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설 전날.
약속대로 시하와 같이 할아버지네 집에 도착했다.
강아지들이 헥헥, 꼬리를 살랑거리며 반긴다.
이제는 우리 얼굴이 익숙하다는 듯이 짓지도 않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여!”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허허허. 일찍도 왔구만. 지금 새벽인데.”
“지금 오후인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점심은 먹었고?”
“네. 먹고 왔어요.”
마당에 들어가자마자 시하가 도도도 달려서 차차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들이 시하 주위에 몰려들어서 하나하나 손길을 보내는 중이다.
“기여어~ 형아. 강아지 기여어~!”
나는 쪼그려 앉아있는 시하가 더 귀여워 보였다.
강아지와 함께 있으니 귀여운 것들 천국이구나.
“산책 가까?”
왕왕!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마음대로 산책하러 가려고 하고. 아주 주인이 다 됐어.
“시하야. 오늘은 산책 가러 온 거 아닌데?”
“왜?”
“오늘 동그랑땡 만들어야 하잖아.”
“아코!”
시하가 이마를 툭 하고 쳤다.
“시하가 나중에 산책하께.”
왕왕.
시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아지들은 그저 꼬리만 딸랑딸랑 흔들 뿐이다.
정말 알아들은 거 맞아?
“허허허. 보기 좋구만. 들어오지.”
“네.”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재료를 전부 손질해 놓으셨다.
“이거 재료를 섞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모양도 빚으면 되네.”
“형아. 동그랑땡?”
시하가 재밌어 보이는지 눈을 반짝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닐장갑을 시하 손에 끼워 주었다.
“시하야. 자. 이제 한다?”
“웅.”
할아버지가 만들어둔 재료들을 섞어서 주물럭거렸다.
이게 은근히 힘이 들어간다.
“자, 이제 동그랑땡을 만들어서 여기 쟁반에 놓는 거야.”
내가 하는 걸 보여주니 시하가 조그마한 손으로 동글동글 만들어서 꾸욱 누른다.
“다 해따!”
“여기 있는 거 전부 다 해야 해.”
“마나!”
“응.”
그냥 먹을 만큼만 만든다고 해도 상당한 양이 나온다.
시하랑 함께 열심히 만들고 있다가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시하야. 이거 봐봐. 하트도 만들 수 있다?”
“아? 하투! 시하도 딴 거 만들래!”
“그래. 한번 만들어봐.”
시하가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었다.
모양이 점점 잡혔다.
“별!”
“오! 별이네. 별.”
시하가 기분 좋은지 별만 열심히 만들었다.
작업속도가 늦어지는 건 당연지사.
“어? 근데 이렇게 별 하고 하트 모양만 만들어도 되나요?”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올리면 되지. 못 먹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느새 할아버지도 우리 옆에 와서 거들었다.
“앗! 저희가 다 하면 되는데요.”
“빨리빨리 하면 좋지.”
“그래도요.”
셋이서 하니 정말 금방 끝났다.
달걀 물을 풀고 담가서 굽기 시작했다.
치익.
시하는 내 옆에 딱 붙어서 자기가 만든 별 모양이 다 구워지길 기다리고 있다.
“형아. 다 해써?”
“아니. 아직 멀었어.”
뒤집개로 뒤집다가 별 모양의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툭.
시하가 내 어깨를 붙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형아. 부서져써! 별 아냐!”
“미안. 미안. 이건 어쩔 수가 없어.”
그래도 어찌어찌 별들을 구웠다.
“먹고 싶지?”
“웅!”
“자. 후후 많이 불어서 먹어야 해.”
“후우! 후우!”
열심히 불어서 한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마시써!”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들썩인다.
나에게 자기 먹던 걸 내민다.
“형아. 마시써. 머거.”
“응. 고마워.”
이제 뭐 익숙하지. 이 정도는.
나머지를 입에 다 넣으니 확실히 할아버지의 내공이 장난 아니셨다.
늘 혼자 준비하셔서 그런지 손맛이 좋았다.
“와. 진짜 맛있어요.”
“허허허.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구나.”
우리는 즐겁게 전을 마저 구웠다.
***
차례나 제사를 지내다 보면 꼭 이런 생각이 든다.
절을 하고 나서 언제 일어나지?
귀를 쫑긋 세우며 어른들이 일어날 때 스르륵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절.
“형아. 머라고 절해야 해?”
“응?”
“소언 빌어?”
