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8화 (278/500)

278화

서수현은 살며시 고민이 일었다.

초콜릿을 기프티콘으로 그냥 보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직접 사서 전달해 주는 게 좋을까?

전자는 뭔가 성의 없어 보이고 이거나 먹어라! 하고 던져주는 느낌이다.

후자는 뭔가 마음이 있어서 주는 티가 팍팍 나고.

그래서 곤란했다.

차라리 개강이라도 했다면 초콜릿을 전해 주기 쉬웠을 건데 아쉽게도 3월이 되어서야 대학생들이 강의를 듣는다.

2월 14일인 지금 찾아가서 주면 너무 좀 부끄럽다.

“으음.”

괜히 머릿속에 핑계를 만들어본다.

무심하게 만나서 ‘오다 주웠다’ 작전을 펼치는 거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오늘 밸런타인데이인데 오빠는 하나도 못 받았죠? 이거 먹어요. 오늘 친구들이 하나씩 주던데 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

그런 대사를 머릿속에 열심히 읊어본다.

실수하지 않도록.

“후우. 여기 있으려나?”

시혁이 작년부터 자주 가던 카페를 둘러보지만 역시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다.

학교 빈 강의실에 있다는 것.

대학원생들은 언제나 연구실에 출근해서 열린 강의실이 있다.

과사에서도 학생들을 위해 열어놓는 강의실이 몇 군데 있었다.

도서관보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긴 하니까.

그래도 이런 좋은 방학에 누가 학교를 오겠나.

공부를 해도 카페나 도서관에서 하지.

‘오빠는 있겠지.’

이시혁 같은 사람만이 빈 강의실에서 노트북이나 타닥타닥 치는 거다.

‘여기 있나?’

열린 문을 보며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리가 들렸다.

“아! 여기 있었네요. 시혁 오빠.”

“응?”

서수현은 살짝 문틈으로 두 사람이 있는 걸 지켜보았다.

이제 4학년으로 올라가는 동기 중 한 명이다.

괜스레 벽에 기대어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사이에 말소리가 들렸다.

“와. 이 하트 초콜릿 뭐예요? 누구한테 받았어요?”

“아, 이거?”

뭐야. 누가 벌써 초콜릿을 준 거야?!

“어린이집에 하나라고 하나 주더라고.”

“아! 어린이집. 시혁 오빠 동생도 거기 다니죠?”

“어.”

서수현은 시혁의 말에 가슴을 쓸었다.

뭐야. 하나가 초콜릿을 준 거구나. 아주 하트로 누가 노골적으로 줬나 싶었네.

타다다다.

키보드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인사만 하고 일하는 중인가 보다.

“크흠.”

“왜?”

“아니. 사람이 왔으면 쳐다는 봐야죠.”

“아까 보고 인사했잖아. 여기 공부하러 온 거 아니야? 공부해.”

“아. 이 오빠 진짜 눈치 없다. 제가 여기 왜 왔겠어요. 오늘 밸런타인데이니까 초콜릿 주려고 왔지.”

“뭐?”

“여기 초콜릿 받으시고요.”

“이거…….”

“네. 맞아요. 저 오빠 좋아해요. 사실 계속 봐왔었는데 사람이 참 괜찮은 거 같고 동생한테도 잘하고…….”

서수현은 숨을 삼켰다.

이시혁을 어느 정도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긴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고백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우리 사귈래요?”

“…….”

“왜요? 나 정도면 좀 괜찮지 않나?”

“미안해. 난 지금 누구랑 사귈 마음이 없어. 여유가 없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그거야 사귀어 보면 또 달라지는 거 아닐까요?”

서수현은 밖에서 시혁이 한숨을 내쉬는 걸 들었다.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여자 친구라는 거. 사실 마음속에 1순위가 되어야 하잖아. 근데 지금 나는 그게 안 돼. 시하가 1순위야. 너 먼저 생각해 주기 전에 내 동생부터 생각하게 된다고. 그럼 너는 거기에 대해 서운하겠지. 어긋나게 될 게 뻔한데 굳이 사귀어야 할까?”

“…….”

“서로에게 안 좋아. 시하에게 마음이 덜 쏠리게 되면 애들은 민감해서 금방 알아차린다고. 외로워하게 될 건데…. 말이 너무 길어졌네. 미안해. 내가 여유가 없다.”

“그렇구나.”

서수현은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닌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콱, 하고 박혔다.

“이 초콜릿은.”

“그냥 오빠 먹어요. 내가 들고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렇겠지?”

“네. 그리고 다음에는 그냥 거절해요. 미안해! 싫어! 하고. 아, 또 제가 고백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괜히 상처받을까 봐 돌려서 그렇게 말하니까 나 그래도 좀 가능성 있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와. 이 오빠 확인사살까지 하네. 아무튼, 알겠어요. 열심히 일하세요.”

