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아침.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시하보다 먼저 떴으리라 자신한다. 왜냐면 어제 동시에 잠들었으니 말이다.
‘오로지 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지.’
몸을 일으키며 충전기에 꽂혀 있는 폰을 들었다.
시하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주먹을 살며시 말아쥐며 새우잠을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저 툭 튀어나온 볼을 콕콕 찌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깨우면 말짱 헛일이니까.
‘보자.’
나는 미리 준비했던 선물을 살며시 꺼내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내려놓았다.
포장지도 반짝반짝 화려했고 리본도 묶여 있다.
진짜 온 편지 역시도 양말에 꽂아놓아 두면 완벽.
이제 카메라만 설치하면 된다.
이걸 보고 기뻐하는 시하의 모습을 기록에 남겨두고 싶었다.
방과 선물을 향해 일자로 쭈욱 나올 수 있도록 세팅을 한 다음에서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다음에는 같이 잠들지 않고 기다렸다가 미리 세팅해 두자.
‘아직 새벽이네.’
시하가 일어나려면 멀었고 일찍 잠든 탓에 졸음은 날아가 버렸다.
저 선물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게 자못 기대된다.
‘밥 좀 안치고 있을까?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실력 발휘 좀 해야겠다.’
부엌으로 가서 분주히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방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시하가 깼다.
호다닥 들어가서 시하의 볼을 콕콕 찔렀다.
깨어나기 전에 맘껏 찔러 둬야지.
“아?”
시하가 눈을 살며시 뜨며 내 손가락을 잡았다.
힘을 줘서 당기더니 자기 볼을 콕콕 찌른다.
“시하 요이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웠대?
“숨바꼭질 아니야. 이제 꿈에서 깨, 시하야. 메리 크리스마스야.”
“아? 아아! 형아.”
“응. 그래.”
어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렴.
이날에는 그렇게 말하는 게 국룰이지.
“산타 할부지 와써?”
“그게 궁금해?”
“아아.”
“우리 몰래 왔다 가셨나 봐. 트리 밑에 선물도 있고 양말에 편지도 있던걸?”
“정말?”
“응.”
시하가 벌떡 일어나더니 도도도 달리며 방으로 나왔다.
“우와!”
예쁜 선물 상자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형아. 두 개. 두 개.”
“어? 그러네. 왜 두 개지?”
“하나 커. 하나 자가. 형아 꺼. 시하 꺼.”
“엥? 설마.”
“아냐.”
“그럼 같이 뜯어볼까?”
“아아.”
리본을 풀고 선물 포장지를 뜯었다.
안에 나온 것은 흰색 운동화였다.
장난감을 고르려고 했지만 시하가 별로 갖고 싶은 게 없다기에 보류했다.
나중에 사줄 수도 있는 거니까.
“어때?”
“형아 껀?”
“응? 오! 이것도 신발이네? 진짜 형아 발 사이즈랑 똑같아. 왜 형아 거도 있지?”
시하가 빨간 양말을 가리켰다.
“시하가 말해써. 시하 꺼 말고 형아 꺼.”
“응. 그러네. 근데 왜 시하 거도 있을까?”
“아?”
시하가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쿡쿡 웃으며 편지를 꺼냈다.
“편지가 두 개네? 읽어볼까? 여기에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아.”
나는 먼저 내가 만든 편지를 뜯었다.
“허허허. 메리 크리스마스다. 시하야. 네가 보낸 메시지는 잘 받았단다.”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원래 선물을 하나만 준비했는데 시하의 마음이 너무 착해서 형아 선물까지 준비했단다. 산타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어요.”
“형아랑 가타.”
시하가 신발을 들었다.
색상과 디자인이 같아서 시하가 더더욱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좋을까.
“앞으로도 마음이 예쁘면 좋은 선물 줄 생각이니 그래 줬으면 좋겠구나. 그럼 이만.”
“아아. 바이바이.”
“먼저 온 편지도 읽어볼까?”
“아아. 형아. 편지.”
“응? 아, 읽었던 거 줄까?”
“아아.”
시하가 편지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하 아라. 영어야. 영어.”
“응.”
일부러 영어로 편지를 썼다.
급하게 온 산타가 한국어로 쓰지 않고 영어로 휘갈겨 섰다는 설정이다.
물론 글씨는 정갈했다.
“시하야. 못 읽겠지? 나중에 영어 배우면 그때 제대로 읽어보자.”
“아냐. 시하 아라.”
“정말?”
“아아.”
시하가 한 곳을 가리켰다.
“메리 쿠리수마수.”
“푸흡. 아, 거기는 알 만하네.”
“아아.”
하여간 아는 단어만 콕 집는다.
