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꾸욱. 꾸욱.
침낭에 함께 들어가 있는 게 좋은지 시하가 볼을 밀어붙인다.
이제 붙어 있는 정도를 넘어서 뺨과 뺨이 하나가 될 것 같아.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무언가이다.
이대로면 걸을 때도 시하를 안고 가야겠지.
그런 헛생각을 하다가 승준의 말소리에 상념을 깼다.
“우와! 진짜 좋다. 아지트다. 아지트.”
“오빠. 아지트에서 모하까?”
“글쎄? 시하야. 우리 아지트를 가졌으니까 이제 여길 지키는 거야.”
시하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한다.
뺨은 땔 수 없는 거니?
“시하 형아랑 안에서 지키께.”
“나도 여기 지켜야 해. 지금은 애벌레라서 밖에 나갈 수 없는 거야.”
“마자. 하나도 나비 되려고 기다리고 이써!”
침낭이 애벌레같이 생기긴 했다.
역시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하는 생각은 비슷하구나?
근데 자연스럽게 애벌레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여기가 나비 되기를 기다리는 아지트인 거고.
“그럼 난 여기 노래를 틀고 갈게.”
백동환이 블루투스 스피커를 놓으면서 떠나간다.
둠칫. 둠둠칫.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시하의 고개가 들썩거린다.
필연적으로 뺨 역시도 비벼진다.
꾸욱. 꾸욱.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아이들은 즐거운지 아주 싱글벙글이다.
하긴 아까 설거지할 때도 노래를 불렀었지.
“시하야. 노래 들으니 점점 더워지고 있어.”
그거 오래 침낭에 가만히 있으니 그런 거 아닐까?
“마자! 시하도 열 마니 나고 이써!”
시하는 형아에게 딱 붙어서 볼 꾹꾹이 하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고양이도 아니고 말이야.
“하나는 노래로 나비가 되고 이써.”
“아악. 갑자기 지퍼 내리면 추워지잖아!”
“이제 나비가 되는 거야.”
번데기 과정은 어디 가고 바로 나비가 되는 하나였다.
승준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강제 나비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시하는 아직 나비 안 대.”
“아, 형아는 나비 되어야지.”
“안 대! 아직 아냐!”
“노래가 나를 깨운다!”
아쉽지만 볼 꾹꾹이는 이제 끝이다.
침낭을 열고 몸을 일으키자 시하는 내 등에 찰싹 붙었다.
“형아. 시하가 날개 대써.”
“합체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시하야. 날개치고는 너무 작은 거 아니니? 나 못 날 것 같은데?
“그럼 날아볼까?”
“아?”
나는 몸을 돌려 시하를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이것에 익숙한지 시하가 팔을 활짝 수평으로 뻗었다.
“시하 난다. 파닥파닥이야.”
팔을 파닥파닥 흔든다.
근데 너 날개라면서 혼자 이렇게 날아도 되니?
“와! 시혁이 형아. 나도 해줘! 나도!”
“하나도! 하나도!”
나는 시하를 내리고 다 한 명씩 해줬다.
이런 건 백동환이 해줘야 하는데. 하긴 백동환이 하면 텐트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팔에 한계가 와서 몇 번 해주고 끝이 났다.
이제 4살 된 아이들은 무거워!
“나비 됐으니까 이제 제대로 지켜야 해. 시하도 그렇지?”
“시하 형아 지켜.”
“응? 시하야. 아지트는?”
하나의 당연한 의문이었다.
지금 아지트 지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시하야.
맥락을 파악해줘!
승준은 익숙한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 안에는 노래 방어막이 있어서 안전하지만, 밖에는 위험해.”
승준이 설정을 부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건물 안은 단단해서 부서지지는 않겠지만 외벽은 부서진다는 뭐 그런 소리겠지?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시하 형아 지켜.”
그래. 고맙다. 시하야. 넌 형아만 지키면 다 오케이지?
“하나가 시혁이 왕자님 지켜줄게.”
“나도. 나도.”
어느새 나는 여기 아지트의 왕자님이 되어 있었다.
왕은 어디 가고 왕자만 있냐?
“다들 나가자.”
승준의 말에 아이들이 꼬물꼬물 신발을 신고 나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나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말렸다.
“시혁이 왕자님은 여기 있어야 해.”
“아니. 나도 나갈게. 생각해봐. 여기 가만히 있다고 적들이 날 노리지 않을까? 오히려 너희들이 옆에 있어야 안전하지.”
“!!!”
아이들이 정말 그렇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 방어막은 이미 머릿속에 지워지고 없었다.
