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0화 (250/500)

250화

어린이 미술관은 훌륭했다.

승준과 하나 일행과 합류하며 여러 곳을 돌았는데 정말 볼거리도 많고 재밌게 참여하는 곳도 많았다.

정말 종일 여기서 놀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생각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슬슬 눈으로 보면서 지나가면 끝나는 곳이다.

여기는 좀 달랐다.

부모님과 아이들을 붙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잘 꾸몄네.”

내 말에 백동환이 말을 받았다.

“그렇죠? 제가 그래서 여기 데리고 온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고맙다.”

“하하하. 아! 시하의 그림은 어떻게 됐습니까?”

“4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전시됐지 않았을까?”

“오! 그럼 보러 갈까요?”

“아니. 애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갔는데.”

“응?”

백동환이 고개를 돌리자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승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른바 여기는 릴레이 이야기 전시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의 다음을 쓰는 곳.

예전에 유행했던 릴레이 소설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이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다를 뿐.

“여기 참가하시겠어요?”

직원이 와서 물어봤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형아. 이야기. 이야기. 너이 컷 만화.”

“응. 시하는 익숙하지?”

“아아.”

직원이 도화지 하나를 주었다.

이 한 장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릴레이로 그리는 거란다.

모르는 다른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게 유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셋이나 되기에 굳이 다른 아이를 끼지 않았다.

“그럼 이야기를 그릴 건데 누가 먼저 시작할래?”

“시하가!”

시하가 먼저 펜을 쥐더니 그림을 그린다.

원래 시작이 어려운 법인데 제법이다.

뭐,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보다 보니까 진짜 그런 것 같다.

이제 익숙한 형태의 페페가 그려지고 있었다.

“옌날. 옌날. 페페가 살았어여.”

“그래. 그래. 여기다 적으면 되지?”

“아아.”

그다음은 하나가 바통을 받아서 그림을 그렸다.

펭귄이 두 마리로 늘었다.

다만 리본이 있는 걸 보니 여자 펭귄인가 보다.

“페페에게는 예쁜 여자친구 펭순이가 있었어요.”

역시 여자애라서 그런지 사랑 이야기로 넘어가나 보다.

역시 장르는 로맨스지.

그다음은 오승준.

자신 있게 축구공을 그렸다.

“둘이서 열심히 데이트로 사커를 했어요. 풀타임으로 뛰었어요.”

야이! 그게 말이 되냐!

풀타임이라면 무려 90분이다. 여자친구와 데이트로는 아주 하드한 거 아니냐.

그리고 장르가 갑자기 스포츠물이 되어버렸다.

“아아! 시하!”

시하는 이야기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의욕이 뿜뿜 넘친다.

그려진 것은 붉은 물을 건네는 페페였다.

이거 독극물은 아니지? 그러면 완전 스릴러인데.

“페페가 레드물 져써. 목마르지? 해써.”

다행히 아주 친절하게 여자친구를 챙겨주었다.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하나는 이렇게 그릴래.”

하나는 스토리가 마음이 들지 않는지 살짝 뿔이 나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축구로 넘어갈 때부터 그랬다.

“오빠는 둘 중에 뭐가 중요해? 사커야? 나야?”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벌써 이런 걸 배웠다고?

일과 사랑이 연인관계에 난제인 것처럼 승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커와 사랑.

대체 무엇을 선택하면 좋을까.

근데 승준아. 이거 그냥 이야기인 것뿐이야.

다시 로맨스로 돌아오긴 했네.

“그래! 그거야!”

승준이 자신 있게 그림을 그렸다.

역시 선택은 여자친구지?

“이런 질문한다는 자체가 사커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거야. 그러니 다시 풀타임으로 뛴다!”

사커와 연인 사이가 고민일 때 혹시 사커의 풀타임이 부족한지 생각해 보자.

야이! 풀타임 또 뛰어주는 여자친구는 완전 천사 아니야?

이번에는 하나도 뿔이 났다.

“아, 오빠! 이야기가 이상해지잖아!”

“하하하! 재밌다!”

“아? 계속 사커해?”

시하 역시도 마지막 결론이 계속 사커라서 당황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승준이 마지막 펜을 잡았으니까.

“아직 왼쪽 남아있어!”

승준이 비어 있는 부분을 탁탁 쳤다.

아직 그릴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수습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이 승준이어서야.

“오빠. 진짜 자꾸 이상하게 하면 가만 안 둬!”

