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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화 (272/500)

272화

시간을 거슬러 설날 5일 전.

정확히는 1월 23일의 일이다.

시하는 여느 때와 같이 어린이집에 있었는데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달력을 보다가 손바닥을 펴서 숫자를 센다.

“한 밤, 두 밤, 서이 밤.”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빰에 댔다.

시하의 머리는 큰일 났다는 듯이 경종이 마구 울렸다.

“시하야! 놀자!”

그런 고민을 모르는 승준이 시하와 어깨동무를 했다.

연주와 하나도 시하 곁에 다가와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지 상의하러 왔다.

“시하야! 오늘은 숨바꼭질할까? 어때 연주야?”

“나? 나는 아무거나 다 재밌어.”

뭘 하든 별 상관없다는 듯이 연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시하는 셋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승준이 그런 시하 귀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하야! 시하야!”

“아?”

시하가 큰 소리에 펄쩍 뛰며 어깨동무를 풀고 승준을 보았다.

“왜?”

“뭐 하고 놀 거냐니까. 우리 밖에 나갈까? 사커 할래?”

“아냐. 시하 바빠.”

“응? 아무것도 안 했지 않아?”

“시하 고민이야. 고민.”

“무슨 고민인데?”

“형아 생일 선물.”

“으응? 시혀기 형아 생일이야? 오늘?”

“아냐. 1얼 25일이야.”

시하가 달력에 1월 25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쌍둥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런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시하 선물 고민이야.”

“으음. 어렵다. 시혁이 형아에게 뭘 줘야 하지?”

“시혀기 오빠는 머 갖고 노라?”

시하는 시혁을 떠올렸다.

그리고 낸 답은 이거였다.

“노투북!”

“그럼 노투북 선물하자!”

“아아!”

잘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하지만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존재가 있었으니.

“노트북 엄청 비싸거든. 그거 우리가 못 사.”

“아?”

종수가 스마트폰을 꺼내서 검색해 주었다.

가격이 주르륵 나온다.

“최신 기계는 170만 원 가까이 한다고!”

“아?”

170만 원이 얼마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숫자의 길이를 열심히 셌다.

“일곱. 만타!”

“그래. 길이가 이만큼 된다고.”

“살 수 이써. 시하 돈 이써.”

“이 돈이 있다고?!”

“아아.”

시하는 자기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8자리였다.

천만 원이 넘게 있는 걸 기억하고 있다.

처음 출시한 이모티콘 금액들, 팝업북으로 판 돈, 그리고 기타 등등 시하가 받은 돈이 모두 들어 있었다.

“거, 거짓말! 시혀기 형아 돈이겠지.”

“노투북 어디서 사?”

시하는 딱히 종수의 의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종수는 믿을 수 없었다.

시하가 그냥 돈 많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거 비싸서 못 산다니까. 그리고 이런 건 우리 같은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안 팔아. 어려서.”

“왜?”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통장에 그 돈이 있어도 엄마, 아빠랑 같이 은행 안 가면 못 꺼내거든.”

“정말? 안 대! 형아 선물 비밀이야.”

비밀로 선물을 줘야 하기 때문에 돈을 꺼낼 수 없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돼지 저금통에 돈이 있다는 걸 기억했다.

“대지 저굼통.”

“거기에 돈 얼마 있는데? 백만 원은 없지?”

“아아. 서이 마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넣었던 기억이 있었다.

각종 동전도 생기면 시혁이 시하 저금통에 쏙쏙 넣었다.

용돈이라면서.

“그거로 사면 되겠네. 노트북은 아무튼 안 돼.”

“아아.”

똑똑한 종수의 말이라서 시하는 믿었다.

다시 고민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형아는 노트북으로 일하는 것밖에 본 적이 없어서 뭔가 좋아하는 게 있는지 몰랐다.

“시하야.”

하나가 시하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시혀기 오빠가 좋아하는 선물을 알 것 같은 친구에게.”

“아아!”

시하가 좋은 생각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빨리 펭귄 가방을 메고 신발장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꼬물꼬물 신발을 신고 문에 찰싹 붙었다.

“자! 동작 그만!”

선생님이 시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그대로 들었다.

대롱대롱.

“아?”

“시하야. 어딜 가려고?”

시하가 뭔가 단어를 생각하더니 떠올랐다는 듯이 팔을 파닥파닥거렸다.

“시하 조사하러 가. 조사!”

“응?”

