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아침이 되었다.
시하는 어젯밤에 뭘 그릴지 열심히 고민했다.
그리고 답이 나왔다.
시하가 좋아하는 형아와 페페를 그리기로.
하지만 시혁이 몰래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시하의 그림을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확인해 보니까.
패드에 저장되어 있는 그림은 숨기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걸 어린이집에서 하기로 했다.
“형아? 일어나써?”
“코오-”
시혁이 고른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걸었다.
패드를 쥐고 펭귄 가방에 쏙 넣었다.
이걸로 두 번째 숨김이 성립되었다.
“휴~”
시하가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손에 묻어나오는 건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오늘의 일과를 할 차례. 형아가 덮은 이불로 꼬물꼬물 들어가 배 위에 안착했다.
그런 뒤 그대로 이불을 팍 하고 벗겨냈다.
시혁의 상체가 바깥 공기를 맞았다.
“형아. 일나. 일나.”
“으윽.”
이불 안과 다르게 상대적으로 찬 공기 때문에 눈이 떠진다.
“추워.”
“헉! 형아 추어?”
시하는 벌떡 일어나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곤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러.”
“보일러는 대체 왜? 아니. 갑자기 숨바꼭질 노래를?”
“숨바꼬질? 형아. 숨바꼬질할까?”
“이제 일어나야지.”
“일나서 해?”
“아니. 어린이집 갈 준비해야지. 시하야. 가는 거 잊어버린 거 아니지?”
형아랑 숨바꼭질할 생각에 잠깐 빠져 있다가 어린이집에 꼭 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냈다.
“아코!”
시하가 이마를 탁 쳤다.
시혁은 그런 모습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말랑말랑한 볼을 두 손으로 만지며.
“씻고 밥 먹자. 알았지?”
“시하가 도아주까?”
“불은 위험하니까 다른 것 좀 해줄래? 수저를 놓는다든지?”
“시하 할 수 이써.”
“그래. 고맙다.”
시하와 시혁은 씻고 아침 준비를 했다.
형아에게 수저를 받아서 상 위에 올렸다.
“이건 형아 꺼. 이건 시하 꺼.”
반찬도 조심히 올리고 앉아서 형아를 빤히 보았다.
밥을 푸면 받아서 열심히 옮겼다.
다 끝나면 앉아서 발을 동동 구르며 형아를 기다렸다.
“많이 배고프지? 다 했어. 자. 끝!”
“아아!”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숩니다.”
오물오물.
“형아. 마시써. 고마어~”
“푸흡. 역시 계란후라이가 짱이지?”
“아아. 반숙 조아. 반숙.”
“노른자 밥 위에 터뜨려.”
“아아.”
뽁. 정말 맛있는 건 안에서 터지며 흘러나온다.
시하는 오늘 선물이 완성되는 게 노른자처럼 기대가 되었다.
***
어린이집에서 시혁을 떠나보냈다.
문을 닫고 가는 모습을 다 보고 나서야 신발장에서 밑창을 들고 만 원을 꺼냈다.
선생님은 그런 시하의 모습을 보며 푸흡 하고 웃음을 참았다.
“샘. 마넌 숨겨써.”
“하필 거기다 숨기고 왔어?”
“만화에서 바써. 이케이케 숨겨서 안 들켜써.”
“그렇구나. 만화가 참 많은 걸 알려주는구나?”
“형아 선물 살 수 이써.”
그 이야기를 들은 승준이 시하에게 다가왔다.
“시하야. 거기 말고 양말에도 숨길 수 있어.”
“아?”
시하가 그런 사실이 있었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하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모자에 숨기면 되잖아. 이렇게 머리 위에 놓고.”
“아아!”
뭔가 아이들이 숨기는 이야기로 돌아갔다.
세 아이가 연주를 보았다.
너도 의견을 말하라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했다.
“난 바이올린 가방에 넣으면 돼.”
뭔가 작당을 모의하는 풍경이 되어 버렸다.
시하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에 있는 돈을 보았다.
“샘! 샘!”
“으응?”
“문도 삼춘한테 가여. 문도 삼춘.”
“아, 형아 생일 선물? 근데 시하는 그림 다 그렸어?”
“아냐. 안 그려써여.”
그것도 까먹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신발 밑창에 돈을 넣었다.
선생님은 의문이 들었다.
이제 돈을 거기에 넣을 필요가 있니?
“샘. 시하 그림 그려. 쉿!”
“선생님은 아무 말도 안 했단다.”
“쉿. 비밀이야.”
입술에 붙인 검지를 떼고 가방에서 패드를 꺼냈다.
