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화 (276/500)

276화

나는 시하와 함께 수어를 배우는 걸 고민했다.

찾아보니 근처에 수업을 진행하는 학원이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시하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혹시 배울 수 있는지 문의하니 흔쾌히 가능하다는 대답을 해주셨다.

“4살이라고요?”

“네. 날씨 뉴스를 보는데 수어로 전달하는 걸 보고 관심이 갔나 봐요. 어…. 언어라고 보기보다는 암호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귀엽네요. 하긴 아이들 눈에는 언어가 아니라 암호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네. 요즘 뭔가 비밀스럽게 전달하려고 하는 그런 느낌?”

“아하.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요.”

수어 강사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자신만의 비밀이 생길 나이이기는 하네요. 아! 그럼 뭔가 간단하게 준비할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어…. 최대한 간단하고 쉽게 할 건데 뭔가 어려운 게 있다면 옆에서 잘 설명해 주세요. 저보다는 시혁 씨가 설명하는 게 더 쉬울 거예요.”

“으흠.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눈 다음 날.

나는 시하를 데리고 학원을 왔다.

여기 계속 다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렇게 잠깐 준비해 주는 게 감사했다.

주변에는 수강생도 없었다.

“오늘은 잠깐 배우고 사람들이 올 거거든요.”

“그래요?”

“네. 다 같이 수어 뮤지컬을 보고 연기를 해볼 거거든요.”

“와!”

“배운 걸 재밌게 써먹어야죠. 그런데 두 분은 잘 모르시니까 먼저 와서 잠깐만 배우는 시간을 가지는 거예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아니에요. 사실 이 학원이 여유롭거든요.”

“그래도 시간 내준다는 건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쉬어도 되는 시간인데요.”

“하핫.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수어에 관심 두고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괜찮습니다.”

시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내 다리에 찰싹 붙어 있었다.

뭔가 이런 새로운 공간에 온 게 어색한 모양이다.

강사님이 먼저 손을 흔드셨다.

“시하야. 안녕?”

“안녕하세여.”

“오늘 수어를 배울 거야. 여기에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 나중에 뮤지컬도 할 건데 그것도 잘 봐주고.”

“뮤지컬 모예여?”

“어…. 연극 같은 거라고 할까? 노래로 하는 연극?”

“시하 연극 아라!”

나는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아라여… 가 아니라 아라요. 해야지.”

“아라여!”

강사님은 우리들의 모습에 피식 웃으셨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헛기침을 했다.

“흠흠. 시작할게요. 수어는 손동작만으로 언어가 전달되는 게 아닙니다. 이 언어의 감정과 억양은 얼굴의 표정과 입 모양으로도 전달되죠. 그래서 손동작도 중요하지만 눈썹이라든지 입 모양도 중요합니다.”

나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사님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시하도 옆에서 눈썹을 따라 움직였다.

들썩들썩.

“오오오.”

“푸흡.”

감탄의 눈썹 들썩임이었다.

그게 귀여워서 강사님과 나는 웃음이 터졌다.

“형아. 오오오! 야.”

“그래. 오오오. 진짜 잘하는데? 설명만 했는데 엄청 잘 알아들어.”

“시하 다 배어써!”

“아니야. 아직 더 배워야 해.”

강사님이 말했다.

“그럼 간단한 거 배워 볼까요? 사랑합니다는 이렇게.”

“시하 알러뷰 아라여!”

“응?”

“이케이케.”

시하가 손동작을 보여주며 배를 쭈욱 내밀었다.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와! 맞아요. 진짜 잘 아네?”

“샘이 알려져써여.”

“그럼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어볼까요? 윙크도 괜찮아요.”

강사님이 윙크하자 시하도 눈을 감았다.

“시하야. 두 눈을 감으면 어떡해.”

“형아. 두 배 위잉쿠야.”

“아, 그래?”

내가 그런 큰 뜻을 몰랐네. 그렇다면 사랑도 두 배겠구나.

나도 시하를 따라서 지그시 눈을 감고 따라 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저 형제들은 서로에게 왜 저러고 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형제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그때 찰칵 소리가 들렸다.

“응? 강사님?”

“하하하. 너무 귀여워서 찍었어요. 나중에 폰으로 보내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나도 이 모습은 소장 욕구가 샘솟긴 할 것 같았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쉬운 거로 해볼게요.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면 약속이에요. 이건 잘 알죠? 수어도 똑같아요.”

시하가 내 손가락을 걸었다.

“형아. 약속!”

“시하야. 자기 손가락을 걸어야지.”

“시하 아라.”

