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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화 (298/500)

298화

도착지에 가까워지면서 저 멀리서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보인다.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데 평소와 다르게 기분이 업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형아. 승준, 하나 아빠야.”

“응. 오상환 교수님이네.”

시하도 눈치챘는지 차 안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래봤자 보이지는 않겠지만.

근데 교수님 아주 신이 나셨구만.

전화 왔을 때는 별로 가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 때문에 물어본다는 뉘앙스가 팍팍 풍겼는데.

하지만 질문 내용만 들어보면 관심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장단을 조금 맞춰주었다.

이런 건 눈치로 간파했다.

“교수님 정말 신나 보인다. 그치?”

“시하도 신나. 신나. 형아는?”

“형아는 시하랑 있어서 맨날 신나지.”

“!!!”

시하는 감동을 했는지 노래를 크게 불렀다.

역시 여행하면 노래지.

“형아! 조아! 형아! 조아! 형아! 주세요! 더 주세요!”

그거 형아가 아니라 우유 아니니? 왜 우유송을 형아로 개사해서 불러?!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형아를 더 줄 수 있는 거야!

“형아. 없는 세상! 상상하기도 시러! 시러!”

가사가 진짜 절묘하게 맞네! 사실 아무 단어나 붙여도 말 되게 만들어놨어!

“형아가 제일 조아. 형아만 줘!”

뭔가 엄청난 노래가 되었다.

그만큼 캠핑이 기분 좋다는 거겠지.

“다 왔다. 여기에서 내리자.”

“다 와따!”

시하와 내가 내리자 벚꽃이 가득한 풍경이 보였다.

여기서 캠핑을 하며 꽃구경을 하는 것이다.

오면서 봤지만 내리면서 또 봐도 장관이었다.

유리창 너머가 아닌 생눈으로 보는 색감이 또 다르다.

시하라면 분명히 이 색감을 머리에 담아 언젠가 멋들어지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아. 예뻐.”

“이렇게 예쁜 벚꽃 보면서 맛난 거 먹으면 되는 거야.”

“조아!”

벌써 기대가 되는지 시하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팔은 만세를 하고 있다.

“형아. 빨리. 빨리.”

그때 백동환이 말했다.

“하지만 즐기기 위해서는 언제나 준비를 해야 하지!”

“모야?”

“텐트를 쳐야 해!”

“텐트 모야?”

“그건 말이지. 비밀 아지트다!”

“아지트!”

이제 시하의 눈맞춤 단어를 쓸 줄 아는구나?

아지트는 어린이가 못 참지.

저기 떨어진 곳에서 승준과 하나가 들었는지 빠르게 달려왔다.

“아지트 나도 만들래! 나도!”

“하나도! 하나도!”

이런이런. 그게 쉬운 게 아니야!

“후후후. 나도 돕지.”

오상환 교수도 걸어오면서 선글라스를 살짝 치켜들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 입가에 기대감이 가득해 보인다.

“이게 바로 캠핑의 갬성인가.”

“교수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형님! 캠핑은 어제 준비했을 때부터 ‘시작’된 거라고요!”

“시혁아. 아직 갬성이 부족하구나.”

뭔데. 뭔데 둘이 죽이 척척 맞는데?!

갬성 조금 부족해도 사는 데 문제없잖아?

아무튼, 먼저 짐부터 내린 다음에 본격적으로 캠핑 준비를 시작했다.

시하도 나를 도와준다고 내린 짐을 열심히 들고 내린 척을 했다.

“끄응!”

“무겁지?”

“형아. 시하가 여기 내릴게!”

“응.”

근데 시하야. 그거 원래 거기 내려뒀던 거 알고 있지?

이렇게 장단을 맞춰준다.

시하가 이 짐을 실제로 내릴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다가 다치면 손해다. 손해.

그때 백동환이 다가와서 시하에게 나무망치를 주었다.

근데 그 망치 호두 깰 때 쓰는 거 아니야?

“하하하. 시하야. 너에게 텐트를 만드는 영광을 줄게.”

“아지트?”

“그래. 아지트.”

“시하 아지트 만들래. 형아. 시하 가따 오께.”

“그래. 조심해서 갔다 와.”

시하가 바이바이 손을 흔들며 텐트 치는 곳으로 떠났다.

그래 봤자 바로 옆이지만.

누가 보면 아주 멀리 가는 줄 알겠다.

거기에 쌍둥이들과 승준 아빠도 있었다.

“형님. 저는 텐트 좀 치고 있겠습니다. 대충 상이랑만 펴주세요.”

“알겠어.”

나는 차에서 기다란 접이식 식탁을 두 개 꺼냈다.

펼치고 있자 승준 엄마가 다가왔다.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아! 그럼 의자 좀 펴주실래요?”

“그거야 쉽죠. 애 아빠랑 다들 텐트 친다고 우르르 몰려가서 참.”

“하하하. 저런 거 참 좋아할 나이잖아요.”