서수현은 그 자리에서 후다닥 벗어났다.

옆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그래. 너도 수고해.”

어색한 시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을 닫았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손에 있는 초콜릿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이걸 지금 이 타이밍에 주면 굉장히 이상해지는 거 아니야?

머릿속이 복잡해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안 줄 수는 없었다.

자신은 겁쟁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용기를 내야 가능성이 열리니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옆 강의실 앞에 서서 얼굴에 미소를 장착한다.

벌컥.

“와! 역시 여기 있었네?”

“응? 뭐야.”

“뭐긴. 오빠가 오늘 초콜릿 하나도 못 받을까 봐 적선하러 왔는데.”

시혁이 책상 위에 올려진 두 개의 초콜릿을 흔들었다.

“누구한테 받았어요?”

“하나는 하나에게 받았고 다른 하나는 친구에게.”

“아하. 친구. 남자에게 받았나 보네.”

“왜 너는 친구의 성별이 남자밖에 없다고 생각할까? 응?”

“성별은 모르겠고 오빠 친구는 사실 시하 친구들 아니에요?”

“너무하네, 진짜. 오늘은 작정하고 놀리러 왔나 보네.”

“아하하. 그래도 이거 사 왔으니까 먹어요. 나 오늘 학교 들리는 김에 주는 거니까 운 좋은 줄 알고.”

서수현은 사 온 초콜렛을 시혁에게 주었다.

둥근 플라스틱 통에 여러 개 들어있는 초콜릿이다.

심심할 때 먹으면 좋은 거로.

“와. 카카오 99퍼네.”

“싫어해요?”

“아니. 난 그거 있잖아.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초콜릿 개구리. 그거 주는 줄.”

“이 오빠가 진짜. 내가 무슨 개구리 성애자인 줄 알아요?”

“하긴. 동족 포식은 선 넘었지. 그지?”

“이 오빠가 틈만 나면 놀리려고 하네.”

시혁이 킬킬 웃으며 초콜릿을 흔들었다.

안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당 떨어졌을 때 하나씩 먹으면 좋겠다. 아무튼, 고마워. 잘 먹을게.”

“화이트데이 때 그 배로 줘야 해요. 알았죠?”

“야! 가져가라. 나 안 먹어.”

“치사하게.”

“누가 치사한데. 누가! 이래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는 거야.”

“그게 왜 나오는데! 아주 개구리라면 놀리고 싶어 못 참겠지!”

“겠지? 말이 짧다?”

“…요!”

“푸흡. 농담이야.”

“네. 저도 농담이에요. 일 잘하시고! 개구리는 갑니다.”

“개굴 수현 잘 가.”

서수현은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다크 초콜릿 선물.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건 이렇게 평소처럼 대하는 게 맞는 거라고 알려준다.

정체 구간에 서 있는 솔직하지 못한 자신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

나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책상 위에 있는 초콜릿 세 개를 보았다.

오늘 뜻밖의 사실들을 너무 많이 안 것 같았다.

고백받을 줄이야.

그냥 좀 미안했다. 거절당하고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도 내 대답은 달라질 게 없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단호하게 하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솔직하게 감정을 전해준 것처럼 나도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여유가 없다.

누군가 내 감정에 다른 사람을 넣기에는 그릇이 크지 못했다.

지금 손에 있는 것도 어떻게 깨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하고 있는데 더 신경 쓸게 늘면 너무 스트레스일 것 같다.

사랑하면 즐거운 게 아니라 머리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는 것 자체가 그 애와 사귈 수 없다는 증거였다.

첫 단추를 잘 끼워도 두세 번째 단추도 잘 못 끼우는 법일진대.

좋은 감정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버티겠나. 그 뒤는 뻔한 거지.

“흐음.”

나는 서수현이 준 다크 초콜릿을 보았다.

달그락달그락.

괜히 이 소리가 마음을 안정시킨다. 마치 빗소리처럼.

하나가 준 초콜릿을 열고 입에 살살 녹였다.

밸런타인데이.

배경이 어떻든 간에 현대에는 마냥 좋은 날은 아닌 것 같다.

똑. 똑.

“응?”

대체 오늘 의문을 몇 번이나 내뱉는지 모르겠다.

여기 이시혁 출몰지역이라고 적혀 있나 보다.

하긴 워낙 자주 있었으니.

“알리사.”

“앗! 제가 일 방해한 거 아니죠?”

“아니에요. 알리사도 초콜릿 주러 왔어요?”

“아니요. 전 왠지 시혁 씨가 초콜릿을 많이 받을 것 같아서 준비 안 했어요.”

“푸흡. 그래요?”

“네. 전 그래서 딴 거 준비했어요.”

“???”

알리사가 작은 종이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뭔지 열어봤는데 플라스틱 통이 보였다.