“알겠어. 알겠어. 시하야. 근데 괜찮지 않아?”

“시하 바빠. 다움 그려.”

시하는 대답을 회피했다.

노리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헷갈렸다.

진짜 바빠서 대답 안 한 거겠지?

슥. 슥.

“쭈쭈해써.”

페페가 여자친구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힘드니까 그런 거겠지.

나는 옆에서 [여자친구가 힘들까 봐 다리를 주물러줬어요.]라고 적었다.

역시 시하다. 배려심이 넘친다.

하나도 그 부분에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 차례!”

하나가 승준을 슬쩍 본다

마지막에 어떻게 그릴지 불안한 것이다.

나 역시도 저 마음에 공감이 간다.

그려진 그림은 접시 위에 스테이크. 포크와 나이프가 옆에 있었다.

“운동이 끝나고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었어요. 다음은 오빠!”

“아싸! 이제 마무리다!”

승준이 슥슥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다.

펭순이의 귀를 그려 넣고 페페가 그 옆에서 뭔가 이야기를 한다.

“이제 꿈에서 그만 깨!”

“오빠!”

“왜? 푸하하.”

설마 했던 꿈엔딩이라니.

나는 마무리로 밑에 [펭순이가 꿈에서 깼다.]라고 적어넣었다.

그래도 실제로 여자친구랑 풀타임을 두 번 안 뛰어서 다행이네.

옆에서 승준 엄마가 말했다.

“그럼 제목을 펭순이의 악몽이라고 적어야겠네요.”

하나가 ‘힝’ 하면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가 생각한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야.”

“푸하하.”

뭐 릴레이 그림 이야기가 그렇지 뭐.

이런 건 산으로 가는 게 국룰이 아니던가.

꼭 가운데 이상한 걸 쓰는 사람이 있다.

***

릴레이 소설이 걸리는 걸 보고 우리는 VR 전시관을 향했다.

이미 승준과 하나는 갔다 왔기에 시하의 그림만 잠깐 보고 오기로 했다.

“시하야. 기대되지? 그림이 어떻게 전시됐을지.”

“아아!”

미술관에서 알아서 연출을 해줬을 건데 그걸 보는 맛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고 거기에 맞는 전시를 꾸미는 것.

물론 아이들에게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럴듯하게 꾸미기는 할 거다.

이런 것도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경험일 테니까.

녹화본으로 만든다고 했으니.

“근데 잘 그린 것도 많이 보이네.”

특히 부서진 눈사람이 눈에 띄었다.

어제 벌어진 일이 있어서 더 눈에 각인되는 걸지도 몰랐다.

“형아. 시하 저거 시러.”

“푸흡. 형아도 싫긴 하네.”

옆에서 승준과 하나도 입을 하나로 모아 말했다.

“나도! 나도! 아까 봤을 때부터 그랬어.”

“하나 눈사람 부서진 거 생각나써.”

아무래도 그 일은 아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나 보다.

조금 지나자 시하의 그림이 보였다.

[제목 : 산타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승준 엄마가 ‘어머’ 하며 입을 가렸다.

“시혁 씨. 시하가 정말 잘 그렸네요? 이거 시하가 한 거 맞아요?”

“네. 한 거 맞아요.”

“어쩜 이렇게 잘 그렸지? 여기서 사람들이 제일 오래 머무는 거 알아요?”

“하하하.”

산타의 눈동자에 모닥불의 붉은 기운이 살짝 있는 것에 확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모닥불이 카메라를 살짝 스쳐 지나가면서 그 온기를 이었다.

그러면서 편지지가 있는 손을 비췄는데 과연…….

마지막으로 풀샷으로 다시 한번 잡으면서 영상은 반복되었다.

“그런데 형님. LSH가 뭡니까?”

“비밀이야.”

뭐긴. 시하랑 내 이니셜이지.

사실 진실을 말하기 꽤 부끄러워서 그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시하는 산타가 자신에게 쓴 편지 내용을 쓰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한글도 영어도 몰라서 그냥 아는 영어 이니셜을 도배한 것 같았다.

물론 시하의 의도가 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뭔가 유추하기 시작했다.

“제 생각에는 그거 같아요. 어린이니까 쉬운 단어의 철자 앞글자를 하나씩 따지 않았을까요?”

“에이. 어린이가?”

“왜 그러세요. 요즘 유아들도 영어 유치원 가면서 얼마나 잘하는데.”