“으음. 밥 맛있게 드세요~ 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아아. 밥 마니 머거여. 싸게 해주께.”
“아니. 싸게 해준다는 말은 빼도 되지 않을까?”
“왜? 돈 내야지.”
어? 그러네. 음식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그렇게 말하면 조상님들이 내가 너희들을 어찌 보살폈는데…. 배은망덕한 녀석들.
뭐 이러시지는 않겠지?
“식당이 아니라서 돈 안 내도 돼.”
“마니 머거여~ 더 주까여~”
“푸흡. 그래.”
사실 절하면서 별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
시하는 그게 궁금한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수저들을 옮기고 술을 버린다.
나는 옆에서 술을 다시 따르고 술잔을 놓는다.
“시하도 해볼래?”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여기 앉으렴.”
“이케여?”
시하가 할아버지처럼 무릎을 꿇는다.
그 모습이 의젓해 보이지는 않고 그저 귀여웠다.
“여기 형아가 술을 따라줄 거야.”
“마셔여?”
“아니. 아니. 마시면 큰일 나지. 이건 할아버지에게 줄 술이란다.”
“술 마니 마시면 안 조태여.”
“허허허. 그건 그렇지.”
저건 또 어디서 들은 지식일까?
나는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자. 시하야. 놓치면 안 돼. 알았지?”
“시하 아라. 다 바써.”
“그래. 그래. 우리 시하 똑똑하다.”
술잔에 술이 채워진다.
“여기 왼쪽으로 세 번 돌려야 해.”
“이케?”
“응.”
휙휙.
정말 잘 본 건지 할아버지에게 술잔을 넘긴다.
“이제 두 번 절하는 거야.”
“아아.”
“한 열 번 정도 세고 일어나면 돼.”
시하가 절을 한다.
엉덩이는 왜인지 살짝 들려있다. 가서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싶다.
“하나, 둘, 서이, 너이.”
“마음속으로 세자.”
설마 입으로 셀 줄 몰랐다. 뭐, 귀여워서 조상님들도 너털웃음을 보이지 않을까.
아, 근데 우리 조상님은 아니지만 봐주시죠. 흠흠.
“다 해따.”
“그래. 잘했어.”
시하가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이제 방에 불을 끄자꾸나.”
가장 오래 절하는 순간.
시하랑 나는 가만히 절을 하고 있었다.
뭔가 시선이 느껴져 살짝 눈을 뜨자 시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들켰다는 걸 알았는지 손으로 자기 눈을 가렸다.
그렇게 하면 내가 널 못 보니?
“형아. 열 지나써.”
“푸흡. 이건 30초나 있어야 해.”
“왜?”
“지금 밤이 돼서 그래.”
“아아. 밤.”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코오 자. 코오.”
이 설명으로 잘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시하에게는 굉장히 낯선 제사겠지만 꽤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뭔가 엄숙함을 강요하는 집이면 혼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끝내지.”
제사가 끝이 났다.
“형아. 재미써. 신기해.”
“그래? 그랬다면 됐어.”
시하에게는 그저 일종의 놀이 같은 느낌인가 보다.
뭐라고 할까? 우물신에게 소원을 빌던 의식 같은 놀이?
“아! 시하야. 형아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모야?”
“형은 말이야. 사실 손가락으로 불을 끌 수 있거든.”
“아?”
내가 엄지와 검지를 살살 비비며 초를 향해 다가갔다.
“형아. 아냐. 뜨거.”
“후후후. 형아는 사실 레드 형아라서 안 뜨겁지. 잘 봐.”
나는 심지를 툭 하고 잡았다.
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시하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엄청나게 신기하겠지.
“형아. 갠차나?”
“당연하지. 하나 더 꺼볼까?”
나는 손가락으로 심지를 팍 하고 잡았다 놓았다.
불이 꺼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착한 어린이는 따라 하면 안 된다. 그저 허세 부리고 싶어서 한 행동이니.
“어때? 엄청나지?”
“엄청나! 엄청나!”
“시하도 형아처럼 어른 되면 다 할 수 있는 거야.”
“정말? 시하 손으로 불 파박! 할 수 이써?”
“당연하지.”
그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치우고 밥 먹어야지.”
역시 차례 끝나고 밥 먹는 건 국룰이지.
***
맛있는 밥을 뚝딱 먹고 할아버지가 손에 복주머니를 들고 왔다.
저걸 언제 또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허허허. 이제 다들 절 한번 해보거라.”