어린이집에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쌍둥이와 연주가 궁금해서 시하의 뒤에서 바라만 보았다.
패드의 화면이 켜지고 펜을 잡았다.
앱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미 머릿속에서 구상이 끝나서 시하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생각해둔 페페의 캐릭터 그림은 세 포즈였고 거기에 맞게 선을 단숨에 그었다.
따로 선화를 딸 필요가 없이 단순한 그림이었다.
“와아! 잘 그린다!”
“시하 멋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그리지?”
종수랑 아이들도 어린이집에 도착했는지 슬금슬금 시하의 뒤로 왔다.
“색칠.”
시하가 펜으로 색칠을 시작했다.
오로지 감각적인 색감으로.
빠르게 완성되어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선생님은 놀랐다.
과장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뭔가 저렇게 그리는 걸 보면 빠져든다고 해야 할까?
“다 해따!”
“우와! 대박! 페페네!”
“시하 엄청나.”
“역시 전에 공룡으로 1위 한 이유가 있었네.”
시하는 저장을 누르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샘. 이제 가?”
“흐음. 나중에 점심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문도 삼촌이 아니라 도환 삼촌도 일해야지. 그렇지?”
“아? 아아!”
시하가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럼 이제 모하지?”
“후후후. 그래서 선생님이 오늘 여러분이 즐겁게 놀 수 있는 걸 준비했답니다.”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꺼냈다.
승준이 손을 들어 먼저 말했다.
“쌤! 또 이야기하려고 그러죠?”
“아니!”
선생님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늘 준비한 건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늘 시하가 열심히 숨기고 비밀을 만들었잖니?”
“네!”
“그래서 선생님이 우리만 알 수 있는 암호를 가르쳐주려고요. 숫자만으로 암호를 알 수가 있어요!”
“정말요?”
“이를테면 재밌는 숫자놀이지. 어른들도 이렇게 놀았어.”
“!!!”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어른들의 놀이! 무척이나 궁금하고 자극적인 단어였다.
과연 대체 어른들은 숫자로 무슨 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걸까?
“그건 바로 삐삐 암호예요!”
“삐삐?”
승준이 말했다.
“나 알아!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야!”
“하나도 그거 아라. 이렇게 긴 스타킹 신고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써.”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때 종수가 말했다.
“쯧쯧. 그거 아니거든. 삐삐는 말이야. 옛날옛날에 폰이 없었던 때에 쓰던 거야. 폰 대신.”
시하가 놀랐다는 얼굴을 했다.
“폰 엄써?”
“그래.”
종수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마구 뽐냈다.
시하는 눈을 깜빡거렸다.
“폰 엄스면 어떠케 저나해?”
“어? 그냥 전화기로?”
“전화기? 폰 업자나?”
“?”
선생님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제 아이들은 전화기도 모르는구나.
요즘 집에 전화기를 들여놓는 곳이 잘 없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인식의 차이가 벌어질 때마다 나이를 먹은 것 같아서 슬플 수밖에 없다.
“여러분 가게에 이런 전화기 봤죠? 그거 썼어요. 공중전화도 있는데.”
“공중전화 모야?”
“흐윽. 동전 넣으면 전화할 수 있는 데예요. 길거리에 여러 개 있었죠. 이렇게 서서 전화를 해요.”
“자판기야. 자판기!”
동전 넣는다. 그건 자판기다. 이런 공식이 시하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이미 시하의 상상에는 길거리 중간중간에 자판기같이 생긴 상자에 동전을 넣고 전화하는 거였다.
“아마…. 여기 대학 근처에도 있을 거예요. 응! 다음에 나갈 때 한번 찾아보세요.”
“네!”
지금은 저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스케치북을 넘겼다.
[숫자 암호!]
“자, 처음에는 쉬운 거로 해볼까요? ‘빨리빨리’를 숫자로 표현하면 어떤 걸까요?”
“?”
“바로 8282입니다! 발음이 비슷하죠?”
“비스태!”
“그럼 천사를 숫자로 표현하면?”
종수가 손을 들었다.
“1004요! 발음이 천사예요!”
“네. 맞아요. 총수 똑똑하구나. 천이라는 단위도 알고.”
“선생님 저 종수인데요?”
“아, 미안해. 종수야. 너무 기뻐서 발음이 강해졌어.”
선생님이 사과했지만 종수는 뭔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실수일까? 그런 의심이 피어오른다.
“자자. 그럼 다음 문제 갑니다.”
[11010]
“이게 뭘까요? 암호를 맞춰 봐요.”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세로로 돌렸다.
“바로 ‘흥’이랍니다! 글자 흥이에요.”
“와아!”