그러면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배를 쭈욱 내밀며 ‘나 잘했지?’라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체 저거 누구한테 배웠을까? 승준인가? 아니면 종수인가?
어찌 되었든 귀여우면 된 거 아니겠나.
“자, 다 뜯었다. 그럼 읽을게.”
“아아.”
“허허허. 시하야. 펭귄의 취업까지 걱정하는 너는 정말 착한 어린이란다. 그 마음 잊지 말고 앞으로 펭귄을 많이 사랑해 주길 바란다. 산타 마을에서도 펭귄의 취직 자리를 마련해 둘게. 메리 크리스마스.”
많은 문장이 쓰여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읽었다는 게 티가 났다.
그리고 한글이 동글동글한 느낌이다 보니 여성이 쓴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하가 내 옆으로 와서 이 편지지를 봤다.
“형아. 시하 아라.”
“응? 이번에는 또 뭘 아는데?”
“이거 산타 할무니야. 할무니.”
“엉?”
“글자 기여어. 산타 할무니.”
“으음.”
시하도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어? 그러면 산타 할아버지는 기혼이신가?
그런 헛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편지지의 필체까지 맞출 생각을 못 했네.
그걸 알아보다니 시하는 천재인가!
하나는 영어고 하나는 한글인데 말이지. 눈썰미가 굉장하다.
하긴 그림을 그리는 시하인데 관찰력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 같이 신어볼까?”
“아아!”
“자. 형아가 신겨줄게.”
“아냐. 시하 할 수 이써.”
“그래.”
나는 재빨리 신발을 신었다.
시하가 어기영차 신발과 사투를 벌인다.
톡.
“아?”
아무래도 매듭을 너무 묶어서 그런지 바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하는 내가 선물에 리본을 푸는 것처럼 신발 끈도 풀었다.
똑똑하다. 저러면 발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다시 묶을 줄 모른다는 것.
끈을 잡고 휙휙 원으로 돌린다.
그러면서 나를 쳐다본다.
“형아!”
“혼자 할 수 있다며?”
“아냐. 이거 형아가 해주께.”
“시하가 형아 대사를 왜 말해?”
시하가 발을 살짝 내민다.
“형아 하고 시퍼. 시하 아라.”
“푸흡. 그래. 이거 해주고 싶다.”
나는 조심히 시하의 신발 끈을 묶었다.
예쁜 마음처럼 끈도 멋들어지게 얽혀간다.
시하와 나의 인연이 이렇게 리본처럼 예쁘고 새하얗게 얽혀있지 않을까 싶다.
“다 됐다.”
나는 시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일어서서 발끝을 붙이며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어때? 똑같지?”
“아아! 형아랑 가타! 예뻐!”
“앞으로 한동안 이 신발만 신겠네.”
어떻게 될지 뻔히 보여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시하야. 지금 밖에…….”
띵동!
현관문 벨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나타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시하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백동 형아!”
밖에서 시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백동환이 말했다.
“형님. 저 왔습니다. 밖이 엄청 춥네요. 열어주십쇼.”
“시하야 어떻게 할까?”
“백동 형아. 집 가. 따뚜테.”
백동환이 말문이 막혔는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추우면 집 가면 된다. 맞는 말이군.
“불쌍하니까 열어주자.”
문을 열자 백동환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쉽게?”
“왜? 아쉬워? 다시 닫아?”
“아니요! 아닙니다! 저 좀 들어가게 해주세요.”
“근데 뭐 하느라 어깨에 이렇게.”
“하하. 당연히 운동 아니겠습니까. 오늘 쉬는 날이지만 열심히 몸은 챙겨야죠.”
“감기 걸린다. 너.”
“하하핫! 놀랍게도 전 감기 잘 안 걸립니다. 면역…….”
“근육이 좋아서? 바이러스로 때려잡나?”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아니, 너라면 가능할까 싶어서. 아무튼, 추운데 들어와.”
시하가 소복이 쌓인 눈을 밖에서 털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백동 형아! 모야? 하해!”
“응? 아! 이거 눈이야.”
시하가 엄청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저렇게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시하야. 지금 밖에 눈이 왔어. 이걸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해.”
나는 커튼을 걷었다.
하얗게 물들인 세상을 시하의 망막이 품었다.
그 장관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형아.”
“응?”
“바께 큰 신발이야. 하해.”
“오!”
밖은 시하가 신은 하얀 큰 신발이라는 표현이 왠지 멋진 것 같다.
언제나 밟히는 신발처럼.
때로는 부드럽게 쿠션 역할을 해주는 것처럼.
어쩌면 세상이 신발로 변하는 때를 맞이한 걸지도 모르겠다.
