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80/500)

280화

어린이집에서 새로운 숙제를 내주었다.

재밌게 읽은 책을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다.

혹은 또 다르게 만들어서 이야기를 꾸며도 된다고 했다.

시하는 고민이었다.

어떤 책을 읽어서 소개해 줄지 말이다.

“형아. 시하 책 머하까?”

“시하가 재밌게 읽은 거 소개해 주면 되지. 최근에 뭐 읽었지?”

“이거!”

시하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동화책을 내밀었다.

해님과 달님.

유명한 전래동화였다.

“그럼 이거 소개해 주면 되겠다.”

“시하 딴 거 하고 시퍼.”

“이거 말고?”

“아냐. 이야기 바꿀래.”

“흐음. 변형시키고 싶다는 거지?”

“아아.”

아무래도 시하는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보다.

어째서 그럴까? 막 창작의 욕구가 끓어올라서?

“왜 바꾸고 싶은데?”

“친구들 다 아라.”

아무래도 친구들이 웬만하면 동화책들을 다 아는 모양이다.

하긴 이런 전래동화나 그런 건 집에서도 많이 읽어주긴 하니까.

맨날 시하만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한데 이제 어린이집에 1년을 다녀봤으니 아는 것도 많아졌다.

“흐음. 그렇구나. 아! 그럼 유다희 선생님처럼 이야기를 재밌게 꾸미는 건 어때?”

“아?”

“아니다. 형아가 잘못 말했다.”

유다희 선생님의 이야기는 교훈도 있고 재미도 있지만 숨은 설정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엉뚱 발랄한 매력이긴 하지만.

“시하는 만약 바꾸면 어떻게 바꾸고 싶은데?”

“페페.”

펭귄 vs 호랑이.

그거참 굉장한 싸움이겠구나.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건 어떻게 생각해?”

“우웅. 재미써.”

“그래?”

나는 별로라고 생각한다.

결국,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상황이 말이다.

기왕이면 멋지게 물리쳤으면 좋겠다.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잘 생각해봐.”

“아라써. 시하 생각하께!”

시하가 오른손 검지를 관자놀이에 붙인다.

왼손 검지로 내 관자놀이에 붙인다.

“이게 뭐 하는 거야?”

“쉿! 형아 머리랑 시하 머리랑 연결대써. 합쳐서 생각해.”

그러니까 너의 팔을 통해서 나의 뇌와 연결되었다는 거야?

엄청난 능력인데?

“형아. 들려. 시하 속으로 말해써.”

“당연히 들리지. 입으로 말하고 있는데.”

“아냐. 시하 입 안 열어써.”

누가 봐도 입을 뻐끔뻐끔 열고 있는데?!

아무래도 텔레파시 같은 걸 보내는 설정인가 보다.

“그래. 시하야. 잘 들린다. 들려. 머릿속에 시하 목소리가 들려!”

“형아가 이야기 만든 거 시하에게 들려져. 거짓말 모태.”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날로 먹는 거 모야? 마시써?”

“으음.”

맛있긴 맛있지. 꿀맛이지. 근데 이걸 설명하려고 하면 조금 곤란하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주자.

“호랑이는 해님과 달님을 잡아먹었어.”

“아?”

“내가 생각했던 결말이지. 끝!”

현실이라면 애들이 잡아먹히는 비극일 것이다.

시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나 보다.

“형아. 어떠케 그럴 수 이써?”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해님과 달님을 잡아먹은 거 같잖아…….

하지만 시하의 충격받은 표정이 너무 귀엽다.

머리와 연결된 손가락이 때졌다.

털썩.

시하가 두 손을 땅바닥에 짚었다.

“이거 모써…….”

미안하다. 내가 못 쓰는 아이디어를 줬구나.

숙제는 날로 먹지 말고 스스로 하려무나.

그래도 비극적 엔딩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물론 나는 해피엔딩을 더 좋아하지만.

“시하야.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아? 시하 떡 업써.”

“여기 있는데?”

나는 시하의 볼을 잡았다.

말랑말랑.

“찹쌀떡.”

“아?”

시하가 놀라서 볼을 잡았다.

“시하 볼 필요해.”

“조금만 맛볼게.”

시하가 우물쭈물하더니 휙 뒤를 돌았다.

설마 삐졌나?

그런데 엉덩이를 쭈욱 내민다.

“형아. 시하 엉덩이 맛 바.”

“푸흡.”

“시하 아라. 시하 어릴 때 형아 깨물어써.”

나름대로 타협안을 내는가 보다.

근데 볼은 안되고 엉덩이는 왜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손으로 시하의 엉덩이를 콕 잡았다.

“앙!”

