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시하페페의 영상이 올라왔다.
시작은 늘 그렇듯이 배경음이 깔리면서 흰 도화지가 보였다.
펜으로 그림이 그려지면서 자막이 나온다.
[안녕하세요. 시하페페입니다. 오랜만에 인사하게 되네요.]
시하의 그림 스케줄에 따라 영상이 올려지는 거라 언제나 업로드는 주기적이지 못했다.
어차피 돈 벌 목적도 아니고 그저 시하의 프로필에 한 줄 경력이 추가되는 느낌으로 하고 있는 거였다.
언젠가 이 채널도 쓰이지 않을까.
시혁은 그런 마음이었다.
[지금 노래가 들리시나요? 너튜버 슈님이 만들어준 거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설명을 하지 않고 가사로 그림을 말해주고 싶어요.]
[슈님이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저도 거기에 양념을 한 스푼 더했답니다. 네! 솔직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핳.]
[잘 못 하는 거지만 여러분이 재밌어하지 않을까 싶어서 불러보았습니다.]
사실 재미의 목적은 없었다.
이렇게 밑밥을 깔고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영상의 길이를 맞추느라 한 사람이 더 불러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하핳]
그런 솔직함에 사람들이 좋다고 댓글을 단다.
아직 영상이 제대로 시작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 그림의 제목은 ‘봄이 왔구려.’입니다. 과연 어떤 스토리가 녹아있는지 같이 한번 보자고요.]
먼저 빠르게 그려지고 있는 건 페페였다.
다만 오늘은 펭귄 가면을 따로 쓰고 손에는 단소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드러날 때쯤에 노래가 흘러나왔다.
[세상이 기만에 속을 때.
빼앗긴 사람들은.
가슴에 붉은 마음을 품고.
저마다 무기를 들었네.]
빠른 속도로 페페에게 색이 칠해진다.
단소는 진한 고동색으로 칠해서 뭔가 더 단단해 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서수현의 아련한 목소리가 그 느낌을 얹는다.
[얼굴 모를 새들은.
진실을 알릴 수 있게.
손에 단소를 쥐고 있고.
저마다 소리를 내었네.]
두 번째 그림.
형형색색인 천이 나온다.
민속촌에 봤던 길가에 걸린 얇은 천이 그 배경이다.
다만 페페가 등을 돌리고 있고 하나의 넓은 천 뒤에 검은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마치 누군가 있듯이.
[무엇을 찾고 있나. 어디로 가는 거요.
이렇게 가는 게 맞소. 대답 좀 해주겠소.
덧없이 피고 지는지. 답을 좀 알려주오.]
세 번째 그림.
페페의 일인칭 시점으로 손과 단소가 보인다.
단소로 천을 걷어내는 모습이다.
그 너머에 새로운 현대식 건물들이 보인다.
작은 면적에 자세히 그리기 위해 그림이 확대된다.
분식집, 공중전화 박스, 문방구, 담벼락에 있는 영화 포스터.
[이 천을 걷어 나는 보았소.
빼앗긴 들에도 봄이 왔구려.
등불을 지니고서 등을 돌리려 하오.
무용이 아니었으니. 화려하게 타오르겠소.]
네 번째 그림.
좌우 끝에 살짝 천의 그림이 드러난다.
등을 돌린 페페를 카메라로 찍는 시점이다.
페페의 앞에는 달집이 불타오르고 있고 그 위에는 보름달이 걸려있다.
까만 밤하늘에 화려하게 타오르는 달집 위로 검은 연기가 흩날린다.
[만월을 보는 그대. 입가에 미소를 바라오.
행여 슬퍼하지 마오. 잿가루 되어 냄새를 지운 것에 만족하니.
되돌아온 들에서 다시 만나오. 감사하오.]
노래가 끝이 나고 다시 한번 완성된 그림의 순서가 제대로 나온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이번에는 시혁이 노래를 부르면서.
저음의 목소리가 더 애절하고 간절하게 들릴 수 있도록 부른 것이다.
