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남자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내가 왜 이 가게 물려받아야 하는데!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이 자식이.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
“그럼 나 학교는 왜 보냈는데! 어차피 국수나 말고 있을 건데.”
“너 무시당하지 말라고 보낸 거잖아. 너 생각해서. 그리고 국수 마는 일이 왜! 아버지는 너희들 먹고 자는 거 이거로 키우고 있다.”
소년이 아버지를 한차례 노려보더니 그대로 문을 열며 뛰쳐나왔다.
앞을 보지 않았기에 한 남자와 어깨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에이씨!”
“저, 저거! 부딪쳤으면 사과라도 해야지! 에잉. 쯧쯧. 미안하게 됐수다. 애가 아직 어려서.”
남자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흔한 부자의 상황이라 개의치 않는 것이다.
“아들에게까지 얼굴을 모르게 하는 것 같소.”
가게 주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펴졌다.
“알 필요 없지. 이건 어른들의 일이니. 아이들은 희망찬 미래만 꿈꾸면 되는 거 아니겠나.”
“그것도 그렇군요.”
“국수 하나 시원하게 말아드리리다.”
“그래도 아는 게 좋을 텐데.”
“나는 내 대에서 끝나길 원하니까.”
주인이 국수를 들고 오면서 반찬 대신 두툼한 흰 봉투를 놓는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품 안에 넣는다.
“사실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인데 말이지.”
“우리는 얼굴이 없으니. 당신도 그렇잖아.”
“내 얼굴은 조국이요.”
“나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내 자식의 얼굴은 개나리같이 웃음 핀 조국이었으면 해.”
“그거 좋구려. 언제나 감사하오.”
그가 국수를 한 그릇 뚝딱 먹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살짝 열면서 말한다.
“얼굴은 없더라도 나만은 기억하겠소.”
“거 영광이구려.”
그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읊었다.
[얼굴 없는 새들은 지천에 깔려있는데 웃음꽃 하나 피우기 힘들다.]
[언젠가 봄이 오기는 할까?]
[독립 자금을 수거하러 가는 발걸음이 너무나 무겁구나.]
[정처 없이 걷는 것만 같아서.]
장면이 바뀐다.
한글로 된 간판과 한국인의 얼굴들이 길가에 쉴 새 없이 지나간다.
갑자기 시대가 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정신이 돌아온 남자는 눈을 껌뻑인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인가?”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부정했다.
“공기는 텁텁하나 그건 헛것이 아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
무언가 미몽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이었다.
거기서 장면이 바뀌고 시혁이가 구성한 기차의 대사가 오갔다.
“이리 생각이 어수룩해서야.”
“뭐요?”
“그러니 화려하게 타오르려 하지. 난 조용히 타닥이겠소.”
“내가 지켜줄 필요도 없었나 보오. 그리 자신 있는가 보면.”
“서로 갈 길 갑시다. 어차피 다른 길이니.”
“종착역은 같을 거요.”
“다르던데…….”
여자가 숨긴 정보를 말하려고 하는 부분에서 다시 화면이 바뀌며 연극 포스터가 나온다.
그림자처럼 검은 사람 둘.
남자는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에 이어져 있고, 여자는 조용히 타닥이는 불꽃에 이어져 있다.
자막으로 큼지막하게 예매시간과 공연시간이 나오며 영상이 마무리되었다.
-와 뭐임? 미래를 본 거임?
-저리 보고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궁금하네.
-근데 여자가 정보들 어디다 숨겼음? 궁금하게 하고 끊네 ㄷㄷㄷ
-궁금하면 와서 보라는 거지. 나는 거기서 한숨 쉬었다. 이게 나오지 않네.
-거의 아침 드라마급이네 ㅋㅋㅋ
다들 여주가 정보를 어디다 숨겼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포스터의 이야기도 댓글이 달렸다.
-마지막에 포스터 뭐임? 소름 돋는데? 얼굴 없이 일부러 그렇게 그렸네ㄷㄷㄷ
-나도 거기서 소름 쫙 돋았음.
그냥 어두운 이시혁을 시하가 보고 떠올린 것뿐이다.
얼굴 없는 모습을 일부러 노리고 그린 것은 아니었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거랑 조용히 타오르는 거 불꽃 크기 다른 것도 소름ㄷㄷ
그냥 이시혁의 까치집을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까지 알 수 없으니 감탄만 하고 있었다.
-와. 근데 배경음도 좋지 않음?
-그거 밑에 출처 있던데? 듣고 왔는데 노래도 있음.
***
캠핑 이틀째.