“형아 생일 선물.”

“그건 선생님도 들어서 알고 있어.”

“문도 삼춘한테. 물어 바.”

“오~ 그래? 꼭 물어보러 가야겠어?”

“아아. 형아 몰래. 비밀이야. 비밀.”

“그렇구나.”

선생님이 씨익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생님이랑 같이 나가자.”

“아? 샘 왜?”

“원래 이런 건 어른이랑 같이 가야 하는 거예요.”

그때 쌍둥이랑 연주도 튀어나왔다.

“쌤! 나도! 나도!”

“하나도. 하나도.”

“전 산책하고 싶어요.”

어쩌다 보니 다 같이 가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원장님이 손을 흔들며 잘 갔다 오라고 했다.

유다희 선생님의 얼굴엔 살짝 아쉬움이 감돌았다.

***

문도환은 문을 살짝 연 유다희 선생님을 보았다.

환한 미소를 짓다가 아이들 네 명이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서 와보라는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여긴 어떻게?”

“일단 저기 의자에 앉아요. 저 봐서 좋죠?”

“네. 좋네요.”

“시하가 꼭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아! 분명 말하는데 이건 전부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요.”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하.”

“그렇죠? 특히 시혁 씨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아, 시혁이요?”

“네네. 시하가 비밀로 남겨두고 싶어 하거든요.”

문도환이 시하를 보았다.

“문도 삼춘!”

“응. 도환 삼촌이라고 하면 좋겠는데.”

“문도 삼춘.”

문도는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뭐가 묻고 싶은데?”

“시하 형아 선물 고민해써. 형아 머 조아해?”

“으음.”

문도환이 턱을 쓸며 시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혁이가 좋아하는 거라면 시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늘 생각과 행동이 시하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실제로 정말 좋아하는 동생이기도 하다.

“시하밖에 생각 안 나는데.”

“아?”

“형아는 시하를 정말 좋아하잖아.”

“구럼 형아 선물로 시하 주까?”

“이미 있는 거 아니야?”

“아냐. 형아 시하 껀데 시하 형아 꺼 하라 해.”

“그러냐. 어려운 말이네.”

문도환의 생각에는 거기서 거기인 말이지만 시하는 뭔가 다른가 보다.

“문도. 시하 저굼통에 서이 마넌 이써. 이거로 머 사까?”

“방금 건 농담이었어?”

“아?”

시하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선물이 자기겠냐는 듯이.

“우리 시하 많이 똑똑해졌네.”

“시하 언래 떡떡해.”

“그래. 떡떡하다. 떡떡.”

“떡 마시써.”

가끔 이야기하다 보면 샛길로 센다.

문도환이 진지하게 생각해서 이야기해 줬다.

“시혁이면 시하가 주는 걸 뭐든 좋아할 거야. 3만 원이면 텀블러 어때?”

“아? 텀 불러? 텀 누구야?”

“아니. 으음. 이런 컵 같은 건데.”

문도환이 시하에게 폰으로 텀블러를 보여주었다.

“아아. 시하 아라. 이거 바써.”

“시혁이가 커피 말고 차나 티를 많이 타 마시거든. 물론 커피도 가끔 먹긴 하고. 어때?”

“3마넌에 살 수 이써?”

“응. 충분하지. 거기에 이런 텀블러 사면 시하 그림도 넣을 수 있어. 프린트해서 여기 속지를 쏙 넣으면 되겠지?”

시하는 문도환의 말에 텀블러에 팍 하고 꽂혔다.

돈으로 사기도 하고 손으로 만든 걸 함께 줄 수 있는 절묘한 선물이었다.

“시하 이거! 이거!”

“후우.”

문도환은 뭔가 하나 끝냈다는 듯이 땀을 닦았다.

엄청 기대하고 물으러 왔을 텐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으면 많이 실망했을 거다.

그리고 유다희 선생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준 것이다.

“내가 주문해둘 테니까 시하는 어디 보자. 이 카드 쓰면 할인이네. 7천 원 들고 오면 돼. 알았지?”

“칠 천언?”

“어. 그냥 초록색 돈 하나 들고 오면 돼.”

“시하 아라. 세종대왕!”

“오! 그래. 세종대왕님 하나 들고 오면 돼. 알았지?”

“아아.”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들키면 안 된다?”

“시하 비밀이야. 비밀.”

문도환은 뭔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몰래 돼지 저금통에 돈을 빼는 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심지어 그림 그리는 것도 힘들 것 같다.