“시하 글자 몰라.”
“마자! 글자 몰라!”
아직 한글을 제대로 쓰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이 미안해.”
“딴 거. 딴 거.”
“알겠어요. 그럼 이건요!”
선생님은 이미 신이나 있었다.
아이들도 맞추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1592–임진왜란]
“일오구이?”
선생님이 말했다.
“일오구 이쓰면 안 돼! 적이 쳐들어와. 크흠. 죄송합니다. 딴 거 할게요. 이게 진짜예요.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암호죠.”
[7942]
승준이 벌떡 일어섰다.
“친구 사이! 푸하하. 이건 내가 잘 알지!”
“그래. 승준아. 진정하렴.”
시하가 손을 들었다.
“응? 시하야.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니?”
“시하도 암호 이써.”
“오! 진짜?”
“아아. 숫자 암호야. 숫자 암호. 시하 문제 내고 시퍼.”
“그래. 시하야. 나와서 한번 문제 내보렴.”
시하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보여주었다.
하나, 둘, 다섯.
“?”
“125? 하나 모르게써.”
“모지?”
그때 은우가 손을 들었다.
“이게 머선 일이오~! 뽁!”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입 벌린 체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튕겨서 뽁 소리를 냈다.
“어때 맞지?”
“아? 아냐.”
“이게 머선 일이오~! 가 아니라고?”
“아아. 아냐.”
“그럼 뭔데? 모르겠어”
시하가 배를 쭈욱 내밀고 말했다.
“형아랑. 시하 생일!”
시하 생일은 12월 5일.
시혁의 생일은 1월 25일.
숫자를 합치면 같았다.
“형아랑 가타!”
시하는 아주 당당했다.
종수가 입을 살짝 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진짜 이게 머선 일이오…….”
***
시하는 문도환을 찾았다.
이미 유다희 선생님에게 연락을 받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도 삼춘!”
“어. 왔어?”
“형아 선물 가지고 와써여?”
“응. 가지고 왔지. 시하는 돈 가지고 왔어?”
“아아.”
시하가 신발을 벗었다.
문도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신발은 왜 벗어? 여기 신발 신고 있어도 되는데?”
“여기 이써.”
밑창에서 만원을 쏙 뽑는다.
“대체 거기 왜 있는 거야?”
“형아에게 비밀이야. 비밀. 쉿! 저굼통에서 꺼내써. 몰래. 몰래.”
“안 들키고 꺼내서 거기에 숨겼구나?”
“아아.”
“용케도 저기에 숨길 생각을 했네.”
“문도 삼춘. 여기!”
시하가 해맑게 내밀었다.
문도환은 찝찝한 표정으로 만 원을 받았다.
“시하야. 발은 매일 씻지? 냄새 안 나지?”
“시하 발 깨꾸태여. 형아가 앙 물어.”
“거짓말하지 마. 아무리 깨끗해도 앙 물 정도는 아니야.”
“정말이야. 시하 아기 때 그래써.”
“너 대체 몇 살 때 이야기를 하는 거야?”
“몰라.”
시하는 기억하고 있다.
형아가 아기 때 살짝 깨물어봤던 사실을.
“으음. 아무튼, 여기 있어. 그림은 들고 왔어? 바로 여기서 프린트해 줄게.”
“정말?”
“당연하지. 여기 이 사이즈 속지에 하면 되지.”
시하가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서 문도환에게 주었다.
저장되어 있는 파일을 컴퓨터로 옮긴 후.
“이거 비밀이야. 지어. 지어.”
“어? 지워?”
“아니. 다른 데 너어.”
“아! 삼촌 컴퓨터에 있으니까 나중에 생일 끝나면 형아 메일로 보내줄게. 그럼 됐지?”
“아아.”
시하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였다.
위잉. 위잉. 위잉.
시하가 그린 그림이 프린트되어 나왔다.
“자, 잘 봐. 여기 부분을 툭 하고 때면 텀블러랑 분리가 되거든. 그럼 이제 그림을 말아서 넣으면.”
“!!!”
“완성.”
“형아 선물 다해따.”
“이제 다시 텀블러 상자에 넣어서 포장하면 끝. 내가 포장지도 사 왔어. 뭐 대충 다 합해서 만 원쯤 되는데 정확하게 거스름돈을 줄까?”
“아냐. 시하 아라. 팁이야. 팁.”
“푸흡. 그래. 고맙다.”
문도환이 깨끗하게 포장을 해서 테이프로 붙였다.
“이제 진짜 끝.”
“아아. 문도 삼춘. 고마어여~”
“큭큭. 그래.”
시하가 선물을 품에 꼬옥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