시하와 나는 아침밥을 먹고서 함께 홍보 영상을 시청했다.
밤에도 봤지만 정말 잘 만든 것 같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사람들도 완숙하게 해내는 느낌이다.
“시하야. 다들 잘하지?”
“잘해. 재미써.”
“시혀기 형아는 연극 안 해?”
“시혀기 오빠도 잘하는데!”
너희들 내가 연기하는 거 보지도 않았잖아?
무슨 근거로 이런 소리를 하나 싶다.
“형아 연극 잘해. 시하 바써. 또 파바박 해써.”
여기 근거의 편린이 보였다.
범인은 이시하였던 게 틀림없다.
연극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를 애들에게 이야기했을 것 같다.
“으음. 나는 여기서 이렇게 한글 자막을 달았어. 물론 다른 언어 자막도 달았지만.”
내 연기 실력은 스르륵 넘어가도록 하자.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랑 비교하면 연기의 연 자도 모르는 수준이니까.
“형아. 대다내! 글자 나와!”
“시하야. 읽을 수 있어?”
“아니! 시하 나중에 잘 일거. 시하 스티커 마니 부치고 이써.”
“그건 그렇지.”
스티커 학습지가 재밌나 보다. 물론 공부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하가 붙일 때마다 옆에서 발음하면서 읽어주고 있긴 하는데.
“자. 그럼 우리 아지트까지 산책할까?”
아이들이 좋다고 일어났다.
아지트를 하루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그리고 어제는 밝을 때 벚꽃길을 걷지 못했으니 또 다른 느낌을 줄 것이다.
근데 확실히 이틀째가 정말 즐기기만 하는 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왠지 좀 더 편하게 캠핑하는 느낌이다.
어제는 뭔가 이것저것 세팅하고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너무 여유롭다.
“오늘 그림 그릴 건데 다들 스케치북을 챙겼지?”
“형아. 시하 가방에 이써.”
“그건 패드 아니야?”
“시하 패드에 그려.”
“그렇구나.”
이제 시하도 프로페셔널해졌다는 거겠지.
승준과 하나는 이미 스케치북을 준비한 모양.
“그럼 아지트로 출발!”
“출발!”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있으니까 마치 어린이집인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배경만 달라졌을 뿐 뭔가 평소랑 같구나 싶다.
오히려 이런 평범한 일상과 풍경이 봄이 아닐까 싶다.
“형아. 빨리. 빨리.”
“응. 갈게.”
신이 나는지 앞서가는 아이들을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른들은 그저 뒤에서 지켜보며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거겠지.
“아지트다!”
승준이 오랜만에 봤다는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뛰기 시작하면 같이 뛰는 법.
아이들이 아지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형아. 빨리.”
“간다~”
빼꼼 나온 시하의 얼굴이 귀엽다.
그림 그리러 왔는데 텐트 안에 들어가도 되나 싶다.
“너희 벌써 신발 벗고 들어온 거야?”
“응!”
돗자리 위에서 아이들이 방방 뛰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지트로 들어갔다.
백동환은 이미 의자에 앉아서 봄을 만끽하고 있다.
방해하지는 말아야지.
여러모로 고생했으니까.
“형아. 모 그리까?”
“봄에 관련된 거 그리면 좋지 않을까? 꽃?”
여기 꽃들이 가득하니 그거밖에 없지 않을까?
“시하 구럼 합체 꽃 그릴래!”
“합체 꽃? 아!”
어제 벚꽃 새 친구들을 만들었었지.
잊어먹고 있었는데 시하는 그게 제일 기억에 남는가 보다.
근데 풍경을 보지 않고 돗자리에 엎드려서 곧바로 패드를 이용해 그리고 있다.
근데 시하야? 그거 펭귄 아니니?
선으로 그리는 형태가 익숙한데?
“시하야. 그거 페페인데?”
“합체 꽃 페페야.”
“???”
역시 꽃을 그려도 페페는 꼭 들어가야 하나 보다.
빠질 수 없는 무언가지.
“승준이는 뭐 그릴 거야?”
“나는 아지트 그릴래! 꽃잎이 아지트를 공격하는 거야.”
“우와. 대단하다.”
그거 흩날려라. 천본…. 아니다. 뭐 알아서 하겠지.
평범한 꽃 풍경을 그리는 아이는 없는 건가!
믿을 건 하나뿐이다.
“하나는 뭐 그릴 거야?”
“하나는 나무 그릴 거야. 예쁜 꽃도 그려!”
“오오오.”
제일 정상적인 그림이구만.
