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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화 (253/500)

253화

날이 밝았다.

눈을 뜨니 옆에서 항상 자고 있던 시하는 없어진 상태이다.

보통이라면 나를 다양한 방법으로 깨웠겠지만 오늘은 뭔가 조용하다.

또 어딘가에서 몰래 무엇을 할 가능성이 있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니 시하의 말소리가 들린다.

“자. 산책하자. 요이요이야.”

벌써 요요에게 이름도 지어줬니?

요이요이란 말이 뭔가 참 대충 지은 것 같으면서도 귀여운 느낌을 준다.

근데 벌써 이른 아침부터 산책이라니.

참으로 부지런하다.

“요이요이야. 저기 티비 이써. 여기 올라가.”

나는 슬쩍 방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시하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티비가 올려진 선반 위로 요요가 훌쩍 앉는다.

벌써 요이요이는 그런 말까지 잘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가자.”

선반 위를 타고 가면서 그대로 바닥에 안착한다.

“잘해써~!”

쓰담쓰담.

분명히 갖고 놀라고 사준 건 맞는데 이렇게 강아지처럼 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나 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을 대하나 보다.

그게 너무 신기하다.

“요이요이. 형아 일나 하자.”

태세를 보니 나를 깨우러 올 모양이다.

얼른 고개를 집어넣고 이불을 덮어썼다. 매일 시하가 깨워주는 게 나의 소중한 일과다.

시하도 그럴 것이다.

이제 가족이라고는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걸 거르는 것도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요이요이. 시하, 형아 방이야. 알아찌?”

“아냐. 여기 하장실 아냐. 쉬야는 저기서야.”

실컷 기다렸는데 화장실로 유턴한다.

3살 이시하. 밀당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렇게 화장실을 한 번 거친 뒤에야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요이요이야. 형아 배에 올라가.”

툭.

내 배 위에 올라온 요이요이가 느껴졌다.

다시 스르르 내려온다.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이불 위에 있는 요이요이지만 살짝 간지러움이 느껴진다.

마치 깃털로 볼을 문지르는 느낌이다.

“형아. 일나. 요이요이가 일나 해써.”

“…….”

“안 일나면 요이요이가 할타.”

이불이 걷히며 요이요이가 내 얼굴에 올라온다.

핥는 건지 아니면 얼굴을 구르는 건지 모르겠다.

살며시 눈을 떴다.

“시하야. 뭐 해?”

“요이요이 산책해써. 형아 깨어써.”

“요요가 요이요이야?”

“아아. 시하가 이름 지어써.”

“요새 말 잘한단 말이야.”

“아?”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하 말 잘해. 맨날.”

“그래.”

아무래도 자기는 이때까지 늘 말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늘 잘 알아들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건가. 정말 놀랍다.

아니지. 시하는 원래 말을 잘했다. 암!

“형아. 요이요이 산책 가. 바께.”

“밖에까지 가자고?”

“아아.”

“일단 씻고 밥부터 먹으면 안 될까?”

너 머리가 떡 져 있는 건 아니?

***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물론 이런 날씨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요이요이는 요요인데 꼭 산책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아침이라서 더 쌀쌀하지만 시하는 ‘그런 건 난 몰라.’ 하고 있는지 도도도 저 앞으로 뛰어갔다.

요이요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저 모습을 보니 다음에는 꼭 동물을 키워야 하나 싶다.

“형아. 빨리.”

“그래.”

지금 집에서는 키울 수 없겠지만.

언젠가 집을 사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며 시하가 열심히 돌보는 모습을 보고 싶다.

뭐, 실제로 열심히 치우는 건 내 몫이겠지.

하지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몇 번은 아이가 해도 결국 어른이 다 하게 되어 있다.

“시하야. 요이요이 산책하니까 좋아?”

“아아. 조아.”

“강아지 키우고 싶어?”

“아냐.”

“응?”

“지베 못 키어.”

“응. 그렇지. 그럼 우리 차차 보러 갈까?”

“아?”

시하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차차가 좋은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애정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키울 뻔하기도 했고.

“이제 차차가 낳은 강아지들 많이 컸겠네. 그치?”

“강아지 마나.”

시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닌 게 생각이 난다.

우리는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있는 집까지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오는 요이요이가 흙먼지가 쌓여서 더러워지는 건 덤이었다.

“할부지!”