그 설정 좀 기억해 주라. 저기 블루투스 스피커가 불쌍하지도 않니?
뭐, 기억하지 못한 덕분에 나도 나갈 수 있으니 이득이지만.
드디어 감옥…. 아니, 아지트에서 탈출하는구만!
“시혁이 형아. 잠깐만. 적이 있어!”
“형아. 위험해!”
“시혀기 오빠를 구해라!”
“…….”
이 무슨 급전개인지 아지트에서 한 걸음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 습격인가 보다.
아니, 숨은 돌리고 진행해야지!
승준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크흑. 강하다.”
뭔데? 뭐가 일어났는데?!
“승준 갠차나?”
“오빠. 엄청난 광선이 나타나써.”
뭔데? 나만 안 보여? 나만 안 보이는 거야? 나도 같이 초대 좀 해줘! 링크 좀 걸어 달라고.
“다들 조심해. 너무 빨라.”
“시하가 아픈 거 다 나아라 해주께. 다 나아라~”
“시하 의사 선생님이 다 고쳤어.”
의사가 힐러였던가?
승준은 휴~ 하면서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위험했다. 하나야. 부탁해.”
“아라써. 하나가 공격할게. 오빠가 막아져.”
아무래도 승준이 탱커 역이고 하나가 딜러 역인가 보다.
이거 내가 게임식으로 이해한 게 맞겠지?
“에잇. 에잇!”
하나가 허공에 빠르게 주먹질을 한다.
옆에서 승준이 ‘쉬익. 쉬익. 퍽. 퍽. 쉬익. 쉬익. 퍽. 퍽.’ 하는 소리를 내준다.
음향 효과도 지원되나 보다.
“형아. 아픈 거 다 나아라~”
“나 다쳤어?”
“형아 마니 다쳐써. 시하가 주사 꼬옥 해주께.”
“그래. 고맙다.”
대체 언제 나는 습격을 받은 걸까?
아직 아지트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그냥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하나야. 다 물리쳤다! 이제 안전해!”
“응. 하나가 다 물리쳐써. 시혀기 오빠. 이제 가자.”
“형아. 이제 걸을 수 이써.”
뭔지 모르겠지만 이제야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나 보다.
그래. 이제 알았어. 이게 즉석 애드리브 놀이라는 거지?!
이를테면 릴레이 소설 같은 거다.
“그럼 나가볼까!”
그때 백동환이 와서 말했다.
“형님. 이제 저녁 준비해요.”
“언젠가 널 죽여 버리겠어.”
“예?”
***
저녁 준비 시간이 금방 돌아온다.
원래 캠핑이라는 건 이런 걸까?
다행히 내가 준비한 바비큐는 금방 구울 수 있다.
백동환이 숯을 담아서 토치로 불을 내뿜는다.
아이들이 그게 신기한지 우와우와, 하면서 지켜보고 있다.
뭐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게 신기하니까.
“얘들아. 위험하니까 좀 떨어져서 봐야 해.”
“네.”
충분히 달궈졌으니 그릴을 위에 올리고 준비한 바비큐를 구웠다.
치익.
꼬챙이 꽂혀 있는 고기와 소시지들이 익어갔다.
승준 엄마가 김치찌개를 미리 끓이고 있었는지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내가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있었을 때부터 준비한 것 같았다.
오상환 교수는 아이들이 좋아할 계란말이를 만드는 중이었다.
“형아. 배고파.”
“응. 좀만 있으면 다 되니까 기다려봐.”
“아! 얘들아. 시하랑 같이 수저랑 접시 놓을래?”
“네!”
백동환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여기 코펠 밥도 다 됐습니다. 이제 푸기만 하면 됩니다.”
“얘들아. 밥 다 됐다는데 밥그릇 들고 백동환 형아에게 가.”
“형님. 주걱도 준비 다 되어 있습니다.”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되거든? 근데 편의 시설에 전자레인지도 있던데 즉석밥이면 되지 않아?”
“형님! 어떻게 그런 말을!”
“알았어. 뭔 말 할지 아니까 넣어둬.”
뭐 사실 저렇게 짓는 밥이 또 맛있기도 하니까. 여러 재료도 넣을 수도 있고.
“백동 형아. 밥.”
“응. 그래. 시하야.”
다들 밥그릇을 들고 줄줄이 섰다.
백동환이 주걱을 들어서 밥을 퍼서 시하의 손에 넘겼다.
“아냐. 더 너어.”
“우와. 시하 그렇게 많이 먹어?”
