까지 말하자 손바닥을 입을 막았다.
“넌 조용히 해.”
“넵!”
“자, 구름이 꼭 거품처럼 둥글둥글한 모양은 아니잖아. 여기 성 같은 구름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렸지.”
사실 그냥 구름을 그리려다가 색칠할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큰 성을 테두리만 그리고 색칠했다.
솔직히 그리는 것보다 색칠하는 게 더 귀찮다는 걸 사전에 깨달아서 이렇게 그린 것이다!
물론 말만 번드르르하게 포장한 거지만.
“형아. 대다내! 구루미 성이야!”
“역시 시혀기 형아야. 근데 여기 누가 살아?”
“하나가 마출게! 왕자님이랑 공주님이야!”
“정답! 왕자님과 공주님이 살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부하인 신하들도.”
신하가 부하라는 말은 조금 그렇지만. 아무튼, 애들의 눈에는 부하가 맞긴 하지.
사실 이렇게 대단하다고 해주는데 양심이 콕콕 찔린다.
얘들아. 사실 그냥 귀찮아서 빨리 그리고 치우려고 했어. 미안해.
“형아. 이거 여기에 너어져.”
시하가 패드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고 보니 배경화면으로 해준다고 했었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시하는 내 그림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럼 형아가 사진 찍어서 전송해 줄게. 알았지?”
“아아.”
나는 패드에 배경화면으로 세팅했다.
생각해 보니 좀 더 열심히 그릴 걸 그랬다. 괜히 배경화면으로 하려고 하니 퀄리티가 너무 부끄러워!
그것보다 볼 때마다 양심에 너무 찔릴 것 같아!
“형님.”
“응?”
“이제 갈 때가 되었습니다.”
“뭐? 2박 3일 하는 거 아니었어? 지금 치우러 가야 해?”
“아니요. 집에 가자는 거 아닙니다. 형님이 시하입니까? 그런 오해를.”
“야! 말 다 잘라놓고 말하는데 내가 알아듣냐?”
“그럼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퀴즈가 되어버렸다.
아이들도 눈을 빛내며 내 옆에 앉아 백동환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는 사실 캠핑하는 사람들을 노리고 만든 건 아닙니다.”
“뭐, 그렇긴 하지.”
“정확히는 가족들을 노리고 만들었죠.”
캠핑카들이 바닥에 붙박이처럼 붙어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래서?”
“주변이 온통 벚나무 아닙니까. 봄 끝나면 장사가 잘 안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 가족끼리 왔는데 벚꽃 보고 땡이면 너무 심심하지 않습니까.”
“바베큐도 먹잖아?”
“그건 기본이죠. 자, 그렇다면 문제입니다. 과연 여기에 어떤 시설이 하나 더 있을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캠핑카를 내가 예약할 걸 그랬다.
백동환이 다 해준 덕분에 편하게 오긴 했는데.
돈만 보내 달라고 했었지.
각각 가족끼리 예약하기는 번거로울 거라면서.
“나! 나!”
승준이 손을 번쩍 들고 자기가 말하겠다고 했다.
백동환이 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커장!”
“땡! 사커장이라니…. 물론 여기에 만들면 좋긴 하겠다만.”
아주 승준스러운 답변이었다.
“하나가 마출래! 정답은 노래 부르는 무대가 이써! 아이돌도 와!”
“그러면 여기가 맨날 손해를 보지 않을까? 뭐 노래 연습하기는 좋을지도?”
“응?”
매일 아이돌 부르고 공연하면 행사비가…….
응? 노래 연습하기 좋을 거라고?
“시하 아라써.”
“응? 시하는 어떤 거?”
시하가 자신 있게 일어섰다.
뭐라고 답할지 정말 궁금하다.
“여기에 꽃 마나.”
“응. 그렇지.”
“구래서 샴푸 만드러. 샴푸. 시하 바써. 샴푸에 꽃 그림 이써써.”
우리 집 샴푸에 꽃 그림이 있긴 하지. 근데 설마 이게 정답이겠니?
“오오. 비슷해.”
“비슷하다고?!”
“아마도요?”
“흠. 비슷하다라. 어? 설마? 목욕탕?”
“맞습니다! 여기에는 목욕탕뿐만 아니라 찜질방도 함께 운영하고 있죠! 거의 코스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백동환 너 이 자식!
캠핑 갬성 말고 가족들도 생각해 줬구나!
언젠가 죽여버린다고 한 거 취소해 줄게!
***
그런 의미로 찜질방에 도착했다.
어린이용 찜질방 옷을 입히는데 너무 귀여웠다. 뭐야. 원래 이렇게 귀엽고 앙증맞은 옷이었어?
“형아. 반팔, 반바지야. 시하 다 아라.”
“그래. 똑똑하네.”
“이거 열세야. 띡 하고 찌그면 문 열려.”
“역시! 시하는 다 아네!”
그거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거다.
그래도 이렇게 자랑하고 있으니 너무 귀엽다.
승준과 하나도 갈아입고 왔는지 도도도 달려왔다.
“시혁이 형아!”
“시혀기 오빠!”
“둘 다 그렇게 뛰면 넘어진다?”
쌍둥이가 시시덕 웃는다. 대체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찜질방에 왔으니 선배 노릇 좀 해볼까.
“시하야. 찜질방에 오면 꼭 해야 하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알아?”
“시하 아라.”
“!!!”
“양머리 해야 해!”
“어, 어떻게 알았어?!”
“시하 가다가 드러써. 양머리 해야 해~ 해써.”
그렇군. 벌써 누군가의 가족에게 다 들었나 보다.