귀여운 펭귄의 그림이지만 시혁은 그 조합으로 스토리를 부여했다.
시하가 생각하는 연출적인 그림과 시혁의 스토리가 시너지를 발휘했다.
[영상은 여기서 끝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댓글이 넘쳐났다.
물론 바로 영상에 글이 남겨지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모두 [슈] 채널에서 홍보해준 덕분이었다.
-와 노래 대작이었네 ㅎㄷㄷ
-슈 채널이 소개해서 봤는데 이건 무슨 ㅎㄷㄷ
-저 그림체에 이야기 무게감 뭔데ㅋㅋㅋ
-저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에서 영감을 받은 거 같은데?
다들 단순한 그림과 스토리적 연출, 그리고 노래에 대해서 소름이 돋았다.
-세상이 기만에 속을 때. ㅎㄷㄷ 저거 식민지 잘 다스리고 있다고 말하는 느낌인데? 첫 소절부터 와... 함...
-얼굴 모를 새들... 묵념...
-그걸 탈로 연출했다는 게 더 소름....
-근데 펭귄이 새임?
-그걸 말하는 넘이 있네ㅋㅋㅋㅋ
외국인들도 가사 자막으로 대략적인 스토리가 예상이 되는지 반응이 뜨거웠다.
-와 미쳤어! 시하페페!!
-오늘 폼이 진짜 미친 거 같아!
-목소리 너무 좋아ㅠㅠ
-시하페페 다 가졌구나. 노래마저 잘하다니...
물론 시하가 부른 게 아니라 시혁이 불렀다.
굳이 따지자면 시하페페에서 페페가 부른 것이다.
-얼굴은 못생겼지 않을까?
-ㅋㅋㅋ난 잘생겼다고 봄
-잘생겼으면 좋겠다!
-못생겼을 거야. 아무튼, 못생겼을 거야!
어김없이 해석가가 장문의 댓글을 달았다.
-이건 진짜 할 말이 없다. 먼저 나라를 위해 싸우는 확신 없는 ‘누군가’인 거 같은데.... 천을 들어서 미래를 보았음. 그리고 확신이 생긴 거지.
기꺼이 타오르는 불길에 몸을 맡긴다니.
그의 신념이 느껴진다. 진짜 멋지다.
내가 알아봤는데 저건 달집이라고 해서 나쁜 기운을 쫓고 정화하는 작업이라고 하더군.
과연 뭘 정화할지는 너희들도 알겠지?
만월을 보는 그대... 이 가사는 땅을 되찾은 현대인을 말하는 걸 거야.
그리고 잿가루는 진짜 냄새를 지울 때 쓰이기도 하더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웠던 이름 모를 새들은 과연 현대에서 환생했을까?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와! 진짜 시하페페!
영상을 올릴 때 이거 연출도 고민 많이 했을 거 같아!
이건 노래랑 그림이랑 어느 하나 빠지면 안 돼!
이런 장문을 댓글을 본 시혁은 생각했다.
오늘은 꽤 정상적인데? 라고…….
***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이건 시하를 위해 만든 채널인데 내가 쓴 문장이 가사가 되어서 그런지 반응들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난 너튜브의 참맛을 맛보아버린 모양이었다.
이래서 너튜버에 한 번 빠지면 허우적대는 거려나?
스트리밍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되는 기분이다.
내 말에 기분 좋게 반응해 주면 좋고 안 좋은 댓글이 달리면 우울하고.
일비일희가 일상이 되면 부담이 되고.
어? 말하다 보니까 안 좋은데?
정신 차리자. 순간의 감정에 취하면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 법이니.
“시하야. 오늘 영상 반응 엄청 좋아.”
“정말?”
“응. 노래도 나와서 더 좋아하는 거 같아.”
“그럼 시하 노래 올릴까?”
그건 스토리와 맞지 않아서 안 될 거 같은데?
그러려면 페페가 떡국 먹는 거 그려야 하지 않을까?