***
백동환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시하의 선물을 슬쩍 들고 꺼내놓으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이번에는 안 늦었다!”
“아직도 생일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때 얼마나 구박받았는데요!”
“내가 그 정도로 놀리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그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아무튼, 비싼 건 아니고요.”
“비싸면 나도 부담스럽지. 어쨌든 고마워. 나도 뭔가 준비해 줘야 했는데.”
“이렇게 든든한 한 끼면 충분합니다. 시하 먹이려고 오늘 요리 빵빵하게 할 줄 알았어요!”
“솔직히 말해봐. 너 아침 먹는 거 노리고 왔지?”
“크흠.”
백동환이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돌린다.
하여간 웃긴 놈.
뭐, 여러모로 백동환에게도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이런 든든한 한 끼 정도는 대접하고 싶기는 했다.
나가서 먹는 거야 평소에도 자주 먹으니까.
“이건 형님 선물입니다.”
“어? 내 거도 있어?”
“네. 뭐. 그냥 고맙기도 하고요.”
“뭐가 또 고마워서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챙겨주냐.”
“그냥 다요. 올해 형님 덕분에 겨울이 따뜻하지 않습니까.”
“네가 잘해서 취직된 걸 왜 내 덕분이라고 하냐. 너 그러지 마. 전에도 말했지? 네가 잘해서 기회를 잡은 거라고.”
“기회도 운이 틔어야 하는 겁니다. 제 운은 형님이었구요.”
“얼씨구. 요즘 성우 일을 하면서 대본 좀 많이 봤나 본대?”
“하하. 그럴싸했나요?”
“암튼, 고맙다. 근데 뭐지?”
나는 선물을 뜯어보았다.
“마우스?”
“네. 형님 손목 조심하셔야죠. 그걸로 오래 일할 텐데.”
“버티컬 마우스는 한 번도 안 써봤는데. 고맙다.”
시하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형아. 시하 꺼.”
“응. 그래. 뭔지 보자.”
상자를 풀어보자 나오는 건 펭귄 목도리였다.
“오! 안 그래도 목도리 사야 하나 싶었는데. 잘됐다. 근데 이 펭귄은 어디서 구했어?”
“아아! 페페! 백동형아 고마어!”
“하하하. 그냥 지나가다가 본 건데 시하 생각이 팍 나더라고요. 그래서 샀죠.”
“잘됐다. 시하야. 어차피 이제 나갈 텐데 목도리 하면 되겠다. 그치?”
“아아. 시하 나가!”
백동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시하야. 이왕 나가는 김에 하나 더 나가볼래?”
“모가?”
“어린이미술관에서 지금 개최하는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있거든. [선물하는 예술광장]이라고.”
“???”
백동환이 멋쩍어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제가 거기에 미리 신청을 해뒀습니다. 하하! 시하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게 뭔데?”
“VR 브러쉬로 그림을 그려보는 건데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아요.”
“흐음? 전시도 하나? 설마?”
“네. 전시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뭐 근데 애들 노는 공간이라.”
“뭐 주지는 않지?”
“에이 형님. 거기서 무료로 VR 공간과 아이들 창작공간의 기회를 주는 건데.”
“그렇겠지? 흠흠. 내가 속물적인 게 아니라 네가 들고 오니까 뭔가 있음직해서.”
“사실 참가하면 주는 상품이 있습니다.”
나는 백동환을 보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아십니까. 어린이미술관에서 주는 무려 한정판! 마스코트 캐릭터 인형!”
“거, 한정판 너무 좋아하네.”
“이번에 그 캐릭터의 아빠도 나오는 영상을 찍었는데 바로 제가 맡았습니다!”
“으응?”
“저 완전 그거 갖고 싶다고요.”
“일단 시하에게 물어보고. 시하야. 그림 그리러 가자는데?”
시하가 백동환을 빤히 보았다.
“시하. 형아랑 노라. 마니.”
“아…. 싫,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거기 엄청 재밌고 신기할 텐데.”
“아냐.”
“내일, 모레까지 행사해서 참여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행사 기간이 3, 4일은 되나 보다.
하긴 전시도 한다니까.
잠깐 참여 기간은 짧고 전시는 길게 해주려나?
아니지. 그것도 시하가 원하면 가야지. 암.
그런데 어린이미술관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어떤 곳일까?
“시하 내일.”
“그래. 그래. 내일 가는 거다?”
“아아. 형아. 눈. 눈!”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눈 가지고 놀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다.
[승준 엄마]
전화를 받자 쌍둥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하야! 눈싸움하자!
-시하야! 눈사람 만들자!
아, 눈싸움은 여러 사람이 있어야 재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