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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화 (269/500)

269화

-이시혁 8살 때.

이장혁은 설 전날에 친구를 만났다.

CIA에 소속된 그가 왜 한국에 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나서 반갑기는 했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보기 힘들었으니까.

가끔 전화로 연락하곤 했다.

물론 장기적인 임무가 있을 때는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많이 지쳐 보이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임무가 힘들어서.”

“그래도 끝났으니 여기 한국에 온 거 아니야?”

“그렇지. 너 보러 온 거지.”

“사실 여기서 할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난 여기서 할 일 없어. 오로지 위험한 데가 내 전문이거든.」

“한국어 힘들어서 말 바꾼다?”

「어쩔 수 없잖아. 임무 한 번 갔다 오면 다 까먹는다고.」

“거짓말하네. 그 기억력으로 누가 임무를 맡냐.”

「얼씨구? 난 몸 쓰는 거 전문이야. 너와 다르게 머리 쓰는 쪽이 아니라.」

이장혁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때문인지 아니면 옛 생각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어섰다.

「아내는 잘 지내고 있고?」

“이혼했어.”

「아, 그래? 아들은?」

“잘 있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그를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배려할 줄은 아는 놈이었구나 싶어서 조금 놀랐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야. 아무것도.”

웅웅.

이장혁은 진동이 울린 폰을 보았다.

아버지에게 온 문자였다.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 깊은 한숨이 나온다.

뒤에서 지켜보던 그가 말했다.

「뭐야. 아직도 아버지랑 연락해?」

“연락하지. 그럼.”

「왜 아직도 끼고 사는 거야. 난 이해가 안 돼.」

“가족이니까.”

「가족이 뭐 이래? 독립하면 각자 살아나가는 거지.」

이장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쉽지 않지. 끊어내는 건.”

「이혼도 한 마당에 아버지라도 못 끊을까.」

“못 끊어.”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했다.

“별 이유는 아닌데. 일단 시혁이 때문이야.”

「응?」

“가족은 이해득실로 대하지 말았으면 해서. 내가 아버지가 필요 없다고 버려버린다면 시혁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거야. 할아버지가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애가 내 눈치를 자주 봐. 내가 버리면 이렇게 생각할걸? 아! 나는 아빠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겠구나. 아니면 버리겠구나.”

「비약이 심해.」

“성장기인 아들에게 과연 심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에 속담이 하나 있지.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장혁은 이 속담을 가슴 깊이 기억하고 있다.

환경이라는 것이 별거 아니다.

주변에서 하는 행동, 자세, 금전, 인간관계 등등.

그 모든 관련된 요소요소가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내가 힘들어서, 필요에 따라 버려도 된다는 걸 가르쳤다면 나는 필요와 상관없이 품는다는 걸 가르치고 싶어. 언젠가 시혁이도 가족을 꾸릴 거니까.”

「과연.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네. 어렵다. 어려워.」

“난 분명 아버지를 원망해.”

이장혁이 폰을 들어서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그래도 버릴 수는 없어. 내 아버지니까.”

「난 절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야. 머리 아프고 나랑 너무 어울리지 않아.」

“자식 생기면 좋아.”

「좋기는. 골치 아픈 일이 더 많지. 난 너처럼 막 이해관계가 얽히고 교육은 이렇게 해야 하고. 이런 생각을 못 해. 아, 내가 싫으면 관계를 끊고 그냥 손 흔들어주지.」

“열 받으면 들이박고. 그치?”

「들이박기는. 빵! 총 쏘면 끝이지.」

“그래도 함부로 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잘 알지.”

이장혁이 앞에 있는 전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막걸리를 들어서 술잔을 부딪친다.

“크흐. 역시 한국은 막걸리야!”

“조용히 좀 말해. 쪽팔리니까.”

“아, 장혁. 여기 이모에게 막걸리 한 병 좀 더 달라고 해봐.”

“싫어.”

“이모! 막걸리 한 병만!”

“한국어 잘만 하네.”

“내가 이런 것만 기억해. 아! 자식은 별로라도 조까는 좋은 거 같아. 나도 소개 좀 해줘.”

“조까가 아니라 조카야. 발음 조심 좀 해.”

“아, 그래. 조까.”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세상에 k 발음을 못 하는 외국인이 어딨어.”

“한, 한쿡어 잘 모태여!”

“지랄. 불리할 때만 한국어 못 한단다.”

“너 나한테 욕했지!”

“추임새야. 추임새. 추임새가 뭔지 알아?”

“지랄. 앗! 한, 한쿡어 잘 모태여!”

“쇼하고 있네.”

둘은 막걸리를 쭈욱 들이켰다.

그가 주머니에 봉투를 꺼내며 이장혁에게 내밀었다.