“이게 뭐예요? 반찬?”

“김치볶음밥이요.”

“???”

알리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요즘 한국은 단짠단짠이죠!”

초콜릿과 김치볶음밥을 조화.

정말 엄청나구나.

“진짜 이거 주러 온 거예요?”

“제가 만들다 보니 너무 많이 만든 거예요. 그래서 오늘 밸런타인이기도 하고 싸서 들고 왔어요. 역시 세 번째 만든 건 너무 심하긴 했어.”

“네. 세 번째…. 예? 대체 얼마나 먹었길래.”

“그냥 적당히 해 먹었어요.”

“내가 아는 적당히 맞죠?”

“역시 과유불급이에요! 이럴 때 쓰는 표현 맞죠?”

“그 과가 너무너무 과한데?!”

“사소한 건 넘어가요.”

이게 어딜 봐서 사소한 거지?

저렇게 먹는데 그 에너지가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잘 먹을게요. 시하랑 같이 먹으면 되겠다.”

“그렇죠. 나눠 먹는 게 중요하죠. 이리저리 나눠주고. 그런 의미로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시하 굿즈가 인기 엄청 좋았거든요. 그래서 펀딩 어떻냐는 말이 나왔는데.”

“그거 돈 모여야 팔리는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죠.”

“으음 굿즈라…. 흐음. 잘 팔릴 것 같아요?”

“솔직히 모르겠어요. 스티브 백이 고객에게 다 선물해준 거니까.”

“그렇죠. 같은 거 있는데 굳이 살까 싶네요.”

“그래도 시하페페 댓글 보고 혹 하나 보더라고요.”

나는 조금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았다.

어느 정도 모이면 좋을 것 같은데.

괜히 이리저리 시간 쓰는 걸지도 모르고.

“흐음.”

“아! 그럼, 사람 좀 모으고 계획해 보는 거 어때요?”

“사람을?”

“시하도 너튜버를 하는 거죠.”

“아, 그건 전에 제가 안 된다고…….”

알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시하 얼굴 나오는 거 말고요.”

“???”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시하를 데리러 가는 길.

오늘은 참 싱숭생숭한 기분이다.

겨우 하루.

누군가에게는 뭔가 특별한 날이겠지만 누군가에는 그저 평범한 날.

나에게는 뭔가 일이 많은 날이었던 것 같다.

그냥 지금은 시하를 보고 싶다.

“시하야.”

“형아!”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나는 그 온기로 잠시 찜질했다.

으아. 힐링 된다. 아마도 다른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키우며 힘을 얻지 않을까 싶다.

물론 힘도 많이 들겠지만.

“오늘 잘 놀았어?”

“시하 초코 마니 머거써.”

“정말?”

“아아.”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아야 하는데?”

“아?”

시하가 정말이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에 나쁜 악당이 나타나서 막 집을 지어.”

“어떠케?”

“구멍을 막 뚫어서 검은색 집을 지어.”

“다크 초코!”

“으응? 그거랑 다른데?”

“다크 초코 나빠.”

“근데 오늘 형아가 다크 초코 받았는데?”

“아?”

내가 카카오 99%를 보여주자 시하의 눈동자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거 꽤 맛있다?”

“!!!”

나는 장난치고 싶은 마음에 시하의 입에 초코 하나를 쏙 넣어주었다.

시하가 오도독 먹더니 인상을 썼다.

“맛업써…….”

“푸흡.”

“다크 초코 나빠…….”

“큭큭. 그게 어른의 맛이라는 거지.”

“시하 어른 대도 안 머거.”

저 찡그린 표정이 너무나 귀여웠다.

“맛없으면 형아 손에 뱉자. 퉤.”

“아냐.”

맛없으면서 내 손에 뱉기 싫었는지 그대로 인상을 쓰며 다 먹었다.

“잘 먹네. 또 줄까?”

“아냐. 시하가 주께.”

시하가 내 입에 초콜릿을 쏙 넣었다.

나는 맛있게 먹었다.

씁쓸한 맛은 내게 익숙하니까.

“형아. 마시써?”

“응. 형아는 맛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초콜릿을 빤히 쳐다본다.

다시 먹어볼까? 뭐, 그런 고민을 하는 거 같았다.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는 달콤한 것만 먹어. 알았지?”

“왜?”

“그냥. 형아는 그랬으면 해서.”

언젠가 씁쓸한 맛을 먹을 때가 올 것이다.

그래도 이 다크 초콜릿에 있는 달콤함처럼 그 속에 달콤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형아. 빨리 가자! 시하 그림 그려야 해. 조은 생각나써.”

“오, 그래?”

“아아.”

“그럼 오늘은 좀 다르게 그려볼까?”

“아?”

시하의 갸웃거림에 나는 그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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