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4화 (294/500)

294화

나는 시하가 그린 포스터를 보았다.

완성된 그림은 아주 심플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뭔가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이야기의 한 페이지를 모두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와. 시하야. 진짜 잘 그렸어.”

“정말?”

시하가 인물을 그리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물론 포스터에 그려진 게 인물화라고 하면 곤란하다.

정확히는 검은색 그림자라고 해야겠지.

도화지가 있으면 오른쪽에는 남자가 중절모를 쓰고 서 있다.

왼쪽에는 남자보다 키가 작은 여자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서 있다.

‘얼굴 없는’ 그림자로서 말이다.

아래로 내려가면 다리와 이어진 모닥불이 검게 칠해져 있다.

왼쪽 불은 오른쪽 불보다 작았다.

‘왼쪽은 여성이니까 대사처럼 조용히 타닥이는 걸 테고 오른쪽 불은 화려하게 타오르는 남자를 말하는 걸까?’

시하가 거기까지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반으로 잘린 불의 크기 차이가 신기했다.

그림은 모두 검은색으로 색칠되어 있었지만, 배경은 달랐다.

모닥불이 있는 바닥 쪽은 들판같이 초록색이었고 위쪽은 하늘이 생각날 만큼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이 말이다.

“여기 배경은 봄이야?”

“봄이야. 따뚜테. 형아랑 노는 날이야.”

“아, 그래?”

나랑 노는 날인 건 둘째치고 역시 배경의 색은 봄을 나타낸 것 같았다.

정말 단순히 형상만 있기에 더더욱 부각하려는 점이 확실했다.

나는 그 점에 소름이 돋았다.

시하는 역시 천재인가. 대체 어떻게 생각해낸 것일까?

그 많던 글이 이런 단순한 그림으로 모두 표현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그려서 글자 넣기도 좋고 확연히 잘 읽힐 게 분명했다.

“시하야. 이런 검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낸 거야?”

“아?”

“그냥 머릿속에 팟 하고 떠오른 거지? 마치 영감을 얻어서 말이야.”

“아냐.”

“???”

“형아 보고 그려써.”

“???”

흐음. 그렇군. 모든 결론은 형아로 귀결되는 건가.

날 보고 그렸다니 영광인데?

사실 저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엄청난 속뜻이 있는 거 아닐까?

형아는 비유일 뿐.

“그렇구나. 자세히 좀 이야기해 줄래? 어떤 부분이 형아지?”

이거 왠지 기시감이 든다.

그래. 그거다! 전에 시하가 대상 탄 그림이 생각난다.

물 부족의 주제로 그렸던 그거.

물 내려가는 부분의 하수구의 와류 모양이 사실은 내 정수리였지.

그럼 여기 있는 남자가 설마 나라는 걸까?

“형아. 키주야. 키주. 마쳐바.”

시하가 눈을 반짝였다.

좋은 게임을 발견했다는 눈이었다.

만화였으면 느낌표가 머리에 그려져 있지 않을까?

“마추면 시하가 아이수쿠림 주께.”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돈이 어딨어?”

“시하 대지저굼통!”

“좋아. 형아가 맞혀 보겠어.”

오랜만에 돼지저금통이 개봉되나 보다.

시하가 아주 자신만만한데 말이야.

“그런데 못 맞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몬 마치면…. 우웅. 시하한테 피자 사져야 해.”

“!!!”

나는 아이스크림이면서 너는 왜 피자냐.

가격 대비가 너무 차이 나잖아?! 아니면 내가 이기면 서리원에서 비싼 아이스크림 사도 되냐?

아무튼, 하나는 알았다.

시하는 피자를 먹고 싶은가 보다.

“알았어. 맞혀 볼게. 바로 이 남자가 형아야.”

“!!!”

시하가 살며시 입을 벌렸다.

뭐야? 이렇게 쉬운 거였다고?

“아냐.”

