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12월 23일.
드디어 시하의 옷이 도착했다.
동시에 내 옷도 이 택배 상자 안에 있겠지만 살며시 외면하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안을 뜯어보면 승준과 하나에게 선물할 옷도 있을 것이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
어린이집 갈 때 입고 가면 된다.
25일은 대학교가 휴일이니 어린이집도 휴일이다.
“형아. 모야?”
“응? 선물.”
“산타 할부지 편지는?”
“아. 그거? 아마 어린이집에 있지 않을까? 도착했을지 모르겠네.”
시하의 편지를 봤을 때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도 그렇잖아. 그걸 어떻게 그런 식으로 글을 쓰냐고.
하고 싶은 말을 전혀 다른 연출로 적어서 느낌을 확 다르게 했다.
그래서 애써 무시하고 그림만 바라보았다.
펭귄도 산타 할아버지 일하는 데에 취업시켜달라는 발상은 정말 대단하고 생각한다.
빙판을 씽씽 달려서 사람들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거겠지.
생각이 따뜻하다.
픽시브에 올려진 그림에 사람들이 자주 말하지 않는가.
시하의 그림은 따뜻하다고.
뭐? 해석이 잘못돼서 그렇다고? 아니, 그거야 부정은 못 하기는 하는데…….
아무튼, 지금은 이 선물이 중요하다.
“시하야. 이건 내일 입을 옷이야. 크리스마스이브.”
“옷? 페페야?”
“아니. 루돌프야.”
나는 상자를 열었다.
비닐로 포장된 물품을 하나씩 꺼냈는데 산타 옷과 눈사람 옷이 먼저 보였다.
하나와 승준에게 줄 선물.
그 뒤에는 루돌프 옷이 보였고 그 아래는 뭔지 모를 커다란 옷 하나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게 어른 옷인 것 같다.
왜 이것만 검은 포장지일까? 너무 비밀스러워서 열어보고 싶지 않잖아.
시하도 그게 궁금한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아. 이거 모야?”
“글쎄. 과연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시하. 궁굼해.”
“그래? 형아는 안 궁금한데.”
“보자. 보자.”
“아니야. 우리 내일 보자.”
“왜?”
“일단 시하 루돌프 옷을 입어볼까?”
나는 말을 돌리며 루돌프 옷을 꺼냈다.
확실히 시하가 입으면 귀여워 보일 것 같았다.
곧바로 입혀 봤는데 외향을 설명하면 이렇다.
머리. 군밤 모자에 사슴뿔이 달려 있다.
시하의 얼굴이 동그랗게 되어버렸다. 너무 귀엽다.
상의. 어깨에는 산타처럼 짧은 망토가 둘려있는데 루돌프라서 그런지 갈색이다.
목 가운데는 빨간색 솜 방울이 달려 있다.
아무래도 루돌프 코를 나타내는가 보다.
그 아래는 루돌프라고 주장하는 타원의 흰색 배 부분과 갈색 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와. 시하야. 루돌프 됐네?”
“형아. 시하 루돌푸 대써? 시하 코 레드야?”
“아니. 시하 코는 살구색인데?”
“왜?”
“아니. 왜냐니. 당연한 거지. 이걸 입으면 변신! 하면서 코가 빨개지지는 않아.”
“그럼 시하 루돌프 아냐.”
반짝이지 않는 코는 과연 루돌프가 아닌 것일까?
철학적인 물음이구만. 역시 이시하는 천재인가. 나중에 철학과를 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런 헛생각을 하던 중 시하가 쪼그려 앉아있는 내 볼을 콕 하고 찔렀다.
핫!
“형아?”
“어? 어? 형아 여기 있어.”
“루돌프 아냐?”
“아니. 여기 빨간 코가 있네. 시하 망토에 말이야. 맞지?”
시하가 솜 방울을 손으로 들더니 코에 갖다 댔다.
“시하 레드 코.”
“푸흡.”
“루돌푸야. 루돌푸.”
“그래. 루돌프네. 루돌프. 그런데 시하 루돌프야. 부업 하니? 군밤 장사하게 생겼는걸?”
“군밤 모야?”
“어? 그거부터구나. 밤을 구운 거야.”
“!!!”
시하가 눈을 크게 떴다.
“형아. 밤 구어서 밤이 새까매.”
“응?”
아니. 하늘의 밤 말고 먹는 밤.
어? 근데 은근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밤에 햇님에게 구어서 새까매져써?”
뭔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태양에게 노릇노릇하게 굽히다 못해 새까매졌다.
발상의 천재인가?
가끔 이렇게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우리는 해가 져서 새까매지는 거로 알지 설마 구워져서 새까매졌다고 생각은 못 할 테니까.
시하와 이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머릿속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그 밤이 아니라 먹는 밤이라고 있어.”
나는 폰으로 군밤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자. 여기. 보이지?”