“이거 조카 용돈.”

“응?”

“이걸 뭐라더라. 한국어로. 아! 쌔비! 돈!”

“세뱃돈이겠지. 너 자꾸 못 하는 척할래? 쌔비긴 뭘 쌔벼!”

“한국은 내일 되면 돈 엄청 주는 거 아니야. 그게 훔치는 거지.”

“새끼. 일부러 그런 거 맞네!”

“뭐, 뭐라고? 잘못 들었어. 한쿡어. 어려어요!”

이장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봉투 안을 보았다.

“야! 달러잖아!”

“외국인 삼촌은 달러지. 어때 멋있지? 아마 조카도.”

그가 입을 오므리고 방울 터지는 소리를 맛깔나게 냈다.

“뻑! 갈걸?”

“가긴 어딜 가? 너 맨날 이상한 것만 배우는데 애한테서 이상한 거 가르치면 진짜 맞는다?”

“잘 모르케써요!”

“진짜 가끔 한 대 때리고 싶다니까.”

이장혁은 시혁에게 이런 삼촌을 소개시켜 주지 말자고 나름 결심했다.

온 마을이 키워야 하지만 저런 삼촌은 제외다.

***

-현재.

나는 할아버지가 주신 복주머니를 보고 눈을 껌뻑거렸다.

10장. 50만 원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용돈으로 주기에는 굉장히 과한 돈이다.

“할, 할아버지. 뭔가 잘못 넣으신 거 아니에요?”

“아무리 늙었어도 아직 숫자는 잘 센단다. 내가 화투를 얼마나 잘하는데. 문제는 친구들이 나랑 안 하려고 한다는 거지.”

아무래도 마술사시니까 화투판에 못 끼는 게 아닐까요?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하지만 이건 받기에 굉장히 과한데요.”

“시하 맛난 거 사줘. 애 키우는데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나 돈 많다.”

“그건 알고 있는데요.”

“아니. 어떻게 알았어?”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좀 많아 보였다.

이런 곳에 사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돈 쓸 데가 없다고 해도 이건.”

“그냥 받아둬. 어차피 나 돈도 버는데 용돈까지 받아. 아주 풍족해.”

“네. 감사합니다.”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친척들 많은 곳은 아이가 백 정도 받더구나.”

“네?”

“백 정도는 아니더라도 50이면 충분히 많이 받은 편이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아버지가 살며시 웃으셨다.

“그냥 그렇다고. 자, 이제 집에 갈 시간 아니니?”

“아…….”

“우리 아들이 무슨 마음인지 저녁 시간에 온다고 하더구나.”

“아! 그럼 저희 이제 갈게요.”

“그래. 그래. 내가 전을 좀 싸줄 테니 그거 들고 가.”

“네? 그래도 돼요?”

“그럼. 어차피 며느리가 뭔가 싸 와서 들고 올 거거든. 이거 다 못 먹는다. 냉장고에 있으면 썩어서 버리기만 하지.”

“감사합니다.”

분명 설에는 아무 친척에게 가지 않았는데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에 못지않게 든든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이 모든 걸 생각해서 해주시는 걸지도 모르겠다.

“자. 여기다 담아뒀다. 둘이서 먹을 양은 충분할 거야.”

“잘 먹겠습니다. 시하야. 할아버지에게 인사해야지.”

“할부지. 잘 먹겠습니다. 또 오께여!”

할아버지가 ‘그래, 그러렴.’ 하면서 손을 흔드셨다.

앞에 있는 강아지들도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든다.

시하와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왔다.

“형아. 재미써.”

“응? 뭐가?”

“설!”

“오늘 재밌었어?”

“아아. 차차도 가치 놀아써.”

다른 것도 다 재밌었지만 차차랑 놀던 게 제일 재밌었지 않나 싶다.

“형아. 시하 돈 마나.”

“그래. 돈 많네. 아! 우리 강아지 말고 딴 거 키울까? 이 돈이면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모야?”

“뭐냐면 물고기!”

“물고기?!”

강아지나 고양이는 집안에서 키울 수 없으니 작은 어항을 마련해서 물고기라도 키우면 시하가 재밌어하지 않을까 싶다.

강아지나 고양이보다 손이 덜 갈 것 같았다.

“형아. 고래 키어. 고래.”

“그건 좀.”

그걸 키우려면 아쿠아리움을 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집에 안 들어올걸?”

“왜?”

“어~엄~청~! 크거든.”

“집보다 더 커?”

“응. 집만 한 크기지. 아마? 그러면 고래가 좁아서 움직이기 힘들어하겠지? 시하가 형아 품에서 매일매일 있다고 생각해봐. 불편하겠지?”

“아냐. 조아.”

“어?”

