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이제 곧 커다란 공휴일이 온다.
어린이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루하루가 열심히 노는 날이다.
어린이집에서 놀고, 집에서 놀고.
장소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형아. 일나! 일나!”
“어째서…….”
“아?”
“새벽인데?”
“일나! 일나!”
왜 시하는 아침형 인간일까.
사실 저녁형 인간이 더 좋지 않나? 이렇게 일찍 일어날 이유가 대체 어딨단 말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시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 나라의 어린이니까.
“형아. 일어나면 엄청나지는데 괜찮겠어?”
“!!!”
이불을 토닥토닥 치던 손이 따다닥으로 바뀌었다.
매우 빠르게 두드리는 중이다.
이런. 아무래도 시하의 호기심을 깨웠나 보다.
나는 사실 겁주려고 했는데…….
단어 선택을 잘못했나 보다.
“간다!”
“간다!”
이불을 위로 박찼다.
펄럭.
손을 잡아 아래로 끌었다. 시하와 나를 향해 덮으며 그대로 빛을 차단했다.
“아?”
“시하야!”
그대로 얼싸안으며 뒹굴뒹굴했다.
벽에 쿵 하고 등이 부딪치자 열연의 연기를 한다.
“엌!”
풀썩.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기절한 척을 한다.
“형아?”
“코오-”
“일나. 일나.”
언제부터 이렇게 정이 없어진 거니?
형아. 기절했다니까?
혹시 모를까 봐 중얼거리기도 했다.
“기절. 기절.”
“형아. 기절 안 한 거 시하 다 아라.”
“어떻게 알았지?”
“시하 4살이라서 다 알아.”
“대체 4살이 뭐길래?”
뭐만 했다 하면 4살이라서 다 안대.
내가 모르는 4살의 엄청난 능력이라도 각성하는 거야? 그런 거야?
막 게이트 생기면서 뭐 그런 소설들 있잖아.
나 혼자 레벨업 하거나.
“그래. 일어나야지. 시하는 씻고 있을래? 4살이니까 이제 혼자 할 수 있지?”
“아? 아냐. 그거 5살이야.”
“뭔데 그 기준은.”
“형아랑 가치 씨서야 해.”
“그렇구나.”
내가 생각했을 때 5살이 되어서도 또 말을 바꾸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씻고 밥을 먹고 나서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노래를 틀었다.
“시하야. 이모티콘 파일 첨부해서 신청해 뒀거든. 심사 거치면 아마 출시될 거야.”
“정말? 시하 또 돈 벌어?”
“응. 많이 벌지. 형아보다 더 벌지.”
“정말?”
“정말이구 말구.”
전에 들어왔던 첫 달 수입은 나를 훨씬 웃돌았었다.
잘 모아뒀다가 시하가 나중에 잘 썼으면 좋겠다.
아마 시하는 동나이 때 중에 상위 1프로가 아닐까?
물론 재산을 물려받는 금수저들은 제외하고.
무자본으로 스스로 돈을 이렇게 번 3살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형아. 용돈 주께.”
“그래. 고맙다. 아! 그러고 보니 용돈 주는 날이 오기는 하네.”
“아?”
시하가 그런 날이 있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보았다.
언제 파벌이 벌어졌냐는 듯이 이제 안정감을 찾으며 잘 어울리고 있었다.
“여러분! 곧 무슨 날인지 아는 사람?!”
“저요!”
종수가 먼저 손을 들었다.
“네. 종수.”
“설날이요!”
“맞아요. 설날이죠. 다들 설날이 뭔지 아나요?”
“알아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절해요. 어른들도 만나요.”
“네. 새해가 와서 서로 잘했다. 잘했다. 이렇게 덕담도 주고 새해 용돈도 주는 날이죠.”
시하가 용돈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용돈?”
“왜? 시하도 용돈 받고 싶어? 그러려면 절을 배워야 해요.”
“절?”
“응. 자! 오늘은 절을 배울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한 번만 하는 거예요. 자, 따라 해볼까요?”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다들 아는 거라서 쉽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 다들 재밌게 해요!”
승준이 말했다.
“쌤. 재미없어요!”
“하나도 다 아는데?”
선생님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러분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전문가에게 맡겨야겠네요. 훈장님! 나와주세요!”
“허허허.”
할아버지가 한복 차림을 하고 뒷짐을 진 채 나왔다.
등 뒤에는 회초리가 까딱까딱 움직였다.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타 마술사다!”
“앗! 할아버지.”
“아아! 할부지!”
할아버지가 붙여진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노옴! 누가 선생님 말을 안 들어요!”
호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강인 어린이집 아이들이다.
“저요! 저요!”
“하나도! 하나도!”
“할부지!”
아주 당당한 아이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살짝 당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에너지가 엄청 넘쳤으니까.
회초리로 벽을 딱딱 쳤다.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해요. 그래야 새해 복 많이 받지. 오늘 절하는 걸 잘 배우면 훈장님이 좋은 거 줄게요.”