“알면서 한 거야?!”

그냥 나와 약속해 보고 싶은 거뿐이었다.

요즘 장난기가 좀 늘었단 말이지.

어찌 되었든 강사님에게 간단히 몇 가지 더 배웠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좋아요. 바보. 전화. 기다려요.

생각보다 굉장히 쉬웠다.

기본적으로 아는 행동들도 있고.

전화 같은 경우는 엄지와 새끼를 펴서 입 모양으로 전화해! 하고 자주 쓰는 표현이었다.

아마 강사님은 기억하기 쉬운 거로 알려주시는 모양이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와아아! 시하야. 박수.”

“와아아! 대다내! 대다내!”

짝짝짝.

정말 어떤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간단한 인사를 알게 된 것 같다.

강사님은 시하가 뭔가 엄청난 걸 배웠다는 듯이 이야기하자 민망한 듯이 팔을 긁으셨다.

이 정도 칭찬이 나올 정도로 뭔가 보여준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시하에게는 분명 대단한 거 맞다.

“그, 그럼. 이제 좀만 기다리면 몇 명 올 거거든요. 같이 뮤지컬을 봐요. 물론 연습할 때는 가셔도 되고요.”

“그럼 저희도 잠깐 따로 뮤지컬을 해볼게요.”

“그러면 좋죠.”

나와 시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배운 것을 복습했다.

이왕 배운 거 잊어먹지 않도록.

“어? 누가 와 있네요?”

“네. 오늘 특별 수강자들이에요.”

“와아. 저렇게 어린애는 처음이네.”

나와 시하는 오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들 기분 좋게 받아주는 것 같다.

뭔가 여기 오는 사람은 표정이 풍부하다고 해야 할까?

환한 웃음이 얼굴에 걸려 있다.

“자! 그럼 수어 뮤지컬을 보겠어요.”

“좋지!”

“참고로 말하지만 이건 각색 작가가 참여한 거기 때문에 실제 역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대사를 한 적도 없고요.”

“에이. 그건 다들 알지.”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각색이라고 말해도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이 되기 힘들다.

서로 섞여 있으니까.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냥 전체적인 역사적 흐름만 보듯이 보면 되나?

아, 근데 뮤지컬이니까 뭔가 엄청난 역사적 흐름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처럼 길지는 않으니까.

“자, 그럼 영상 틀게요.”

강사님이 노트북 마우스를 달칵 클릭했다.

내려온 스크린에 빔프로젝터가 영상을 쏜다.

곧바로 제목이 먼저 나온다.

[사랑은 용감함이오.]

모든 배역이 일어서 있다.

먼저 카메라가 비추는 건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황제다.

수어를 하며 진중한 표정을 짓는다.

[클라우디우스 이름으로 명한다! 결혼한 남자는 전쟁을 나가기 두려워하니 결혼을 금지한다.]

더빙된 목소리와 자막이 함께 흘러나온다.

[명을 받듭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다.

카메라가 일반 남녀를 비춘다.

서로를 바라보는 애틋한 표정과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음악이 흘러나오며.

[이제 곧 결혼인데! 우리는 할 수가 없소.]

[이제 맺어질 수 있는데 정말 너무해요!]

[이렇게 괴로운데! 방법이 정말 없단 말이오…….]

화면이 바뀌고 한 사람이 나온다.

사제복을 입었다.

[나 발렌티노는 너무나 안타깝소. 신이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주는데 어찌 결혼을 금한단 말이오.]

발렌티노가 심각한 표정으로 수어를 한다.

[내 그대들을 위해 비밀리에 주례해줄 터이니. 사랑을 이루시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치른다.

카메라는 다시 황제를 비춘다.

[뭐라! 발렌티노 주교가 결혼식 주례를 봐주었다고! 내 명을 무시하는 처사다. 어서 잡아 들여라!]

발렌티노가 나온다.

여전히 음악도 함께 흘러나온다.

[네가 네 죄를 아느냐!]

[황제시여!]

발렌티노가 비장한 모습으로 말한다.

[당신을 명을 어긴 것은 저의 죄이옵니다. 허나 남녀의 사랑을 축복한 건 죄가 아닙니다.]

황제의 분노한 얼굴이 드러난다.

발렌티노가 계속해서 이어 말한다.

[사랑은 용감함이오!]

[연인을 지키는 영웅의 용감함이오!]

[가족을 지키는 병사들의 용감함이오!]

[지킬 게 없는 사람은 전쟁에 나가지 않는 법이고, 사랑이 없는 자는 기댈 곳이 없어지오!]