“그럼 어떻게 만드는지도 알아?”
“아니.”
“그럼 같이 만들자.”
애들을 데리고 수건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종이접기처럼 3등분으로 접은 다음에 양 끝을 말기 시작했다.
“짜잔. 양머리 완성!”
“형아. 시하도 완성해써!”
“오오오! 잘했네!”
“이거 어떠케 써?”
“푸흡.”
가장 근본적인 의문에 도달했나 보다.
그렇지. 아직 쓰는 법을 모르는 구만.
“이렇게 여길 벌려서 시하 머리에 쓰지요.”
시하의 머리에 쏙 넣어서 귀에 양머리가 안착했다. 으아! 너무 귀엽잖아!
“시혁이 형아. 나도!”
“하나도! 하나도!”
“시하도!”
“???”
시하야. 너는 양머리했잖아?
일단 하나랑 승준이도 양머리를 씌워준 다음.
“형아. 시하가 만든 거 써.”
“응. 고마워.”
근데 시하가 만든 것은 자기 머리에 맞췄기 때문에 다 들어가지 않아서 다시 만들어야 했다.
아무튼, 우리 넷은 양머리를 하게 되었다.
“사진 찍자!”
이건 솔직히 기념으로 남겨야 해.
아이들의 양머리는 귀하지! 우리는 각자 한 명씩 사진을 찍은 다음에 단체 사진도 찍었다.
나도 모르게 텐션이 올랐는데 승준 엄마랑 오상환 교수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저기 교수님? 찜질방 오자마자 텐션이 급격히 낮아지셨는데요?!
캠핑의 갬성이 없는 공간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형아. 이제 어디가?”
“가고 싶은 곳 있어?”
“저기!”
시하가 가리킨 곳을 보니 [지옥의 불가마!]라고 적혀 있었다.
엄청 더워 보이는데…. 괜찮으려나?
“저기 엄청 뜨겁데. 지옥이래. 지옥.”
“지옥 모야?”
“응? 어~엄청 뜨거운 불이 있는 곳이야.”
“불놀이 위험해! 조심해야 해.”
“응. 근데 진짜 불이 있는 건 아니고…….”
“아?”
“일단 가볼래? 엄청 더운 여름이 사는 곳이야.”
“여룸이?!”
오히려 그 말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나 보다.
후회해도 난 모른다.
내 생각에는 어차피 문 열면 뒤로 도망갈 것 같다.
“문 연다.”
“형아. 시하 준비해써.”
“나도. 나도.”
“하나도 마음 단단히 먹었어!”
그 정도까지 해야 해?!
시하의 준비는 귀 양쪽의 양머리를 잡고 있는 거였다.
승준은 주먹을 쥔 체 도전적인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상의 끝을 꽉 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진짜 지옥에 들어가는 줄 아는 거 아니겠지?
그런 의문을 가지며 문을 열었다.
후끈후끈.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때렸다.
아이들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들어갈까?”
“아?”
시하의 동공이 떨렸다.
아무래도 들어가기 무섭겠지.
“여룸이 혼자 있고 시퍼 해. 이거 지켜져야 해.”
“갑자기?!”
“여룸이 더우니까 부트면 안 대. 그래서 혼자 이써야 해. 시하 딴 데 갈게.”
“꽤 논리적이기는 하네!”
언제부터 그런 논리를 펼칠 수 있게 된 거야.
여름에 붙으면 더 덥긴 하지.
그때 승준이 용기 있게 들어갔다.
발을 살짝 댔는데 그대로 후다닥 물러났다.
“으악! 엄청 뜨거워!”
“으엑! 하나는 무서어! 더어!”
하나가 옷 끝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나는 여기서 더 장난을 치고 싶었다.
반응이 너무 재밌으니까.
“그럼 형아는 들어갔다가 올게. 동환아. 애들 잘 보고 있어.”
“맡겨 주십쇼.”
나는 쏙 들어갔다.
시하가 아연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형아?”
문이 닫힌다.
얼굴만 간신히 보이는 둥근 창으로 아래를 내려봤는데 시하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문에 찰싹 붙은 거 아닐까?
“뜨거.”
문도 좀 뜨겁긴 해. 근데 못 견딜 정도는 아니고.
백동환이 다시 문을 열었다.
“형아! 빨리 나와. 여룸이 혼자 있고 시퍼 해.”
“아니야. 여룸이 말 상대하는 거야.”
“아? 아냐. 시하 말 상대해. 형아 시하 말 상대.”
“푸흡. 알아써. 한 번 형아 품에서 들어와 볼래?”
나는 시하를 안고 안으로 살짝만 들어갔다.
시하가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형아. 여룸이 너무 뜨거.”
“푸흡. 다시 나갈까?”
“아아.”
그렇게 지옥의 불가마 체험이 끝났다.
그래도 너무 뜨거운지 안에 사람이 없긴 했다.
여기 들어가는 사람이 있긴 하겠지?
“동환아. 여기 들어가 봐.”
“근손실 옵니다.”
“진짜?”
백동환이 눈을 살며시 피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옥의 불가마는 힘들지?
“형아. 딴 데 가자.”
“응. 이번에는 진짜 조금만 따뜻한 곳으로 가볼까?”
아이들이 끄덕거렸다.
뭐, 어쩔 수 없이 아이들도 즐길 수 있는 뜨끈뜨끈한 곳으로 들어가 보자.
온도가 그나마 제일 낮은 곳에 들어갔다.
“시하야. 그거 알아?”
“아?”
“여기는 모래시계 다 떨어질 때까지 나가면 안 된다?”
“!!!”
이제 난 틀렸어! 장난을 멈출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