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뭐, 살다 보면 이상한 노래 하나쯤은 배우게 된다.
시하도 그런 거고.
이상하게 강렬한 기억이라서 그런지 까먹지는 않게 되어 오래 남는다.
내가 생각했던 캐럴이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그런 노래도 불렀었지, 라며 어릴 때만의 추억을 되새길 수도 있을 거다.
이제 노래는 되었다.
중요한 것은 시하가 산타할아버지에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이다.
“시하야. 산타할아버지에게 갖고 싶은 선물은 말했어?”
“아?”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산타 할부지한테 말해?”
“응.”
“만나서?”
“아니. 편지에 쓰면 산타할아버지가 그걸 읽고 허허허 우리 시하가 이걸 갖고 싶구나, 하며 뚝딱 선물을 만들어서 가지고 오셔.”
“정말?”
“응. 그래서 다들 편지를 쓰는 거야.”
시하가 잠깐 고민하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시하 글 모써.”
“괜찮아. 그림으로 이야기하면 되니까.”
“아아.”
아무래도 아직 어린이집에서 편지를 안 썼나 보다.
뭐, 오늘 쓸 수도 있는 거고.
미리 좀 물어볼까?
“그래서 시하야. 어떤 선물 받고 싶어?”
“업써.”
“없다고? 왜?”
“시하 생일. 선물 마니 받아써.”
“아하…….”
하긴 시하 생일이 12월 5일이었으니.
그때가 역대급으로 엄청난 선물이기는 했다.
페페의 인형 옷 머리가 아직도 방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장난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갖고 싶은 게 많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형아에게 꼭 말해줘야 해. 알았지?”
“왜?”
그걸 물어보다니.
사실 산타가 사무직이라서 ‘아. 편지 왔네? 오키오키. 부모님아. 알아서 하셈.’ 하고 연락만 온다고 어떻게 말할까?
“하하. 그냥 형아가 궁금해서 그래.”
“형아. 비밀이야. 비밀.”
“왜? 형아에게는 알려줄 수 있는 거잖아.”
“소언은 비밀. 배어써. 비밀이야 이러져.”
응. 그렇지. 소원은 말을 안 해야 이뤄지지.
벌써부터 비밀을 만들다니. 흑흑. 형아는 슬프단다.
그때 시하가 두 손을 오므리며 작게 말했다.
“형아.”
“응?”
나는 저 행동에 귀를 가져다 댔다.
“시하 소언 몰래 말해주께.”
“푸흡. 그래?”
“아아. 저기. 저기. 저기서 몰래.”
“어디라고?”
시하가 도도도 방으로 달려가 인형탈을 가리켰다.
“여기 안에 가치.”
“어? 꼭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아아. 비밀이야.”
“그, 그렇구나.”
웬만하면 비밀은 많이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까?
거기에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그런데.
“형아. 빨리.”
“벌써 비밀 생겼어?”
“아냐. 그냥.”
“안 돼. 그냥은 안 되지.”
아무래도 자기가 말해놓고 나랑 같이 들어가 보고 싶은 모양이다.
***
-어린이집.
오늘은 선생님이 예쁜 편지봉투와 편지지를 준비했다.
산타에게 보낼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선생님 말을 듣더니 너도나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다들 가지고 싶은 게 넘쳐났다.
시하는 편지지를 앞에 두고 팔짱을 끼며 열심히 고민했다.
무엇을 적을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이미 현재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선생님이 그런 시하에게 다가갔다.
“시하야. 갖고 싶은 게 없어?”
“시하 다 가져써. 레드 차. 형아. 페페.”
시하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간에 형아가 있는 걸 제쳐두고 가지고 싶은 게 없나 보구나. 그렇다면.
“그럼 산타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해도 돼요. 아니면 루돌프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
그건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시하가 색연필을 잡았다.
슥삭슥삭.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그린다.
대체 어떻게 표현할지 기대가 되었다.
“음? 야! 보지 마!”
승준이 종수의 편지에 기웃거렸다.
종수가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하고.
“왜? 뭔가 이상한 거 그렸지?”
“아니거든. 네가 봐도 모르잖아. 나 글자도 적었는데.”
“글자 못 읽어도 그림 보면 되거든.”
“이건 비밀이라고. 저리 가.”
“어차피 나중에 선생님이 발표한다고 했는데 치사하네.”
“그럼 넌 뭘 그렸는데?”
“당연히 이거지!”
승준이 자신 있게 편지지를 보여주었다.
종수가 의문 어린 눈으로 ‘저게 뭔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한 번 비벼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동그라미만 있는데?”
“어휴. 공이잖아. 공.”
“야. 그거면 무슨 공인지 모르잖아.”
“이제 또 그릴 거거든.”
“뭐야. 덜 그렸네! 그래놓고 내 걸 보려 했다고?”
“에이. 이건 금방 그리지.”
“어? 그렇긴 한데…….”
어차피 저기서 더 그려봤자 선 몇 개가 끝이다.
공이란 게 별로 복잡한 걸 요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종수는 승준에게 한 번 말로 밀렸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넌 맨날 공이야? 집에도 많이 있을 텐데.”
“아니야. 없는 것도 있어.”
“그리고 공 그림이 좀 별로인데. 진짜 공 같이 그려야지.”