“아니구나. 그럼 여자?”

“아냐.”

“설마…….”

남은 것은 모닥불뿐이다.

그래. 역시 나의 정수리를 표현한 연장선이 분명하다.

반은 작은 불, 반은 큰불.

이거 역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해 보였다.

내가 물었다.

“이 모닥불이 형아야?”

“왜?”

“이유는 말이지. 으음. 아! 형아는 레드니까!”

“이유 아냐.”

“아니었나?”

모닥불은 내가 맞는 거지?

이게 대체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시하가 알려주까?”

“응. 알려줘.”

“형아. 밤에 자고 이써써.”

“응. 그렇지.”

“어두어서 안 보여써.”

당연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시하는 그 어둠을 표현했나 보다.

내가 보이지 않지만, 형태가 있긴 하니까.

호오. 거기서 영감을 얻은 건가.

“이거 형아 머리야. 자고 일어나서 삐죽삐죽해.”

“엥?”

그러니까 이거 모닥불 모양이 내 머리카락이라는 말이지?

한쪽은 급격하게 떠 있고 한쪽은 조금만 떠 있는?

나는 그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이! 지금까지 내가 헛소리 같은 해석을 했다고?

아무래도 해석가에게 물들었나 보다.

조용히 타닥이고 화려하게 타오르는 여주와 남주의 대사를 표현한 게 아니었냐고.

그냥 내 까치집이 정체였냐고!

왜 그림에 나를 포함시키는 거야. 부끄럽게!

나중에 너 커서 이거 흑역사 된다? 사실 저 가마는 형아의 가마였어요. 사실 저 모닥불은 형아의 까치집이었어요.

너무 부끄럽잖아!

아니지. 그렇게 밝히면 내가 더 부끄럽지!

이건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형아가 못 맞췄네.”

“형아. 왜? 레드 형아인데. 왜?”

시하가 못 맞혔다는 거에 시무룩해졌다.

저기 시하야. 솔직히 형아의 정수리도 어려웠는데 엄청나게 솟아버린 내 머리카락을 어떻게 맞추냐고.

이거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못 맞혀! 확실해! 심지어 만약 연극 봤더라면 더더욱!

“흠흠. 시하야. 형아가 사실 모닥불이라고 가리켰잖아. 이유는 몰랐지만.”

“형아. 왜 몰라써. 시하가 열심히 그려써.”

“그래. 그래. 사실 정말 몰랐을까?”

“?!”

시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빡거리는 게 너무 귀엽다.

형아가 사실은 알고 있었어?! 하는 마음속 대사가 들려온다.

“형아는 시하에게 피자를 사주고 싶어서 사실 맞추지 않았던 거야!”

“!!!”

“레드는 원래 남 좋은 일을 하는 히어로거든.”

“형아. 대다내!”

반짝 빛나는 눈을 보니 양심이 쿡쿡 찔린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거짓말은 할 수 있는 거잖아.

하얀 거짓말이라고.

시하가 실망하는 것보다 기뻐하는 게 더 좋지. 암!

“그럼 피자 시키자. 뭐 먹을까?”

나는 폰을 꺼내서 피자 종류를 시하에게 보여 주었다.

시하가 하나를 골랐다.

“새우 피자?”

시하야. 저기 어항에 있는 새우가 움찔거리는 게 안 보이니?

입맛을 다시며 ‘마시게따!’ 하는 시하를 보며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우야. 시하에게는 악의는 없어.

너 사랑하는 거 알지?

물론 그게 먹고 싶어서 사랑하는 건 아니긴 한데…. 아니지. 먹고 싶기도 해서 사랑하는 건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아무튼, 어항에 있는 새우는 먹지 않을 게 분명하다.

***

피자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글자를 넣기로 했다.

제목을 넣는 건 나의 몫이다.

검은색 그림이니 잘 보이게 흰색으로 하려고 한다.