“아아! 보여. 이거 마시써?”
“다음에 형아가 사줄게.”
요즘 마트에서도 파니까 그걸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사실 찐으로 굽는 군밤을 사주고 싶긴 한데…….
“이제 옷 벗자. 내일 입고 가는 거야.”
“형아는? 시하랑 가타?”
“어? 내 옷?”
“형아 옷!”
“으음. 글쎄? 아마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나도 뭔지 모르거든.
저 검은 포장지를 꺼내보고 싶지 않다.
***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하나는 어제 시혁이 준 예쁜 산타 복장을 하며 들뜨는 중이었다.
무려 그 시혁이 오빠의 선물이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밤에 보고 또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옷을 입으며 엄마와 아빠에게 ‘하나 오늘 예뻐?’라고 몇 번이나 물었다.
“어머. 정말 예뻐. 역시 시혁 씨는 센스가 좋다니까.”
“크으. 누구 딸인지 이렇게 예쁠 수가. 하나야. 아빠랑 평생 살자.”
그 말에 하나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하나는 시집갈 건데?”
“뭐?! 어떤 새… 가 아니라 어떤 자식도 아니고 어떤 남자랑!”
“시혀기 오빠!”
“뭐?!”
승준 아빠가 충격을 받았는지 허공에 ‘딴딴딴. 안 돼. 손을 놓고 싶지 않아.’ 하며 결혼식장으로 생각이 넘어갔다.
하나는 엄마에게 헤헤 웃으며 매달렸다.
“정말 시혁이 오빠에게 시집갈 거야?”
“왜? 엄마 반대야?”
“아니. 엄마는 시혁이 오빠 좋지.”
“정말?”
“응. 사람이 좋잖아.”
“헤헤헤.”
오늘 시혁이에게 받은 옷을 보여줄 생각을 하니 기분 좋은 하나였다.
하나 엄마는 오상환의 등을 두드렸다.
“별것도 아닌데 왜 충격을 받아요. 정말 시혁 씨랑 결혼하겠어요? 나이 차이가 얼만데.”
승준 엄마는 하나가 시혁에게 느끼는 게 사랑이 아니라 동경에 가까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왕년에 아이돌 팬클럽도 가입하고 오빠를 외치며 따라다니던 모습과 겹쳤다.
그 당시 하나 엄마는 아이돌 오빠랑 결혼하고 싶었다.
오상환이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저 나이 때는 그런 거 있잖아. 나는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뭐 그런 멘트. 나 그거 기대했다고.”
“어휴. 요즘 애들이 누가 그런 멘트를 해요. 요즘 어린이집 누구누구랑 사귄다고 말하지.”
“뭐?! 하! 세상 말세네. 애들이 왜 이렇게 빨라.”
“뭘 또 그런 거 가지고 세상 말세이실까. 애들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놀이라고요. 하루 만에 사귀었다가 하루 만에 깨지고 다른 애랑 또 사귄다더라고요. 뭐라더라? 친구 여친이 자기 여친이 되고 바뀌는 예도 있다던가?”
“뭔 막장 드라마야.”
“그러니까 일종의 놀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넷이서 같이 잘 논다네?”
“엥?”
현실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하다는 걸 오상환 교수는 몰랐다.
애들에게는 실제로 가슴 절절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왜 하나 사랑만 신경 써요.”
“으응?”
하나 엄마가 오상환 교수의 어깨를 살며시 털었다.
먼지도 없었는데 말이다.
“내 사랑도 신경 쓰면 좋겠네.”
“흠흠.”
“우리 첫 크리스마스이브 때 좋았는데.”
“흠흠. 여보 애들도 있는데.”
“제가 뭘 말했는데요?”
승준 엄마가 새초롬한 모습을 보였다.
오상환 교수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심하게 했다.
그리고 하나는 이번에 오빠에게 자신이 입은 옷을 보여주었다.
“오빠! 하나 오늘 예뻐?”
승준이 하나를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못생겼다.”
하나의 눈썹이 하늘로 솟았다.
다들 이쁘다고만 하는데 오빠라는 사람만 이렇게 화를 돋운다.
자기는 동글한 눈사람 옷을 입고 있으면서 말이다.
“이씨! 오빠도 못생겼거든! 눈사람이 모야!”
“왜! 이 동글동글한 게 멋있잖아. 공 모양이라고. 그거 알아? 공은 세상에서 완벽하대!”
“못생긴 오승준!”
“야!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삐졌어?”
“못생긴 오승준!”
말 한번 잘못 했다가 계속 말로 두들겨 맞는 승준이었다.
오빠란 소리도 회수가 되었다.
그렇게 투덕거림이 끝나고 다들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역시 예상대로 모두 산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쌍둥이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어머. 둘 다 예쁘게 꾸미고 왔네요. 하나는 산타고 승준이는 눈사람이네? 특이하다.”