[사랑의 결실은 병사들의 겁쟁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

[훌륭한 영웅으로 변모시키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니겠소!]

[그러니 나를 죽이시오!]

[내 죽음은 등불이 될 것이니!]

모든 배역이 노래를 부른다.

수어와 함께.

[사랑은 용감함이오! 사랑은 용감함이오! 사랑은 용감함이오!]

황제가 나왔다.

[죽여라]

2월 14일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발렌티노가 몽둥이에 맞아 쓰러진다.

그리고 일어선다.

[나는 신을 믿고 젊은이들의 애정을 믿소. 신이 인간을 사랑으로 품은 것처럼 제 죽음 역시도 사랑으로 품겠소.]

[그대들은 용감한 사람이오.]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으니.]

[제 죽음이 그대들의 두려움이 되지 않기를.]

[잊지 마시오. 그대들은 용감하오.]

모든 배역이 노래한다.

[사랑은 용감함이오! 사랑은 용감함이오! 사랑은 용감함이오!]

마지막으로 발렌티노가 나오며.

[사랑은 용감함이오!]

카메라가 전체 풀샷이 나오며 모든 배역을 보여주며 끝이 났다.

영화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감독, 작가, 연출, 배우 등등.

“와아.”

나는 감탄과 함께 손뼉을 쳤다.

옆에 있는 시하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어 뮤지컬이라는 건 처음 보지만 표정과 손짓이 모든 것을 말하는 걸 알았다.

강사가 앞으로 나왔다.

“흠흠. 이제 곧 밸런타인데이잖아요. 거기에 맞는 수어 뮤지컬을 구해봤습니다. 어때요? 재밌죠?”

“네!”

“그럼 우리 뮤지컬을 해볼까요? 배역은 서로 정해보는 거로?”

사실 배역은 몇 개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건 황제와 발렌티노.

사실 발렌티노가 거의 다 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시하는 어떤 거 할래?”

“시하 항제. 항제.”

“그래? 그럼 형아가 조금 해볼까?”

사실 수어를 모두 다 아는 건 아니었으니까 대충 아는 것만 했다.

“사랑은 용감함이오!”

“아아. 사랑은 이케이케 해.”

“어. 그래. 그렇지. 다음은 시하가 해볼래?”

시하가 턱을 안으로 당긴다.

뭔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도 근엄하지 않고 귀엽기만 하다.

“결혼 금지야. 결혼!”

“수어를 해야지. 말만 하면 어떡해.”

시하가 수어로 ‘사랑해’를 했다가 손을 교차하며 엑스자를 만든다.

저건 뭐지?

“사랑해. 노우. 노우.”

“푸흡. 뭐 뜻은 전해지겠네.”

근데 시하는 이 내용을 잘 이해했을까?

더빙한 목소리가 나오기는 했는데 과연 알아들었는지 궁금하다.

“시하야. 이 내용 알아들은 거 맞지?”

“항제 아찌가 결혼 못 하게 해써. 할부지가 결혼해 해써. 그래서 주거써.”

“응. 그렇지. 용감했지.”

“아아. 할부지 히어로야. 히어로.”

용감하면 히어로. 뭐 이런 공식인가?

아무튼, 황제는 악당 역할인가 보다.

“그런데 결혼이 뭔지 알아?”

“시하 아라. 딴딴딴! 하는 거야. 예쁜 옷도 이버.”

“오오! 시하는 그럼 결혼할 거야?”

“아아. 시하 해.”

“오오! 좋아하는 여자애 있어? 사랑하는 여자애랑 하는 건데.”

“업써. 형아! 시하 결헌하고 시하랑 가치 살아.”

“내가 너 결혼하고도 같이 살아야 해? 그건 아니지.”

시하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입을 살짝 벌렸다.

“왜? 가치 안 대?”

“응.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지.”

“그럼 시하 결헌 안 해. 안 할래.”

“큭큭. 아직 하려면 한참 걸릴 거야.”

그때 되어서 분명 말이 바뀌겠지만 지금은 결혼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게 분명하다.

“형아!”

“응?”

“형아도 결헌 안 대! 시하랑 가치 살아!”

“푸흡. 큭큭.”

시하가 손등을 들어 나의 턱에 받쳤다.

이게 뭐 하는 거지?

“기다려여. 기다려여.”

“시하야. 그거 자기 턱에 갖다 대는 거야…….”

“아?”

수어에 기다려요는 손등으로 자신의 턱을 받치는 모양새다.

그걸 내 턱에 갖다 댔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언어 이렇게 마음대로 쓰는 거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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