“다음에 시하 목소리랑 어울리는 그림 있으면 올려볼게.”
“아아. 시하 올려. 올려.”
안녕하세요. 시하페페입니다. 오늘은 애기 목소리로 떡국송을 불러보았습니다.
뭐 이렇게 광고해야 하나? 사람들이 엄청 신기해하지 않을까?
이거 진짜 시하페페 목소리? 미성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지? 기계 만졌나?
뭐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형아.”
“응? 왜? 딴 거 뭐 바라는 거 있어? 형아가 다 해줄게.”
“이거 하고 시퍼.”
시하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뭔가 싶어 보니 민속촌에서 받은 다마고치였다.
“이거 뭔지 알아?”
“게임이야. 게임.”
“게임인 거 눈치챈 거야?! 천잰데?!”
글자도 읽을 줄 모르면서 상자의 그림만 보고 추리하다니. 역시 시하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현실판 셜록 홈스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되어서는 가는 곳마다 사건이 일어나서 고등학생 탐정으로 활약하는 거지.
아니… 이건 안 좋은 건데. 상상한 거 취소다.
“이거 해보고 싶어?”
“재미써?”
“으음. 글쎄? 시하의 취향에 갈리지 않을까?”
게임이라는 건 은근 취향을 많이 타기도 하니까.
사실 이런 키우는 고전적인 게임은 한 번 하면 한동안 푹 빠진다.
“일단 해볼게.”
나는 상자를 뜯어서 다마고치에 전원을 켰다.
다행히 안에 건전지가 들어있는지 바로 켜졌다.
50%
배터리 잔량을 보니 미리 건전지를 사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 여기 있어.”
“모야모야모얌.”
“그거 목 풀 때 쓰는 거 아니야? 캐릭터가 뭔지 궁금하지?”
“이거?”
상자에 나오는 그림을 시하가 가리켰다.
“아쉽게도 아니야. 정답은 바로!”
나는 시하에게 다마고치를 넘겨주었다.
“아?”
“큭큭. 알이었습니다.”
“달걀이야. 달걀이.”
“후라이 해 먹으면 게임이 끝나겠네?”
“안 대. 후라이 안 대.”
시하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두 팔을 교차시켜 엑스 자를 만들었다.
하긴 그렇게 키우면 너무 슬픈 엔딩일 것 같다.
“이제 알을 열심히 키워서 애기가 태어나게 만들자.”
“어떠케?”
“밥을 줘야 해. 밥.”
“밥?”
“응. 여기 누르는 거 있지? 이걸 가지고 하는 거야. 밥 먹이기.”
“밥.”
나는 시하에게 열심히 누르는 걸 가르쳐주었다.
한글 대신 고기 모양의 그림으로 되어 있어서 시하도 쉽게 조작할 수 있었다.
“이거?”
“응.”
시하가 밥을 클릭했다.
알이 열심히 고기를 먹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게임적 허용이라는 것일까?
“형아. 달걀이 고기 머거.”
“그러네. 신기하네.”
“고기 머그면 태어나?”
“응. 태어난다네?”
닭처럼 알을 품는 것도 아니고 고기를 먹으면 태어난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삐비빅. 삐비빅. 다마고치에서 알이 깨지더니 병아리가 태어났다.
“형아. 삐약이야!”
“아까는 이름이 달걀이 아니었니?”
“아냐. 삐약이야.”
“그렇구나.”
모 만화처럼 진화하면 이름이 바뀌는가 보다.
달걀이 진화~ 삐약이!
“형아. 소리나! 소리!”
“원래 이건 소리 나는 거야.”
“똥 싸써. 똥! 똥이야!”
보니까 진짜 똥이었다.
시하는 똥에 흥분했다. 그… 동네방네 소문낼 거니?
“이건 치워줘야 해. 시하가 똥 치워주자.”
“똥 치어?”
“응.”
시하가 열심히 조작한다.
변기 모양이 나오는 게 보였는데 그걸 클릭하니 똥이 치워졌다.