“애 아빠도요?”

“하하하.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식탁 다 펼치면 간단히 요리 좀 시작할까요? 아이들도 슬슬 배고파질 때 된 거 같은데.”

“하긴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으니 배고플 만하네요.”

“간단히 점심 먹으면서 꽃구경하는 거죠.”

일단 그늘막 아래에 식탁을 세팅한 다음에 의자도 같이 폈다.

7명이 둘러서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승준 엄마가 가스버너를 식탁 위에 올리고 냄비를 꺼냈다.

미리 뭔가 가지고 온 육수를 부으셨다.

“와. 뭐예요?”

“아! 만둣국 하려고 가지고 왔죠.”

“크으. 그럼 저는 여기 있는 거 마저 세팅하고 간단히 먹을 음식 하나 꺼낼게요.”

“시혁 씨는 뭘 들고 오셨는데요?”

“뭐, 요리할 거 많이 들고 오기는 했는데 지금은 김밥이요. 제가 싸왔거든요.”

“와아. 진짜요? 그럼 만둣국에 칼국수 면 좀 넣을까요? 제가 라면 들고 오긴 했거든요.”

말만 들어도 침이 꿀꺽 삼켜진다.

나는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그렇게 세팅을 하며 시하를 틈틈이 보는데 아주 재밌게 놀고 있었다.

“시하야. 이 나무망치로 땅땅 하는 거야.”

“시하 아라. 호두도 부서져.”

“하나는 힘냈는데 안 부서졌어.”

백동환과 승준 아빠는 텐트를 열심히 치고 있었다.

쇠말뚝을 망치로 박으면 꼭 애들을 불렀다.

“얘들아. 마무리해라.”

동환아. 동환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사람 하나 묻으라는 말 갔잖냐.

뒤처리하라고 들리는 건 착각이겠지?

그런 뉘앙스는 못 느끼는지 시하는 도도도 달려와 나무망치를 똥땅똥땅 두드렸다.

“들어가. 들어가.”

“시하야. 나도 할래.”

“하나도. 하나도.”

“승준, 하나 가치해.”

셋이서 순서대로 말뚝을 두드린다.

시하, 승준, 하나 순으로 말이다.

쪼그려 앉은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김밥을 꺼내고 텐트 치는 걸 도와줘야겠다.

“이야. 텐트 좋네.”

“형님. 어서 도와주십쇼.”

“알았어. 대충 어떻게 하는지 좀 가르쳐줘.”

“옙!”

뭔가 생각보다 텐트가 빨리 조립되는 느낌이다.

아이들도 점점 완성되어 가는 아지트에 눈을 빛냈다.

“시하야. 나 저거 어디서 봤어. 서커스야. 서커스.”

“서커스?”

“하나도 티비에서 봐써. 서커스 할 때 저런 곳에서 공연해.”

서커스 천막 같은 걸 말하나 보다.

시하는 그 단어가 뭔지 몰라서 갸웃거릴 뿐이었다.

“시하야. 서커스라는 건 으음. 사람들이 막 엄청 높이 점프하거나 하늘에 줄 타고 노는 거야.”

“해님과 달님!”

“그건 동아줄인데…….”

생각해 보니 해님과 달님이 줄 타고 놀았으면 서커스가 맞긴 하지.

“아무튼, 아지트가 완성되었습니다!”

“대다내!”

“시혁이 형아 짱이다.”

“시혀기 오빠 짱이다.”

응? 고생은 백동환과 교수님이 했는데? 마무리만 조금 도와줬을 뿐이다.

어? 이러면 두 사람이 시무룩해지지 않을까?

뒤를 쳐다 보니 두 사람은 뭔가 갬성에 빠진 체 텐트를 보고 있다.

그냥 신경 쓰지 말자.

“형아. 들어가고 시퍼.”

“응? 아! 그렇지. 들어가 볼까?”

하지만 들어갈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둬야 했다.

미리 육수로 끓인 만둣국이 다 완성되었으니까.

“다들 밥 먹어요!”

“네!”

***

라면과 김밥의 조합도 좋지만 만둣국과 김밥을 조합도 엄청났다.

칼국수 면도 풀어서 굉장히 맛있었다.

뭔가 여유롭게 구경하면서 음식을 음미할 줄 알았는데 배가 고프니 허겁지겁 먹게 되었다.

시하도 면발 하나를 입에 넣고 후루룩 소리를 내었다.

“형아. 마시써.”

“그래?”

“아아.”

“여기 김밥이랑 국물이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

“정말?”

“응.”

나는 집에서 직접 싼 김밥을 좋아하는데 특히 밥을 쫀득쫀득하게 하는 걸 제일 좋아한다.

깨와 함께 비벼진 그 밥으로 김밥을 싸면 엄청나게 맛있다.

“형님. 김밥 진짜 잘 싸시네요.”

“어머. 시혁 씨. 우리 집에 장가오실래요?”

“이시혁. 이노옴…….”