할아버지가 회초리를 부러뜨리며 접어서 손에 모아 보자기를 꺼냈다.
위에 얹어서 흔들며 뺐는데 카드가 뿅 하고 나왔다.
“우와!”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훈장님은 마술을 할 수 있어요. 잘하는 사람에게는 이 마술 카드를 주겠어요.”
아이들이 할아버지 앞에 쪼르르 와서 앉았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럼 절을 누가 잘하나 볼까?”
승준이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저요! 저요!”
“그래. 승준아. 절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요!”
승준이 한 번 절했다. 일어서서 또 한 번 절했다.
할아버지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흠흠. 살아계신 분에게는 한 번만 절하는 거란다.”
“상 앞에서 두 번 하던데요!”
“그건 우리 조상님들에게 하는 거란다. 여기 와서 음식 잘 드시고 우리 가족들 잘 봐주세요, 라고 하는 거지.”
시하가 의문을 내뱉었다.
“조상 모야?”
“으음.”
뭐라 설명해야 잘 알아들을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시하랑 형아의 할아버지, 할머니란다. 아주 많아!”
“왜?”
“그게 할아버지의 아빠 엄마도 있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있고. 하여간 그렇게 많아요.”
“할부지에 할부지에 할부지…. 아?”
시하의 머릿속에는 앞에 있는 할아버지가 여러 명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마치 분신술을 쓰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마나!”
“오! 알아들었구나! 조상님은 많지.”
“레드 조상님. 엄청 세.”
“그렇지. 엄청 세지.”
시하는 엄청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절하는 건가 싶었다.
다들 허허허, 호호호, 하고 웃음을 흘린다.
머릿속을 누군가 봤다면 기괴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럼 시하도 해볼래? 절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거야.”
“아아!”
시하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새해 복 마니 바드세여.”
“옳지. 잘한다. 이렇게 절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용돈을 줄 거예요.”
“왜?”
“맛있는 과자 사 먹으라고 주는 거지. 하하.”
승준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닌데. 맨날 엄마가 저금해둔다 하는데!”
“아, 그러니? 나중에 다 돌려줄 거야.”
“아닌데. 맨날 보여 달라고 하니까 엄마 바쁘다고 하는데!”
“허허허.”
할아버지는 그냥 당황한 웃음을 흘렸다.
“다 승준이 뱃속으로 갔나 보다.”
“엥?”
승준이 자신의 배를 주물럭거렸다.
옆에 있던 시하도 배를 원으로 그렸다.
“시하 배. 용돈 가써? 그래써?”
“자, 다들 절을 잘할 줄 아는 것 같으니 이 선물을 줘야 하는데. 흐음. 이거 어쩌나? 마술 카드는 하나밖에 없으니. 유다희 선생님. 방법이 없겠습니까?”
유다희 선생님은 자신만만하게 뭔가를 들고 나왔다.
“다 방법이 있어요. 여기 상자에 들어있는 게임에서 이긴 사람에게 카드 선물을 주면 되지요.”
작은 상자에서 꺼낸 것은 바로 윷놀이였다.
설에 관련된 전통놀이를 자연스럽게 게임을 가르쳐주려는 거였다.
간단한 설명이 이어진 뒤에 게임이 시작되었다.
팀도 나누었다.
1팀. 시하, 승준, 하나, 연주.
2팀. 종수, 재휘, 윤동, 은우.
이제는 뻔하다면 뻔한 팀의 배치였다.
종수가 윷을 들었다.
“그럼 나부터 한다.”
“아아.”
하늘 위로 네 개의 윷이 날아오르다가 떨어졌다.
딱. 딱.
아래에서 뒤섞이며 구른다.
뒤집힌 것은 두 개.
시하가 종수를 보며 외쳤다.
“개! 종수 개야. 개!”
아는 것을 나왔는지 시하가 흥분해서 외쳤다.
“어. 그건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괜히 시하의 발음 때문에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다음은 시하가 나와서 윷을 던졌다.
“걸!”
세 칸 전진.
서로 한 번씩 던지며 꽤 흥미진진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먹고 먹히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저 멀리 도망치기도 하고.
다시 한 바퀴 돌아서 종수의 손에 왔을 때는 꽤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시하야. 윷 나오면 저기 먹히는데.”
“시하 아라.”
“윷 나와라. 윷!”
종수가 이번 한 번만 이겨보자는 마음으로 하늘 위로 던졌다.
데구르르.
“와! 윷이다!”
“아? 종수. 엿이야. 엿.”
“???”
“시하 말. 종수가 엿으로 머거.”
“어? 윷이란 말이지?”
“아아.”
종수가 떨떠름하게 말을 옮겼다.
분명히 이긴 건데 이상하게 욕먹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 한 번 더! 도 나오면 된다. 도!”
도가 나오면 가로지를 수가 있었다.
아쉽게도 나온 것은 개였다.