엉덩이도 찹쌀떡이네.

***

오늘은 시하가 아이들에게 책을 소개해 주는 날이었다.

하루에 한 명씩.

각자 재밌게 읽은 걸 소개해 주는 건 중요했다.

발표의 능력도 기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좋아하는 걸 공유하는 건 이야기하는 화제가 되기 좋다.

더 친해지고 말하라는 뜻으로 이번 숙제를 내었다.

물론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졌지만.

“네! 오늘은 시하가 책을 소개해 주는 날이에요. 시하야. 어떤 책을 들고 왔니?”

시하가 펭귄 가방을 열었다.

안에 책을 꺼내며.

“짜잔! 시하 해님과 달님 들고 와써.”

시하가 예상했던 아이들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나 그거 아는데!”

“하나도!”

“다들 아는 거 들고 왔네! 시하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종수가 제일 신이 났다.

하지만 시하는 유다희 선생님처럼 검지를 들더니 얼굴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시하 이야기 바꺼써.”

“!!!”

“시하가 이야기해 주께.”

종수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설마 이야기를 변형시켜 올 줄 몰랐으니까.

뭔가 분하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 이시하라는 생각과 함께 유심히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이마를 긁적였다.

대체 종수는 뭐 하고 싸우고 있는 것일까.

“해님이, 달님이, 형아 이써서.”

원래라면 엄마가 오누이를 키우는 거지만 시하는 형아로 바꾸었다.

“형아가 말해써.”

“파바박 하러 가따 오께! 돈 마니 버러 오께.”

“외국에 가써.”

선생님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전래동화인데 너무 글로벌하게 갔다 오는 거 아니니?

“호랑이가 해님이랑 달님한테 와써.”

“배고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엄청난 이야기 전개였다.

바로 호랑이의 등장이었다. 그것도 해님과 달님에게 떡을 요구하는 거로 바뀌었다.

아이들이 은근히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해님이 하고 달님이가 문에 바써. 호랑이가 이써서. 걱정해써.”

“오빠. 어떠케 하지?”

“갠차나. 내가 사커로 혼내주께.”

아무래도 오누이는 승준과 하나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승준이 그걸 알아차렸는지 흥분해서 콧김을 뿜었다.

승준아. 너무 과몰입한 거 아니니?

“동생이 말해써. 하나가 노래 부르께. 호랑이가 하나 보면 공 차.”

시하야. 동생이 하나가 되어버렸는데 그건 괜찮니?!

너 머릿속에만 롤모델로 한 걸 줄줄 말하고 있다고.

“하나가 노래 부르고 오빠가 공 차써. 호랑이 마자서 아코! 해써!”

아코!는 네가 잘하는 거 아니야?

시하가 호랑이가 된 거야?!

아무래도 시하가 평소에 쓰는 말이 이야기에 묻어나오고 있다.

호랑이가 갑자기 귀여워졌다.

“호랑이 화나써. 잡아머글 거야 해써.”

“오빠랑 동생은 도망쳐써. 나무 위로 올라가써.”

“호랑이도 올라가고 이써.”

“오빠랑 동생이 구해 달라고 해써.”

“하늘에서 구해져!”

드디어 동아줄이 내려올 타이밍이다.

여기서부터는 정상적인 흐름을 타는 거로 예상했다.

“하늘에서 페페가 내려와써.”

네? 뭐라고요?

갑작스러운 펭귄의 등장이었다.

“형아여써. 페페 모자 쓰고 줄 잡고 내려와써. 손에 찹쌀떡 가득 이써.”

알고 보니 외국 간 형아였다는 설정이었다.

원작처럼 떡을 들고 있다.

“떡 마니 던져서 호랑이 입에 쏙쏙 너어써. 호랑이 목 마켜서 나무에 떨어져써. 호랑이가 도망쳐써.”

나름대로 논리적인 이야기 흐름이었다.

“시혀기 형아 대다내! 시혀기 오빠 대다내! 해써.”

저기 시하야? 형아가 시혁 씨가 되었는데요?!

이거 해님과 달님 이야기 맞지?

언제부터인가 해님이와 달님이는 하나와 승준이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 활약의 주인공은 형아인 시혁이었다.

이 정도면 제목을 ‘형아의 이야기’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딸기 찹쌀떡 마시께 머거서 행복해져써. 다해따!”

드디어 이야기가 끝났다.

뭔가 이야기가 심히 변질된 거 같지만 어찌 되었든 마무리는 해피엔딩이었다.

짝짝짝.

아이들이 열심히 박수를 보냈다.

“와아. 재밌다.”

“시하야. 하나 나와서 더 재미써.”