“으응?”

할아버지가 시하의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오신다.

우리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니 이내 반가운 얼굴을 하신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시혁이랑 시하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할부지. 안녕하세여~”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 어쩐 일로 왔어? 바쁜 거 아니야? 나야, 뭐 좋지만.”

“전에 공연하신 거 잘 봤어요. 인사도 드릴 겸 방문했어요. 강아지도 보고.”

“허허허. 안 그래도 적적했는데 오늘은 떠들썩하겠네.”

“마술 공연할 때는 꽤 활기차지 않았어요?”

“그건 애들의 기운을 받아서 그렇지. 활발한 생명은 주위에 영향을 주거든. 시혁이도 시하에게 많이 물들었지 않니?”

“아…….”

확실히 시하를 돌보는 건 힘들기는 해도 그만큼 기운을 받는 것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난다거나.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든다거나.

요새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앉은 시간이 줄어들었다.

부엌에서 요리도 하고 이것저것 해야 했으니까.

몸은 분명 힘들지만 그만큼 오는 행복감이 크다.

“애 키우는 게 힘들지?”

“아니요.”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신다.

고개를 돌려 시하를 보신다. 강아지에게 ‘안녕. 시하 기억해?’ 하며 인사를 하고 있다.

다시 나를 보며.

“아주 의젓해서 참 좋아. 우리 애들도 배웠으면 좋겠어.”

“뭘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힘들다며 어쩌고저쩌고 말하거든.”

“하소연할 때가 없나 보죠.”

“아니. 많을걸? 그래도 거기에 관해서 별말 하지 않아. 이해하니까.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하지.”

“왜요?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해서?”

“아니. 질책은 너무 쓰거든.”

질책은 너무 쓰다.

“보통 라떼는 말이야. 하면서 그런 시대가 힘들었는데 그래도 이겨내서 빚 없이 떵떵거리며 산다. 뭐 그런 말을 하지.”

“푸흡. 아, 죄송해요. 라떼라는 말도 아세요?”

“당연하지. 난 신세대 할아버지거든. 허허허.”

“그래도 전 좋다고 생각해요. 가끔 의연하게 이겨내는 게 위로가 될 때가 있잖아요. 꼰대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렇지. 하지만 라떼는 달지 않나. 쓴 것보다는 단 게 나아.”

나는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확실히 자식이 듣고 싶은 말은 질책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도.

난 그 시절에 그랬는데 넌 그때의 나보다 훨씬 낫다.

그게 거짓말이라도 넌 잘 하고 있다고 듣고 싶은 게 아닐까?

“달콤한 꼰대는 사랑받는 법이지. 허허허.”

“푸흡. 좋은 말이네요.”

마술사 할아버지라서 그런지 확실히 애들이 좋아할 말을 아는 건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손으로 마치 핑거팜을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눈속임한다고 해서 거기에 뭐가 튀어나올지 예상 못 하는 건 아니거든. 그 과정을 모르는 것뿐이지.”

“그럼 이것도 예상하셨어요?”

“응?”

나는 뒤에 맨 가방에서 사과즙 상자를 꺼냈다.

빈손으로 오기 뭐 해서 하나 샀다.

“아니. 이런 건 안 줘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요. 인사하러 왔는데.”

“허허허.”

“곧 신년인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잠깐만 있어봐라.”

할아버지가 사과즙 상자를 받고 방 안으로 들어가셨다.

돌아올 때까지 나는 시하를 보았다.

“차차. 산책 가써? 요기 요이요이야. 산책 가써. 나중에 가치 가까?”

요이요이를 차차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다른 강아지들도 요이요이가 대체 뭐지? 하며 킁캉킁캉 냄새를 맡는다.

차차는 시하에게 착 달라붙는다.

지겹지 않은 긴 성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시하를 돌보고 일과 병행하는 건 이제 힘들지 않다.

익숙한 일이 되었다.

기운을 받는다는 말 역시 맞다. 물론 받은 만큼 뺏어가기도 하지만.

할아버지의 눈에 내가 의젓해 보이는 건 설사 말이라도 힘들다고 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는 걸까.

아까 한 말을 보면 칭찬이 맞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어쩌면 나 역시도 이 말을 기다린 것 같다.

넌 잘하고 있어. 그래, 어수룩하지만 나보다 훨씬 나아.