“그건 그렇긴 하지. 우리 때는 그런 거 없었던 거 같은데.”

“제 생각은 이거예요. LSH. L은 Listen. 듣다. S는 Share. 공유하다. H는 Heart. 마음.”

“호오.”

“아이들의 말을 듣고 편지로 공유하고 마음을 보낸다. 산타할아버지가 아이에게.”

“그럴듯한데?”

“헤헤. 쉬운 단어의 연결이죠.”

그거 아니고 그냥 이니셜이라니까.

옆에서 백동환도 귀를 쫑긋하고 듣더니 낮은 목소리로.

“정말 그런 겁니까? 하긴 형님은 통역사니까 시하에게 영어도 자연스럽게 많이 듣게 한 거겠죠?”

“비밀이라니까.”

괜히 신비주의로 말했다.

처음부터 말했으면 덜 껄끄러웠을 텐데 저런 말을 들으니 더더욱 입이 다물어진다.

그냥 말하지 말자.

“시하는 천재구나.”

“그, 그렇지.”

나는 볼을 긁적였다.

그런 의도 1도 없었다니까.

저기 저 사람들이 헛소리한다고.

뭐, 나이가 정확히 안 나와서 착각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그때 저 앞에서 빤히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는 아이가 보였다.

“그런 의미까지…. 역시 유학파가 맞았나?”

뭔 유학파? 왜 이야기가 거기로 튀는데?

일단 미술관에서 벗어나자.

이제 실컷 봤으니까.

***

미술관을 떠나기 전에 혹시 저 영상을 받을 수 있겠냐고 직원에게 물어봤다.

당연히 원래 주인이니 된다는 말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메일로 보내준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시하의 추억 하나를 얻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차피 저 파일이 어떻게 보관될지도 모르겠고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 많은 아이에게 돌려준다는 소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기 미술관이라면 메일로 문의해달라고 공문을 보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대부분 찾아갈지 모르겠지만.

“시하야. 아까 시하가 그린 그림 있잖아. 그거 메일로 보내준다고 하던데.”

“정말?”

“응. 픽시브에 업로드해서 자랑해도 된다고 하던데? 아! 배경 제공자는 크리스 작가라고 하더라.”

“크리스? 영어!”

“푸흡. 그래. 영어다. 영어.”

시하가 내게 손을 뻗었다.

저게 무슨 표시지?

“형아. 시하 업고 시퍼.”

“시하야. 형아 마음속에 들어갔다 왔니?”

“시하 아라.”

“아니. 모르는 거 같은데? 옆에 동환이에게 업히는 거 어때?”

“아냐. 백동 형아. 안 업고 시퍼.”

옆에서 백동환이 말했다.

“아니. 난 업고 싶은데?”

“아냐. 백동 그뉴기 시러해.”

“내 근육의 마음도 알아?”

“시하에게 몰래 말해써.”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야. 백동 형아 그뉴기.”

시하가 한쪽 팔로 알통을 보이는 시늉을 했다.

“그뉴기가 말해써. 무거어. 힘드러.”

“그럴듯한데?”

“시하 어브면 무거. 힘드러.”

나는 시하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럼 형아 근육은 말 안 해? 시하 무겁다고.”

“아냐. 형아 그뉴기 시하 조아해.”

“왜?”

“형아가 시하 조아하니까?”

“그래. 그래. 업혀.”

“아아!”

집에 다 왔는데 이제 와서 업히면 뭐 하나.

아니면 그냥 업히고 싶은 것뿐인가.

하여간 요즘 말도 잘해서 너무 예쁘다.

“형님. 집이 이제 바로 앞인데요?”

“나도 알거든. 바보야.”

“백동 형아. 바보.”

백동환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폈다.

“하하! 그래도 인형 받아서 좋습니다.”

“백동 형아. 시하가 쿠리스마수 선물 져써.”

“그래. 고맙다.”

“시하눈 목도리 받아써.”

시하가 목도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제 에프터 크리스마스도 끝인가 싶다.

“시하야.”

“아?”

“오늘 재밌었어?”

“재미써!”

“형아도 재밌었어.”

오늘 시하랑 이렇게 다니면서 안 가본 데도 많이 가봤다.

그래서 더 좋았다.

“형아.”

“응?”

“시하 그림 올려?”

“응. 당연하지.”

이번에는 별 뜻 없다고 확실히 못 박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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