“하하. 이거 시혁이 형아가 선물해 줬어요!”
“정말?”
“네! 역시 시혁이 형도 공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까 썬더 쓰리 동호회에 들어왔지!”
하나가 말했다.
“시혀기 오빠는 옷 좋아하는 거야. 이렇게 예쁜 산타 치마를 골라줬으니까. 선생님. 예뿌죠?”
“하나. 오늘 엄청 예뻐. 검은 레깅스에 치마에. 짱이야.”
“진짜?”
하나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칭찬을 바라는 아기새 같아서.
“응. 정말이죠. 이렇게 예쁜 산타는 어디에도 없을 텐데.”
“헤헤.”
하나가 기쁘다는 듯이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때 종수가 살짝 나와서 승준을 보았다.
“푸핫! 눈사람 뭐야.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산타지.”
“간다! 눈싸움!”
승준의 손등에 눈덩이가 붙여져 있었는데 그걸로 종수의 머리를 콩콩 때렸다.
놀리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실제로 승준이 우스꽝스러운 복장이라기보다는 그냥 귀여웠지만.
“야! 이게 무슨 눈싸움이야!”
종수가 열심히 피하려다가 넘어졌다.
승준이 기회다 싶어서 그 위로 올라탔다.
“간다. 눈덩이!”
“억! 내려오라고!”
승준은 인형 옷처럼 배가 볼록 나와 있어서 정말 종수가 눈덩이에 묻힌 거로 보였다.
그걸 지켜보던 재휘는 ‘눈덩이 무서워.’ 하면서 구해줄 생각을 안 했다.
“재휘야. 도와줘!”
“종수야. 힘내.”
“응원 말고 도와달라고!”
그런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시하가 등장했다.
형아의 손을 꼬옥 잡고 말이다.
“어머. 어서 오세요. 시혁 씨. 오늘은 뭔가 안 꾸몄네요?”
“아, 네…….”
“안녕. 시하야. 오늘은 루돌프네? 너무 귀엽다. 군밤 모자에 사슴뿔 있는 게 특히.”
“아아! 루돌푸!”
“정말 그러네.”
“형아랑 가치.”
“응? 형아는 안 입었는걸?”
“아냐. 가치야. 가치.”
선생님은 시혁을 보았다.
롱패딩을 입어서 그런지 안을 볼 수 없었지만 시하의 말을 들어봤을 때 무언가 입은 것 같았다.
과연 대체 그게 무엇일까?
호기심이 들어서 빤히 보았다.
시혁이 그런 시선을 피하며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시하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우리 시하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말이야.
“시하야. ‘형아랑 같이’라고 했잖아. 그럼 형아도 루돌프겠네? 맞지! 군밤 모자 쓴 시혁 씨를 봐야 했는데.”
“루돌푸 아냐.”
“응? 루돌프 아니야?”
선생님은 당황했다.
분명 예상하기로는 루돌프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사하의 손에 흰색 방울 털모자가 들려 있었다.
그럼 이게 시혁 씨 거?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갔다.
흰색이라는 뜻은?
선생님이 고개를 휙 돌려 승준을 보았다.
어느새 아이들이 시하 곁에 모여 있었다.
“아항. 승준이처럼 눈사람 맞죠? 그렇죠?”
“으음.”
“샘. 눈사람 아냐.”
“엥? 그럼 뭐지?”
아이들도 한마디씩 예상을 뱉었다.
먼저 승준이부터.
“알았다. 흰색 모자는 시혀기 형아 꺼야. 눈사람이야!”
승준아. 그거 시하가 아니라고 이미 했어.
“시혀기 오빠는 아이돌이니까 별이야. 하얀 별.”
하나야. 시혁이 오빠가 언제부터 아이돌이었니?
“흰색이니까. 아! 설인이라고 있대. 설인일 거야.”
종수야. 시하가 ‘설인 모야?’라고 물어보는데 아니겠지.
“시혁이 형아는 롱패딩 입은 것도 멋있어. 어디 꺼지? 등 쪽을 보고 싶은데.”
재휘야. 롱패딩이 중요하니?
“운동복이라서 안 보여주는 거지. 나는 그냥 보여주는데.”
윤동의 운동복 사랑. 춤 연습할 때는 최고지.
[산 타! 닥. 타닥. 올라가는 소리.
거기까지 갈 때 보여주라. show me.
모두가 궁금해하네. 뭘 입었는지.
물음표를 외치네. 할아버지까지.
산-타! 산-타! 뇌 속은 산탄.
산-타! 산-타! 내 속은 산탄.
모두가 궁금해해. 네 속은 뭔지. uh~]
“yo. yo. 찢었당. 찢었당!”
은우야. 대체 뭘 찢었니?
“음. 다들 궁금해하시니까 보여드릴게요.”
시혁이 롱패딩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