“시하 너 이야기까지 잘 만들다니. 다음에는 내가 더 엄청난 이야기 가지고 올 거야!”

“종수 이야기 기대된다.”

다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열심히 했다.

선생님은 기분 좋게 봤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창작 욕구에 시하가 불을 지핀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뭔가 해보도록 자극을 준다는 게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승준이 말했다.

“근데 옛날에는 산에 호랑이 있어서 떡 달라고 하면 진짜 어떻게 호랑이를 이겼지?”

종수가 코웃음을 쳤다.

“실제로 호랑이가 떡 달라고 할 리가 없잖아. 동물원 가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종수는 옛날로 가서 호랑이 봤어? 안 봤지?”

“어? 안 보긴 했는데…….”

“그러니까 모르지. 옛날에는 호랑이가 담배도 했다고 해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어디서 그런 말을 주워들었나 보다.

“그때 호랑이랑 지금 호랑이랑 다를 리가 없잖아.”

“왜? 그때는 산에도 호랑이가 살았는데 말할 수도 있지. 산신령도 있다고 했어.”

“거짓말이야.”

“진짠데? 아빠가 말해 줬다고.”

승준이 자신 있게 말했다.

하나도 옆에서 맞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조용히 있던 연주가 말했다.

“궁금하면 옛날로 가면 되잖아.”

“???”

“아빠한테서 옛날 마을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 처음 왔을 때 경복궁도 가보고 그랬다고. 난 안 가봤는데.”

선생님은 연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여러분 혹시 옛날 마을 가볼까요? 해님이랑 달님이가 살았던 데 말이에요.”

“샘. 정말?”

“그럼. 민속촌이라고 옛날 마을이 아직도 있어요.”

선생님이 후후후 웃으며 손을 위로 뻗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자!”

아이들이 눈을 껌뻑거렸다.

선생님은 갑자기 민망해져서 손을 내렸다.

“흠흠. 아무튼, 거기만 시간이 옛날에 멈춰있어서 아직도 남아있어요. 나중에 갈 수 있는지 허락을 맡아볼까요?”

“네에!”

오랜만에 어린이집에서 놀러 가기로 정해졌다.

***

오늘 시하의 알림장을 봤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승준과 하나의 형, 오빠가 되어 있었다.

시하는 어쩌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형아. 시하 오늘 이야기 잘해써.”

“그래? 아닌 거 같은데?”

“아냐. 진짜 잘해써.”

“오늘 형아가 이야기에 등장했던데?”

“아? 시하 형아 이룸 말 안 해써.”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는 자각이 없는 건가?

해님이, 달님이 이름도 변경된 거는 기억하는 건가?

“너 승준과 하나도 이야기에 넣었던데?”

“아코!”

시하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시하 실수! 실수!”

탁탁탁.

실수는 두 번 말했는데 이마는 세 번을 치고 있다.

너무 귀여웠다.

이게 아니지.

“근데 알림장에 이번에 민속촌 간다고 허가서가 나왔는데? 시하는 가고 싶어?”

“시하 가고 시퍼!”

“그래?”

“형아랑 가치!”

“???”

난 또 왜? 이제 친구랑만 같이 다녀올 때도 되지 않았어?!

“이거 허락하면 나도 같이 가는 거야?”

“형아도 가치 가야 해.”

“흐음. 안 갈 건데?”

“아냐. 가치! 가치!”

“형아가 꼭 가야 하는 이유를 대 봐. 오늘 재밌게 이야기한 것처럼 설득을 해보라고.”

“!!!”

시하가 열심히 고민했다.

“형아. 여기 안자바.”

“그래.”

역시 진지하게 이야기하려면 앉아야지.

시하가 일어나서 내 머리와 자기 머리를 연결했다.

“시하랑 연결대써. 떨어지면 클나. 클나.”

“푸흡. 어디 떨어져 볼까?”

나는 뒤로 물러섰다.

“안 큰일 나는데?”

“하나, 둘, 서이!”

톡.

다시 붙였다.

“서이 세면 갠차나.”

그거 떨어진 거 3초 안에 주우면 괜찮다는 논리랑 비슷한 거 같은데?

“이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지?”

“아냐. 이써.”

“뭔데?”

“형아가 시하 조아해. 시하도 형아 조아해.”

“그래서 같이 가야 한다고?”

“아아.”

“???”

이거 참. 어마어마한 논리구만.

“또 없지?”

“이써.”

“있다고?”

“시하 하나 배어써.”

뭘 배웠다는 걸까?

“형아랑 시하 세투야. 세투 메뉴. 시하 영어 배어써.”

세트 메뉴가 그럴 때 쓰는 표현이었던가?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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