이런 말을 아버지에게 듣고 싶다고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지 않나.

-저 잘하고 있는 거죠? 이게 맞는 거죠? 이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아버지라면 어떻게?

누군가에게 확인을 받는다고 100점짜리 시험지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위안이 된다.

“형아!”

“응.”

“산책 가까?”

“푸흡. 그래. 할아버지 오시면 물어보자.”

때마침 할아버지가 나왔다.

“오래 기다렸니?”

“아니요. 전혀요.”

“자, 여기 따듯한 커피란다.”

“아! 감사합니다.”

텀블러를 내게 넘겨주셨다.

뚜껑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할부지. 차차 산책.”

“허허허. 산책은 진짜 일인데.”

하긴 강아지가 몇 마리인데.

“그런데 몇 마리 없네요?”

“분양했지.”

차차를 포함해서 총 3마리.

다들 좋은 주인을 찾아갔으리라 본다.

“그럼 산책해 볼까?”

할아버지가 차차의 목줄은 시하에게 주고 나도 강아지 한 마리를 잡았다.

“시하야. 형아가 도와줄까?”

“아냐. 시하 할 수 이써. 요이요이도 함께야.”

요이요이는 이미 줄이 휘감겨서 시하의 주머니에 볼록 튀어나와 있다.

그 부분을 탁탁 쳤다.

진짜 산책할 때는 요이요이를 넣어두는구나. 시하야.

“차차. 가자.”

“멍멍!”

나는 살며시 걱정되어서 바짝 옆으로 붙었다.

혹시나 차차의 엄청난 힘에 못 이겨서 넘어지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었다.

하지만 차차는 그런 마음을 비웃듯이 짧은 다리로 사뿐사뿐 걸어 나갔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쥐고 있는 강아지가 기운이 펄펄 넘쳐서 헥헥 거리며 끌고 갔다.

“형아. 띠면 넘어져!”

그거 내가 하고 싶었던 대사인데!

뭔가 상황이 바뀌지 않았니 시하야?

저 뒤에서 시하가 뭔가 내게 말해줬다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도하게 걸어 나가는 차차도 뿌듯한 얼굴이다.

뭔데. 뭔데 개랑 같이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데…….

하여간 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둬야겠다.

찰칵.

“야. 야. 너, 너무 기운이 넘친다.”

“허허. 제일 기운 넘치는 장군이란다.”

할아버지?! 그런 정보는 빨리 줬어야죠.

같은 배에서 낳은 자식이지만 성향은 다른지 아주 기운이 펄펄 넘치는 것 같다.

어휴. 나중에 개 키우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형아. 가치 가. 천천히 가.”

“형아도 그러고 싶어!”

그래도 힘주면 어느 정도 제어가 될 테지만 초반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맘껏 뛰어가게 해주고 싶은 느낌?

근데 이 애는 지치지도 않는다.

“자. 이제 좀 천천히 가자. 헉헉.”

“헥헥헥!”

그렇게 멈춰서야 겨우 우리는 보폭을 맞췄다.

다른 강아지들도 산책이 즐거운지 더듬더듬 땅도 킁킁거린다.

시하가 그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형아. 땅강아지. 땅강아지.”

“큭큭.”

요요가 땅에 굴러다니는 모습이 강아지에게 오버랩되나 보다.

“근데 시하야. 땅강아지는 사실 개가 아니라 곤충이야.”

“아?”

뒤에서 할아버지가 말한다.

“굳이 말하자면 땅이 아니라 똥이지. 똥강아지. 우리 똥강아지.”

“똥?!”

이런. 어린이에게 마법의 단어인 똥을 쓰시다니.

역시 마술사인가.

시하의 눈이 반짝반짝해지는 걸 보라.

“똥강아지?”

“으음. 귀여운 애들에게 우리 똥강아지라고 한단다.”

“아아!”

굳이 말하자면 그런 의미로 쓰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적인 뜻도 함께 있는 단어였다.

“우리 똥강아지. 차차.”

“멍멍!”

“똥 여기서 싸면 안 대.”

“멍멍!”

나는 텀블러 뚜껑을 열어서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그때 폰에서 전화가 왔다.

[홍진수 과장]

“여보세요.”

「흐흐. 시혁 씨. 궁금하지 않습니까.」

“네?”

「매출 말입니다. 매출. 팝업북 매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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