창의력도 좋지만 이런 정석적인 것도 좋단 말이지.
평범한 아이의 풍경화를 볼 수 있는 걸까?
물론 가지 세 개 그리고 그 위에 꽃을 큼지막하게 그릴 게 분명하지만.
“시혀기 오빠는 뭐 그려?”
“나?”
“응.”
“나는 스케치북이 없는데?”
“하나가 하나 때주께.”
하나가 진짜 스케치북을 부욱 떼서 나에게 주었다.
옆에 있는 색연필도 파란색을 빌려주었다.
“왜 파란색이야?”
“시혀기 오빠에게 잘 어울려.”
“그래?”
그때 옆에서 시하가 벌떡 일어선 게 보였다.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시하야?”
“형아! 시하가 빌려주께!”
의욕이 앞섰던 건지 펜이 내 볼을 찔렀다.
“근데 이거 없으면 시하 못 그리잖아.”
“아냐. 그려.”
“아니. 못 그릴 텐데.”
“시하가 패두도 빌려주께!”
“그거 빌려주면 시하 못 그리잖아?”
“아냐. 그려.”
대체 어떻게! 패드도 팬이 없는데 어디다 그린다는 거야? 설마 스케치북을 빌릴 생각?
“시하 머리에 다 그려써.”
그거 연극의 여주가 머리에 정보를 담고 있다는 그거 아니야?!
인상 깊었니?!
근데 머리에 그리면 다른 사람이 못 보잖아…….
“형아는 스케치북에 그릴게.”
쿠궁.
시하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멋지게 그려서 시하의 패드에 보내줄게. 배경화면으로 할까?”
“!!!”
시하가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내게서 패드를 받아들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거 녹화하고 있는데 펜이 멈췄네…. 뭐, 빨리 감기나 편집을 하면 되니까.
“형아 모 그려?”
“아, 그거 답을 안 해줬구나?”
다들 궁금한지 나를 쳐다본다.
뭐, 비밀도 아니라서 그냥 툭 말했다.
“구름.”
사실 그리기 귀찮았다.
***
파란색 색연필은 신의 한 수인 거 같다.
구름을 그리고 그 밖을 색칠하면 완벽한 하늘이 되니까.
그런데 힐끗힐끗 부담스러운 시선이 하나, 둘, 셋이 있다.
너희들 내 그림에 관심이 너무 많아! 나 초딩 그림쯤 된다고!
그림 실력이 시하 빼고 별 차이 없을 거야!
막 그렇게 미술을 전공하는 사람처럼 하늘을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네의 그림처럼 느낌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우리 시하는 다 잘하겠지만.
그림계의 스폐셜리스트일 거야. 비록 아직 임티 같은 그림체만 쓰지만! 그래도!
아직 힘을 숨긴 천재 같은 느낌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을 뿐일 거야!
‘생각해 보니 새어머니의 그림 실력은 어느 정도지? 미술을 얼마큼 배우셨을까?’
거기에 관해서는 딱히 아는 바가 없다.
그래도 대략 그런 쪽으로 전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다.
뭔가 자세히 묻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않았다.
그 당시 사실 새어머니라는 존재는 많이 어색했다.
나는 막 성인이었고, 어머니가 필요할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어머니가 이제 필요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니까.
그래서 친해질 시간을 그냥 길게 잡았었다.
이런 교통사고 같이 보낼 수 있는 추억이 짧아졌지만.
심지어 군대도 간 기간도 있어서…….
‘둘만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지기 어려웠지.’
시하가 태어났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갓난아이를 기르는 건 굉장히 바쁜 일이고 피곤한 일이니까.
그래도 시간을 가졌으면 좀 더 많은 걸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영상의 대사가 생각난다.
‘아이는 희망찬 미래만 꿈꾸면 된다.’
솔직히 대사, 상황 그리고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시하는 희망찬 미래를 꿈꾸고 있나?
나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나?
시하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고 시하마저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시대 때 아이의 환경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나 지금 부모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다만 그때가 더 암울한 시절인 건 확실하다.
비교는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으나 괜히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찬란히 희망찬 미래는 ‘지금’부터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자금을 준 아저씨도, 사살하러 간 남주도, 조용히 지원하는 여주도 그렇기에 행동한 거 아니겠나.
“형아!”
“응?”
“시하 다 그려써.”
“아, 그래? 꽃 다 그렸어?”
“아아. 페페 꼬치야.”
“발음 조심하자. 시하야.”
“아?”
나는 시하가 그린 페페 꽃을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꽃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