그때 유다희 선생님이 옆에 앉았다.

옆구리를 툭 하고 친다.

“정말 엄청 진지하게 고민해 주시네요?”

“하하. 시혁이 생일인데 그래야죠.”

“그리고 엄청 좋은 선물을 떠올린 것 같아요.”

“뭐 선물이야 많이 고민했던…….”

문도환이 말을 멈췄다.

유다희 선생님의 눈이 호선으로 휘었다.

“누구 선물을 그렇게 많이 고민했을까? 그쵸?”

“친, 친구요. 친구들이 정말 많거든요.”

“저번 달은 크리스마스였는데요? 그사이에 생일 선물 고민을 그렇게 많이 했다고요? 친구가 엄청 많았나 봐요.”

“하하하. 하필 1월생이 많네요.”

유다희 선생님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문도환을 바라보았다.

“난 크리스마스 선물 많이 고민했는데. 비싸면 부담스럽고 싸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이고.”

“아, 그, 그렇습니까?”

문도환이 살며시 입을 가리며 쑥스러워했다.

누구 선물인지 말은 안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연주와 하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흥미로워했다.

둘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연주야. 두 사람 좋아하나 봐.”

“하나야. 이 드라마 재밌다.”

“헤헤헤. 엄마한테 말해 줘야지.”

“나도.”

어린이집 엄마들이 알면 전부가 안다는 걸 유다희 선생님은 간과하고 있었다.

엄마들의 수다는 그 어떤 소문보다도 빠르니까.

연주와 하나는 서로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승준은 따로 고민 중이다.

“나도 사커공 만들어서 시혁이 형아에게 줘야지! 근데 너희 둘은 뭘 그렇게 속닥거려?”

하나가 오빠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바보 오승준.”

“대체 왜!”

“하나는 시혀기 오빠에게 노래 선물 할 거야.”

“자기도 잘하는 거 주면서 왜 난 바본데.”

“오빠는 몰라도 돼.”

옆에서 연주가 키득거렸다.

“진짜 승준이는 몰라도 되겠다.”

승준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

시하는 형아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시혁이 부엌에서 저녁을 차리고 있는 것을 보고 방에 쏙 들어갔다.

먼저 노리는 것은 돼지저금통.

얼마나 있는지 먼저 흔들어보았다.

짤랑짤랑.

“쉿! 조용히 해.”

시하는 돼지에게 주의를 시켰다.

짤랑짤랑.

“마나. 마나.”

시하가 돼지코를 똑 하고 때었다.

안 손가락을 집어넣었지만 닿는 것은 동전뿐이었다.

할 수 없이 뒤집어서 탈탈 털었다.

짤랑짤랑.

“쉿. 조용히. 비밀이야. 비밀.”

어쩔 수 없이 새어 나가는 소리가 있었다.

“만타! 하나, 둘, 서이, 넷.”

괜히 돈들을 보면 얼만지 세어보고 싶은 것처럼 시하도 똑같았다.

“시하야. 뭐 해?”

“!!!”

시하가 딱 걸렸다는 듯이 몸을 굳혔다.

시혁은 그저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시하 돈 세.”

적절한 임기응변이었다.

“푸흡. 모아둔 거 세고 싶었나 보네. 와! 많이 모았네? 나중에 은행 가서 넣을까?”

“아냐!”

그러면 큰일 난다.

이번에 시하는 배웠다. 돼지저금통에 있어야 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왜?”

시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또 다른 임기응변을 했다.

“대지 배고파. 배고프면 힘드러.”

“푸흡. 아 진짜. 알았어. 돼지도 굶으면 안 되지. 밥 거의 다 차렸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우리도 밥 먹자.”

“고마어~”

“뭐가 또 고마워. 하여간 웃기다니까.”

시혁이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자 시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돈을 싹싹 모아서 다시 저금통에 넣었다.

단 하나. 만 원만 빼고.

“웅.”

문제는 이 만원을 가방에 넣어야 한다는 거다.

형아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

시하가 살며시 방을 나왔다.

형아는 예쁘게 접시에 반찬을 담고 있었다.

재빨리 시하는 신발에 가서 밑창에 쏙 넣었다.

시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해따.”

만화에서 돈을 여기에 숨기는 걸 본 적 있었다.

덕분에 안 들키고 잘 숨겼다.

“그림.”

시하에게는 이제 몰래 그림 그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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