어…. 그렇지. 아늑하고 좋긴 하겠지. 내가 비유를 잘못했네.

“시하가 저기 장롱에 계속 산다고 해봐. 화장실도 못 가고. 불편하겠지?”

“숨바꼭질 재미써!”

그래. 숨바꼭질이 재밌…. 그게 아니잖아!

“흠흠.”

“똥 모 싸면 불편해.”

“그렇지!”

“아아. 고래 지베 키우려면 엄청 커야 해.”

“그렇지. 그렇지.”

“형아. 시하 돈 마니 버러서 집 사. 집.”

“그래. 꼭 고래 키울 수 있을 크기인 집을 사.”

대체 몇 평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정도 돈을 벌기도 힘들 것 같았다.

“아냐. 고래 안 키어.”

“응?”

“페페 키어.”

그것도 키우려면 아쿠아리움을 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땅과 건물 세우는 것도 일이지만 유지 비용도 엄청날 것 같았다.

재벌이 되어야 할지도?

“도착했다.”

“마트. 마트.”

“그렇지. 마트지. 카트 끌고 뭐 좀 사 갈까?”

“아아.”

시하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카트를 봤다.

“형아. 시하 요기.”

“시하 4살이니까 이제 안 타도 되지 않을까?”

“아냐. 시하 5살부터 안 타야.”

“그래. 시하 법률에 그렇게 적혀 있지?”

“법루 모야?”

“이렇게 하세요! 라고 딱 정해져 있는 걸 법이라고 해. 읏차!”

나는 시하를 태웠다.

오랜만에 레이서의 기분으로 끌고 가면 될 것 같다.

“형아. 고! 고!”

“그래. 가자. 가.”

먼저 과자 코너를 드리프트로 돌면서 앞으로 나갔다.

시하는 만족스럽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중이다.

“형아. 저거!”

“그래.”

시하가 먹고 싶은 과자를 담는다.

아주 회장님이 쇼핑하러 오셨다.

“다음은 물고기 보러 간다.”

“아아!”

“저기 장난감 코너 있는데 잠시 들를까?”

“아냐. 물고기!”

“네네. 회장님 뜻대로 하세요.”

“아냐. 시하 사언이야. 사언.”

아무래도 예전에 시하가 사원을 했던 게 떠올랐나 보다.

아주 회장 같은 사원이 오셨어!

우리는 물고기가 많은 수족관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색색인 물고기들이 생동감이 넘치게 헤엄치고 있었다.

시하는 카트 위에 벌떡 일어서서 손을 대고 크게 보았다.

카트 위에 있는 게 딱 알맞은 느낌이다.

보기 딱 좋거든. 설마 이거까지 시하가 계산한 거 아니겠지?! 시하는 천재니까!

그런 헛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직원이 다가왔다.

“물고기 사시게요?”

“네? 아, 네!”

“마음에 드시는 거 있어요?”

“일단 좀 보고요. 키우기 쉬운 거 있나요?”

“제가 여기 있어 보니까 보통 구피를 많이 사시더라고요.”

시하가 흥분해서 말했다.

“형아. 새우! 새우!”

“어? 그래.”

“호호호. 새우도 많이 사요.”

“그럼 합사하기 좋은 구피랑 새우 주세요. 아! 구피는 많이도 말고 딱 세 마리만.”

“아! 작은 어항에 키우실 거가 봐요.”

“네.”

“그러면 새우는 하나?”

“네. 하나만요.”

“알겠습니다.”

시하는 새우에 꽂혔는지 새우새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시하야. 새우가 좋아?”

“아아. 새우티김 마시써.”

“그거 새우가 들으면 슬퍼할 거야.”

“아?”

새우 노래 부른 건 오늘 할아버지가 주신 새우튀김 때문이었어!

어쩐지 그거 잘 먹는다 싶었는데.

솔직히 맛있긴 한데 그걸 새우 앞에서 말하면 어떡하니.

왠지 모르게 앞의 새우가 덜덜 떠는 것 같다.

물이 살짝 흔들려서 그런 거겠지?

“암컷 하나, 수컷 두 마리를 넣었어요.”

“와! 혹시 어항 작은 것도 볼 수 있을까요?”

“네. 저기 있어요. 둥근 것이 예쁘고 좋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니 그저 추천해준 거로 샀다.

“형아. 물고기! 새우!”

“응. 조심히 들고 있어야 해.”

“아아! 일피, 이피, 피피.”

“이름을 벌써 정했어?”

“아아.”

뭔가 게임에 1 플레이어, 2 플레이어 생각나는 이름이다.

암컷은 피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새우도 이름 벌써 지었어?”

시하가 해맑게 말했다.

“티김.”

그거 새우가 알면 엄청 슬퍼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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