타이포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는데 캘리그래피로 직접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 붓을 클릭해서 글자 크기를 조정한 뒤 새로운 레이어에 글자를 썼다.

[봄이 왔구려.]

내가 영상으로 올린 제목과 같다.

이렇게 글자를 적어넣으니 배경이 봄이라는 게 확 와닿긴 한다.

나머지는 캘리그래피로 할 생각이 없다.

이 부분은 그냥 제공되는 글자로 타이핑할 생각이다.

출연진 이름, 무대, 조명, 공연시간, 티켓 가격, 공연 문의 전화번호, 후원회사 이름, 예매처까지.

그림에 비해 작은 글씨이지만 최대한 손상이 안 가는 식으로 배치했다.

좌측 하단에 말이다.

우측 하단에는 다시 공연날짜를 크게 적었다.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기간은 한 달.

“형아. 글자 너어써.”

“응. 이제 이 포스터를 완성해서 보낼 생각이야.”

“이제 끝나써?”

“응.”

나는 곧장 신창민에게 메일로 보냈다. 이러면 그쪽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솔직히 내 마음에는 드는데 그쪽에서 별로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까이면 가슴 아플 것 같다.

물론 시하에게는 이야기 안 해야겠지.

띵-동-

마침 피자가 왔는지 벨이 울렸다.

“형아. 피자!”

“피자 왔네.”

문을 열고 피자를 받았다. 식탁에 세팅하고 상자를 열었다.

시하는 눈을 반짝이며 피자를 보았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져 있으며 치즈의 윤기가 빛나고 있다.

거기에 파묻힌 새우들이 나를 먹어 달라고 외친다.

“콜라도 붓고.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숩니다!”

나는 시하가 너무 뜨거워하지 않게 접시에 덜어주었다.

“뜨거우니까 후후 불어서 먹어야 해. 알았지?”

“시하도 아라. 후후 하께. 후후후~”

튀어나온 입이 귀여워 보여서 손으로 잡아버렸다.

시하가 의문 어린 눈으로 나를 본다.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시하 배고파.”

“푸하하. 그래. 맛있게 먹어.”

“아아.”

시하가 다시 후후후 열심히 불어서 피자를 식혔다.

나는 시하가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접시에 피자를 두었다.

“다 대따!”

“이제 먹으면 되겠네.”

“형아. 머거. 시하가 식혀써.”

“어?”

나는 감동했다.

배고플 텐데 이렇게 식혀서 나부터 주다니.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대?

“형아. 빨리 머거.”

“고마워.”

“샘이 마시는 거는 형아 먼저 주는 거래써.”

“그렇구나.”

나는 그냥 시하가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좋은데 이런 예절을 어느새 배웠나 보다.

피자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치즈가 쭈욱 늘어나는 모습이 마치 내 마음 같았다.

따뜻해서 흐물흐물해지는 게 말이다.

“엄청 맛있네.”

“시하도 머글래! 아!”

“이거 형아가 먹던 건데?”

“갠차나. 갠차나.”

“푸흡.”

나는 웃으면서 시하에게 피자를 입에 물렸다.

오물오물.

결국은 내가 먹던 걸 시하 손에 있게 됐다.

줬다가 뺏는 거 뭐야. 이런 거는 샘이 안 가르쳐줬나 보다.

“형아. 새우 마시써!”

“시하야. 아직 새우 부분은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어.”

“아직 아냐?”

“응.”

시하는 자기 손에 들린 피자를 보았다.

새우만 콕 때서 입에 쏙 넣었다.

“새우 마시써!”

피자는 저렇게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음식이었나?

뭐 어때? 맛있게 먹으면 된 거지.

“시하야. 피클도 같이 먹어.”

“피쿨?”

“응. 이거.”

“시하 아라. 만화에서 바써.”

“만화는 만능이구나.”

“이케이케 소리네.”

시하가 피클 두 개를 잡아서 마찰시켰다.