마지막에 뭔가 교수님이 이상한 말을 중얼거린 거 같은데 잘 안 들렸다.

맛있다는 거겠지?

“뭐 김밥이야 제가 어릴 때부터 자주 싸서…….”

“정말요?”

“하하하. 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갈 때도 내가 그냥 김밥 쌌다.

사들고 가면 되지 않냐고?

아침에 이렇게 많이 싸줘야 아버지도 밥을 먹지 않겠나.

뭐, 아버지가 알아서 드실 수 있었겠지만, 이것도 어린 내 고집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요리를 잘 못 하시는 것도 있었다.

“아버지가 처음해준 요리가 짜파게티였는데 아주 괴멸적이었거든요.”

“네? 어떻길래?”

“그 다들 짜파게티는 다르게 드시겠지만 아버지는 물을 조금 버린 후에 스프를 넣고 조리는 걸 좋아하셨죠. 근데 크흠. 안 그래도 검은 짜파게티가 더 검해져서. 크흠. 다 버렸죠.”

“아…….”

한마디로 너무 조려서 엄청 짰다는 말이었다.

실수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충격이 꽤 컸다.

물론 그 이후로 그런 실수를 잘 안 하시긴 했지만.

원래 첫인상이 중요한 법 아니겠나.

집에서 나의 자리를 원했던 것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요리 실력도 내가 요리를 하는 계기에 한몫했다.

“다 추억이죠. 뭐. 하하.”

어느 정도 배가 차니 여유가 생긴다.

백동환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설거지해야죠.”

“아, 맞네.”

배불러 귀찮지만 설거지는 꼭 해야 했다.

공용 설비 시설 쪽으로 가서 하면 된다고 하던데.

그때 승준 아빠가 소리쳤다.

“잠깐! 설거지는 게임으로 정하는 거지.”

“네?”

“이왕 왔는데 그냥 역할 분담을 하면 재미없잖아.”

승준 엄마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오늘따라 텐션이 아주 높은 승준 아빠였다.

“무슨 게임을 하실 건데요?”

“쥐를 잡자 게임이지.”

“그거 너무 옛날 게임 아니에요?”

“옛날 사람이 옛날 게임을 하는데 왜!”

승준 아빠는 아주 당당했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도 같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아. 지를 잡자 모야?”

“응. 지가 아니라 쥐야. 쥐. 쥐를 잡는 게임이야.”

“재미께따!”

“그래?”

일단 우리는 대충 룰을 설명해 주었다.

시작하는 사람이 쥐의 마리 수를 말하고 다음 사람이 잡았다와 놓쳤다 중 두 선택지를 말한다.

다 잡으면 전부 으악! 하면 된다.

그다음 다시 반복.

“일단 해보면 감이 잡히지. 아이들도 이제 5까지는 숫자 잘 세!”

그렇긴 하다.

아마 100도 알지 않을까?

“그럼 나부터 한다?”

“네!”

우리는 둥글게 앉아있으니 순서는 승준 아빠부터 시계 방향이다.

아빠, 엄마, 하나, 승준, 시하, 시혁, 백동.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찍찍찍.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찍찍찍. 몇 마리~”

“다섯 마리!”

잡았다. 놓쳤다. 잡았다.

그리고 시하 차례.

“아코!”

시하야. 이마 치는 건 맞는데 놓쳤다고 해야지. 아코가 뭐니. 아코가.

평소의 말버릇이 나와버렸다.

교수님은 가차 없었다.

“시하 탈락!”

“잠깐만요! 아코도 놓쳤다는 표현입니다.”

“너무 억지잖아.”

“억지라뇨. 그럼 연습 게임해요. 연습 게임.”

“크흠. 첫판 연습게임은 국룰이지.”

“시하야. 살았어.”

“휴우~”

시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귀엽단 말이지.

“다시 시작한다. 세 마리~”

잡았다. 잡았다. 잡았다.

세 마리를 잡았으니 으악을 외쳐야 한다.

“으악!”

하지만 시하는 이번에도 놓치고 말았다.

“잡아따~”

시하야. 이미 쥐는 다 잡았어!

이대로면 시하가 설거지 멤버 3인에 포함되게 돼!

승준과 하나가 재밌는지 까르륵 웃는다.

“하하하. 시하 걸렸다!”

“하하하. 시하 졌다.”

“형아. 시하 쥐 잡아써!”

아냐. 너 못 잡았으니까 자랑 안 해도 돼.

교수님이 음흉한 웃음을 보냈다.

“후후후. 시하 설거지 당첨이다.”

“잠시만요. 교수님.”

“왜? 누가 봐도 크게 틀렸어! 연습 게임으로 우기는 건 안 통해.”

나는 일어났다.

주머니에 폰을 꺼내며 당당히 흔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슈퍼패스를 쓰겠습니다!”

교수님이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이게 무슨 슈스케냐고…….”

아, 몰라! 그냥 이번 판에 시하 그냥 살려 달라고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뻔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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