“아냐. 형아 꺼야. 형아 꺼.”
“크흑.”
시하가 내 밥부터 챙기다니. 하여간 기특하다니까.
그걸 들은 승준과 하나도 뒤이어 엄마 꺼를 챙기기 시작했다.
“하나는 엄마 꺼!”
“나도 엄마 꺼!”
둘 다 엄마를 외치는 걸 보니 오상환 교수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과연 들었을까?
“아니. 하나야. 승준아…. 아빠는…….”
캠핑에 대한 하이텐션은 어디 가고 충격받은 아빠의 모습만 남았다.
보통 엄마가 첫 번째고 아빠가 두 번째가 되는 거지.
승준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린 것을 보니 다분히 고의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를 외칠 때 아빠의 시무룩한 표정이 중독성이 있긴 하지.
괜히 장난치고 싶은 건 아들의 사랑일 것이다.
“아빠는 스스로 해야지. 어른이잖아.”
“승준아. 아빠 꺼 밥 좀 가져다줘. 아빠가 이렇게 계란말이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럼 특별히 내가 가져다줄게.”
승준이 아빠의 밥그릇을 받아왔다.
다시 한번 받아야 하니 시하는 빈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백동 형아.”
“그래. 이제 시하 꺼지? 많이 먹글 거야?”
“시하 꺼 아냐.”
“응? 승준이 꺼니?”
“아니! 백동 형아 꺼!”
“헉. 시하야…….”
백동환은 감동했다는 얼굴이었다.
우리 시하가 이렇게 기특하다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시하처럼 배를 쭈욱 내밀었다.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허리에 손을 얹으니 부끄럽다.
고기나 구워야지.
“자. 이거 내 밥이야.”
“아? 엄청 마나!”
“하하하.”
무슨 밥이 고봉밥처럼 쌓았다.
시하는 그게 신기한지 ‘엄청나!’를 연발하고 있다.
아무튼, 다 같이 이렇게 준비하다 보니 금방 식사가 차려졌다.
정말 금방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자, 바비큐도 다 됐다. 모두 먹자.”
“잘 먹겠습니다!”
시하가 꼬치를 들고 고기를 베어 물었다.
맛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아. 마시써!”
“응. 엄청 맛있지?”
“형아가 해서 더 마시써!”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니?
어린이집에서 가르쳐주는 거야?
정말 궁금하다.
“거기 중간중간에 소시지도 있으니까 엄청 맛있을 거야.”
“여기 소시지야.”
“응.”
햄과 계란말이에 고기. 그리고 김치찌개.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긴 하다. 심지어 애들이 좋아하는 게 다 들어있다.
나는 김치찌개 국물을 맛봤다.
“크으. 시원하다.”
“정말?”
시하도 내 말에 김치찌개 국물을 떠서 후후 분 다음에 입으로 가져갔다.
“시언해!”
“넌 뭘 알고 말하는 거니?”
“목욕탕 가서도 시언해 해써!”
“그랬지 참.”
그 시원해라 이 시원해는 좀 다른데?
뭐, 비슷하기는 한 것 같지만.
“근데 진짜 김치찌개는 김치가 좌우한다고 하던데 역시.”
나는 승준 엄마에게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호호호. 아니에요. 그냥 평범해요.”
옆에서 백동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진짜. 진짜 맛있습니다. 가게를 차려도 될 정도예요. 저 백동환. 30년간 김치찌개를 먹었지만 이렇게 맛있는 건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돕니다.”
“…너 30년도 안 살았잖아.”
“앞으로 30년간 없을 거라는 말이죠.”
승준 엄마는 그만하라면서 쑥스러워하셨다.
오상환 교수는 옆에서 어깨를 감싸며 내 아내라는 듯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머. 왜 이래요.”
“허허허.”
“하여간.”
음. 보기 좋네.
“형아. 시하도 서이 년 동안 이 고기가 제일 마시써.”
“그래. 고맙다. 야! 백동환. 너한테 시하가 물들었잖아.”
오상환 교수가 말했다.
“서이 년은 네이 년의 동생인가? 푸하하!”
침묵.
아재 개그에 승준 엄마는 밥이나 먹으라며 허벅지를 찰싹 때렸고, 오상환은 시무룩해졌다.
그때 시하가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시하가 아라. 시하가 아라! 티비에서 바써!”
허리에 손을 얹으며.
“네 이년!”
뭔가 예쁘게 째려보는 모습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아, 그거 뭐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아. 사극에서 봤어!
이거 아재 개그를 시하가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