“피쿨피쿨. 피쿨피쿨. 소리 나. 형아. 피쿨피쿨.”

“그거 네 입에서 소리 나는 거 아니야?”

“아냐. 피쿨피쿨.”

아무리 봐도 시하 입에서 소리 내는 건데?

이거 그건가? 허공에 주먹질하면서 쉬익 쉬익 하는 거.

이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대충 무슨 만화인지 알겠네.”

“형아도 바써?”

“응. 형아도 어릴 때 봤지.”

“대다내!”

이게 대단하고 칭찬 들을 일인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피자 한 조각을 더 먹고 싶었지만 일단 받았다.

신창민 씨. 반응이 참 빠르군요.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전화가 오시나.

“네. 여보세요.”

「오오오. 시혁 형님! 대단합니다!」

그때 오디션 이후로 신창민은 날 형님으로 부르기로 했다.

내가 한 살 많기도 했고.

“뭐가?”

「그림 말입니다. 그림. 와! 완전 압축되어 그려져 있던데요?」

“열심히 그렸지.”

시하가 말이다.

「진짜 시하페페 작가에게 맡기기 잘했네요. 저 완전 소름 돋았잖아요. 특히 밑에 있는 모닥불에서. 이거 대사에 나온 말 맞죠? 캬아.」

미안해. 그거 내 머리카락 모양이야.

물론 그 말을 전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

「바로 인쇄해서 붙이고 티켓 판매할 때도 이걸 쓸 생각입니다.」

“네 마음대로 정한 건 아니지?”

「당연하죠. 지금 해오름 회장이랑 같이 있는데 포스터 보고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 거 있죠? 아! 맞다. 여기에 대사 조금만 쓸 생각인데 괜찮죠?」

“대본에 있는 대사?”

「네.」

“어. 괜찮아. 어차피 글자는 그냥 서비스였으니까.”

「역시! 괜히 댓글에 외쳐! 시하페페! 하는 게 아니네요.」

아 갑자기 뭔가 부끄러워진다.

빨리 전화를 끊고 싶다.

“끊는다. 돈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잠깐. 잠깐만요.」

“왜?”

「혹시 일 하나만 더 해주실 수 있어요?」

“응? 뭐?”

「저희가 배역을 다 정했거든요. 세트도 사실 시나리오가 중간중간에 나온 시점에서 만들고 있었고.」

“응. 그래서?”

「혹시 너튜브 홍보 영상 만들려고 하는데 거기 자막을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외국어로 말이지? 영상이 얼마나 되는데?”

「영화 예고편처럼 1분에서 1분 30초 정도?」

그 정도면 확실히 자막이 얼마 안 들어갈 것 같기도 하다.

원래 번역은 단어 개수로 계산해 주니까… 으음. 돈 받아도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에 포스터 똭 하고 넣을 거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럼 영상 말고 글 적는 곳에 시하페페라고 표기 좀 해줘. 그림, 번역으로 말이야.”

「아, 그 정도 해주는 건 당연하죠.」

“오케이.”

이 정도 홍보면 번역 값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연극 홍보도 너튜브로 하나?

그걸 물어보니.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물론 막 인기 채널은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죠.」

“그럼 너튜브 채널 링크도 포스터에 적어야겠네.”

「앗! 맞네! 그걸 빼먹었네.」

“아무튼, 알았으니까 수고해.”

「넵! 다음에 뵙겠습니다!」

“응.”

너무 늦지 않게 포스터를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피자를 좀 먹어볼까?

고개를 돌리고 피자를 보는데.

“형아. 새우 마시써!”

“피자에 새우 다 먹었어?!”

“마시써!”

시하가 피자에 있는 새우를 모조리 먹어버렸다.

응. 맛있으면 된 거지. 뭐.

피자라는 거 빵과 치즈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라고.

그래도 어떻게 새우만 쏙쏙 빼먹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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