“종수. 개야. 개.”
“나도 알거든!”
이상하게 페이스가 말리는 종수였다.
***
시하를 데리러 가면서 설에 대해서 생각했다.
특별히 집에서 뭘 하지는 않는다.
어디 제사를 지낸다거나 차례는 이미 안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원래라면 아버지가 해야 했지만 집안 사정상 그냥 없애버렸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원망했을까?’
한 번도 거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육아일기에도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아주 가끔 나오기는 했다.
당연했다. 육아일기니까.
어쩌면 육아가 들어간 그냥 일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박이라.’
도박으로 인해 빚을 남겼고, 언제나 사고 쳐서 돈이 필요했고, 매달 나가는 돈이 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때문에 늘 힘들어했다는 걸 알고 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언제는 밤에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사고 치지 말라고. 거기 병원에 좀 있으라고.
나중에 돼서야 안 건데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는 병원까지 가게 되었다.
거기서 쓰리아웃제에 걸려서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했을 때에야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저 안타까운 인간만이 남아서…. 어떻게 저렇게 망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원망의 대상이었음에도.
‘제사라.’
이제야 다시 지내는 것도 이상할 것 같다.
그래도 시하에게 한국의 전통 같은 차례를 한번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지내지 말자고 하셨지.’
그 사실만 봤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엄마가 없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시하야.”
“아? 형아!”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나에게 안겼다.
“오늘 잘 놀았어?”
“시하 잘해써. 엿놀이 해써.”
“엿? 엿치기 말하는 거야?”
“아냐. 엿놀이. 이케이케.”
“아! 아! 윷놀이?”
“아아!”
시하야. 발음 조심 좀 하자. 엿놀이가 뭐니. 엿놀이가.
“설에 대해서 잘 알았겠네?”
“시하 아라. 친척 집 가. 친척 집. 다 모여. 엿놀이 해.”
“그렇지. 친척.”
이것 역시 안타깝다.
원래라면 고모 집에 가는 것이 맞을 테지만 이제는 인연을 끊었다.
추석 때도 가지 않았는데 이번 설에 가서 무슨 말을 하며, 무슨 소리를 듣겠는가.
이미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거니까.
간다면 정말 시하 말처럼 엿놀이가 될 게 뻔한 게 아니겠냐고.
“시하야. 우리는 친척 없어.”
“왜?”
“친척 복이 없나 봐.”
“아? 친척 새해 복 마니 못 바다써?”
“푸흡. 매년 그쪽에서 새해 복 많이 못 받았나 봐. 정말.”
아버지 쪽은 너무나 엉망이어서 갈 수 없었고, 어머니 쪽은 이혼해서 갈 수 없었다.
새어머니 쪽 역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설과 추석에 우리 둘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 설날에 재밌게 놀자.”
시하가 있기에 외롭지는 않다.
왜 좋잖아. 취업 언제 하냐. 결혼은 언제 하냐. 그런 말 안 들어도 되고. 좋네.
“아아. 형아. 시하 마술 카드 바다써.”
“오! 진짜네?”
“시하 엿놀이 이겨써.”
“윷놀이겠지. 이거 이기면 마술 카드 주는 거야?”
“아아.”
“이야. 우리 시하 윷놀이에 천재네. 천재.”
그때 할아버지가 살며시 문밖으로 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허허허. 음.”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눈썹 끝을 살짝 긁으시며 멋쩍어했다.
“사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말이야.”
“네? 아!”
“설날에 갈 때 없으면 우리 집에 올래?”
“예?”
“나 혼자 차례를 지내거든. 허허허. 시하도 같이 경험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거 때문에 조금 고민하고 있는 거 아닌가?”
“아, 맞긴 한데…….”
나는 그래도 되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아드님이 안 지내고요?”
“우리 아들?”
“네. 저번에 아드님이 결혼하시고 그랬다고.”
“아아. 걔는 안 지내. 종교적인 이유로. 흠흠.”
“아, 그렇구나.”
거기까지 이해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눈이 깜빡거린다.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 혹시 제가 음식 도와드릴 거 있으면 도와드릴게요.”
“대부분 사 와서 괜찮아. 하는 거야 동그랑땡밖에 없는데. 뭘.”
“그거라도요! 시하도 이런 음식 해보는 거 재밌어할걸요.”
시하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형아. 동그랑땡! 재미써!”
“너 안 해봤잖아.”
“이름이 재미써! 근데 동그랑땡 모야?”
“엄청 맛있는 거 있어.”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설날이 시끌벅적하겠구먼.”
“아드님은 설에 안 오세요?”
“그놈의 자식은 설 다 끝나고 인사하러 오지.”
“아하.”
그런 사람이 있긴 하지.
시하가 할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뭔가 괘씸함을 느꼈나 보다.
“할부지.”
“응?”
“이노옴! 해. 이노옴!”
“푸하하하!”
“혼내. 혼내.”
저건 또 언제 배웠을까.
하여간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