“시하야. 할아버지에게 절할까?”
“시혁이도 해야지.”
“네? 저도요?”
“물론이지. 안 하려고 했어? 여기 복주머니도 두 개가 있는데?”
“아니요. 하긴 하는데 용돈은 필요 없어서요.”
할아버지. 제 나이가 24살입니다.
물론 할아버지 아드님보다 어리긴 합니다만 세뱃돈 받을 나이는 아니지요.
“그냥 하고 받아 둬. 어차피 이 할아버지는 돈 쓸 때가 그렇게 많지 않아. 손주 손에 돈 쥐여 주는 게 낙인 사람이야.”
“시하는 그렇다 치고 저는 손주도 아닌데.”
“어허. 그냥 받아.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설마 올해 이렇게 절하고 세뱃돈을 받을 줄 몰랐다.
시하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형아. 가치.”
“응.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자.”
나는 시하랑 함께 할아버지에게 절했다.
“자, 이건 시하 거고. 여기는 형아 거.”
“감사합니다. 시하도 감사합니다. 해야지.”
“할부지. 사랑해여~”
할아버지가 한술 더 뜨는 시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 그래. 고맙구나.”
나는 복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어릴 때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걸 들고 곧장 돼지저금통에 넣었지.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나를 보았다.
“아직 대학생이면 충분히 용돈 받을 나이란다.”
“네?”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분명 줬을 거야. 아버지도 물론이고.”
“…….”
“왜 그러니?”
“아니요. 그냥.”
친할아버지였다면 아마 용돈을 주지 않았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언제나 용돈은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줘야 했다.
그 금액을 용돈이라고 칭하기는 그렇지만.
“감사합니다.”
“뭘.”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용돈 받는 손주의 기분을 느끼게 해줘서 감사했다.
이런 느낌인가 보다.
어렸다면 시하처럼 할아버지에게 사랑해요,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막 안겼을지도.
그러기에는 너무 커버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아.”
“응. 시하야.”
“시하 용돈 바다써. 안에 할무니 이써.”
“응. 신사임당이 있구나?”
“아아. 오 마넌이야. 오 마넌. 형아는?”
“형아도 시하랑 같아.”
“안 열어바써?”
“꼭 열어봐야 아는 건 아니야.”
여기에 얼마가 들어있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할아버지 마음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래서 굳이 열어보지 않았다.
“형아. 형아. 시하가 용돈 주까?”
“응?”
“형아. 절해. 절.”
“뭐? 그래. 절해 줄게. 형아 용돈 주라.”
나는 시하의 말을 받아주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아. 고마어~ 형아도 새해 복 마니 바다. 여기 용돈!”
“어이쿠. 고맙습니다.”
“마시는 거 사 머거. 치킨 머거. 치킨.”
“네. 치킨 꼭 먹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 둘이 하는 일이 재밌는지 킬킬 웃으셨다.
오늘 웃는 일이 많으신 것 같다.
뭐, 나는 이렇게 복주머니가 많이 생겼다.
“그럼 시하야. 이제 형아에게 해 봐. 형아가 용돈 줄게.”
“아?”
“왜?”
“아냐. 시하가 용돈 져써.”
“형아도 용돈 주고 싶은데 안 받을 거야? 흑흑.”
쿠궁!
시하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형아의 마음을 이리 무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형아. 절해. 절.”
네가 절한다는 말이지? 주어를 붙이고 이야기하자.
“형아. 새해 복 마니 바다.”
“응. 고마워.”
“아아. 고마어~ 마시는 거 사 머거.”
“내가 용돈 주는데 시하가 왜 맛있는 거 먹으라고 하니?”
“아?”
시하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하의 손에 복주머니를 쥐여 줬다.
잠깐. 저게 시하 복주머니 맞겠지?
똑같이 생겨서 헷갈린다.
“시하 열어볼게~”
“아까 열어봤으면서 또 열어봐?”
“꼭 열어야 해!”
시하가 복주머니를 열었다.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진다.
“형아. 돈 마나져써!”
“응?”
“엄청 마나. 서이보다 마나!”
“뭐?”
아무래도 저게 내 복주머니인 것 같다.
대체 얼마가 들었길래?
“형아. 대단해! 돈 마나져써. 절 또 하면 더 마나져?”
그랬다면 사람들은 종일 절을 주고받았지 않겠니?
“보자 얼만지.”
나는 너무 놀라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