이렇게 편리하게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만들다니.
원래 이렇지는 않은 거 같은데?
“형아. 친구 소개해 주고 오께!”
“응?”
시하가 어항으로 도도도 달려가더니 다마고치를 찰싹 붙였다.
물고기가 아주 잘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런 의도와 달리 물고기들은 놀라서 마구마구 헤엄쳐서 피했지만.
“일피. 이피. 피피야. 부끄러?”
그런 거 아니야. 무서워서 피했을걸?
커다란 걸 들이대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우리 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개를 계속한다.
“얘는 삐약이야. 삐약. 삐약. 이제 친구야. 친구. 인사해.”
물고기들은 다른 쪽으로 가기 바쁘다.
시하도 그걸 보았는지 이제 관심을 새우에게 돌렸다.
“티김. 삐약이야. 인사해.”
튀김… 아니, 새우는 별 반응이 없어 보였다.
느릿느릿하게 삐약이에게 다가가더니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진짜 인사하는 거 같은데?
“안녕하세여. 삐약이야. 잘하는 건 똥 싸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장점이라고는 집에서 똥만 싸는 병아리 같잖아.
키울 이유가 없어!
귀엽다거나 그런 장점들도 소개해줘야지.
“형아. 물고기 똥 마나!”
“아, 그렇지.”
이제 물을 갈아주면서 청소할 때가 되었다.
저 흩날리는 똥 때문에 물이 혼탁해지니까. 한 번씩 갈아줘야 했다.
청소도 해야 했고.
“물 떠 다 놓은 게 있을 텐데…….”
나는 화장실로 갔다.
물을 갈아주기 위해 미리 떠놓은 게 있었다.
이것도 정말 일이다.
“시하야. 청소 좀 할까?”
“아아! 삐약이도 청소해!”
보니까 정말 청소 기능이 있었다.
시하가 클릭하니 빗자루로 열심히 땅을 쓴다.
얘는 진짜 이상하네.
하는 게 똥 치우는 거랑 청소하는 거랑…….
병아리 장점이 원래 이런 거였나?
“그럼 오늘 같이 청소나 할까?”
“아아.”
“일단 얘들을 여기 바가지에 옮기고…….”
그물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서 옮겼다.
“시하가 하까?”
“아니. 시하는 여기 어항에 있는 물을 조금 저기에 다시 넣어줄래?”
“왜?”
“조금 섞어야 좋거든.”
시하가 조그마한 바가지로 어항의 물을 떴다.
사실 어제 내가 조금 물을 뜨긴 했지만 시하가 해보는 것도 중요하니까.
“자! 이제 나머지는 버리자.”
“아아!”
나는 어항의 물을 버렸다.
수돗물을 틀어서 돌들도 빡빡 씻으며 또 한 번 버렸다.
어항이 작아서 다행이다. 컸으면 얼마나 중노동이었겠어.
“형아. 냄새나.”
“물고기 똥 냄새라서 그래.”
“일피, 이피, 피피. 똥 마니 싸써?”
“응. 그러네.”
“어항에 화장실 사까? 그럼 깨꾸테?”
아무래도 어항 안에 변기를 따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 같다.
물고기가 똑똑해서 변기에 싸서 물을 내리면 좋겠지만 그럴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고기들이 화장실 쓰는 법을 몰라. 시하도 지금보다 어릴 때 기저귀에 쌌지?”
시하가 이해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형아. 그럼 기저기 사까?”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시하 너 기저귀 안 갈아봤지? 그거 얼마나 귀찮은 건데.
차라리 이렇게 한 번씩 청소하는 게 훨씬 낫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렇게 청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뭐든 상대적인가 보다.
삐비빅.
시하가 다마고치에서 소리 나는 걸 듣더니 벌떡 일어나서 확인해 본다.
“형아. 똥 싸써!”
그 삐약이는 왜 맨날 똥 싸는 거니?
오늘 온통 똥 얘기인 거 같아서 정신이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