“야. 너도 그림 실력 만만치 않거든!”
그때 시하가 두 사람 사이에 쏙 끼어들었다.
“승준. 종수. 둘 다 잘 그려.”
두 사람을 진정시키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둘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시하의 말이었으니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 되어버렸다.
물론 시하는 노리지 않았지만.
“어? 뭐.”
“으음. 그림이나 그려야겠다.”
“아?”
그런 미묘한 분위기가 되어버려서 신경전은 흐지부지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도 말이다.
그다음 꼭 찾아오는 발표시간.
“자. 오늘은 어떤 선물을 산타 할아버지에게 빌었는지 말해 봅시다. 친구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아는 시간이 될 거예요. 서로 잘 알아야 더 친하게 지내죠.”
그리고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 해야 했다.
살면서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말하게 된다.
이런 발표 역시도 누구나 경험하게 되니까.
또 친구들의 기호와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참으로 중요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데이터가 쌓이며, 아는 부분에 대해 배려를 해줄 수 있다.
그게 바로 ‘정’이라는 걸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먼저 해볼래요?”
“저요!”
“그래. 승준아.”
승준이 앞에서 편지지를 펼쳤다.
“여기 공을 그렸어. 집에 축구공도 있고 야구공도 있고 농구공도 있어. 하지만 없는 공이 많아. 난 운동하는 모든 공이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럭비공이나 탁구공도 장난감 상자에 넣을 거야.”
그런데 왜 럭비공도 동그랗게 생겼을까?
희한했다.
시하는 ‘럭비공이랑 탁구공이 또 뭐지?’ 하며 생각했을 뿐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많았다.
“다음은 하나!”
“그래요.”
“하나는 예쁜 옷이 갖고 시퍼. 그래서 시혀기 오빠랑 데이뚜할 거야.”
“아? 아냐. 형아랑 시하 데이뚜해.”
“시하야. 데이뚜 뭔지 아라?”
“시하 아라. 오뚜기 친구야.”
자신 있게 말하는 이시하.
선생님은 ‘그거 아니야.’ 하면서 그냥 같이 노는 거라고 말해 주었다.
시하는 그제야 ‘아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종수.
“후후후. 난 장난감이 아니야. 노트북을 달라고 할 거야. 멋있게 코코아를 마시면서 키보드를 열심히 칠 거야. 어때? 멋있지?”
“시하 아라. 형아 노투북 써. 형아 머시써.”
시하야. 뭐든지 형아랑 연결시키는 거니?
종수가 잠시 당황해서 주춤했지만 가슴을 쭉 폈다.
“어…. 그래! 시혁이 형아처럼 노트북 쓸 수 있게 달라고 할 거야!”
“!!!”
시하는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갖고 싶은 거로 노트북 달라고 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종수는 그저 시하가 왜 저러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오늘 시하를 이겼다는 걸 몰랐다.
다음은 재휘였는데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옷을 말했다.
윤동은 춤 잘 추는 사람이 신는 신발.
은우는 랩을 만들 수 있는 녹음실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저기. 은우야. 그거 부모님이 사주면 등골 휘어져.
“이제 시하!”
시하가 벌떡 일어서서 편지지를 펼쳤다.
펭귄이 빨간 코를 하고 사슴뿔 머리띠를 하고 있다.
어깨에는 줄이 그려져 있고 뒤에는 썰매.
“???”
아이들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고 선생님이 질문을 던졌다.
“시하야. 그게 뭐니?”
“이거 페페야. 페페.”
“응. 페페인 거는 선생님도 알아. 산타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저거니?”
“산타 할부지. 루돌푸 말고 페페도. 회사 가. 회사.”
“펭귄도 회사에 취업시켜 달라고?”
“아아. 치업. 여기여기. 얼음 위에 씽씽 달려.”
“오. 그러니까 이 부분이 펭귄이 취업할 능력적인 면이라 이거지?”
“페페가 펭긴들 선물 져.”
“오호. 산타 할부지… 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펭귄에게 선물을 줘야 한다고 그림으로 말하고 있는 거지?”
“아아.”
시하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말을 선생님이 글로 써줄게. 어때?”
“조아.”
다른 아이들도 그렇지만 명확하게 원하는 걸 그림 아래에 써주었다.
부모님이 보시고 모를 수도 있으니까.
시하의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펭귄 대표 이시하.
펭귄도 선물 받을 권리가 있다! 산타 할아버지는 펭귄의 취업은 물론 선물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어깨너머로 유다희 선생님이 쓴 글을 본 원장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저런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엉뚱한 매력의 유다희 선생님이었다.
“자. 여러분. 그러면 여기 박스 안에 편지를 넣을까요? 나중에 우체국을 통해서 산타할아버지에게 전해줄게요.”
종수가 물었다.
“선생님. 산타할아버지 주소 모르는데요?”
“걱정 마. 우체국 아저씨는 다 알아.”
“아닌데. 주소 써야 한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이래서 똑똑한 친구는.
“선생님이 나중에 주소 써서 보낼 거예요.”
“주소가 어딘데요?”
“핀란드 라플란드 지역의 로바니에미.”
“네?”
“외국에 산타 마을이 있거든.”
“!!!”
솔직히 종수는 의심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정말 주소를 알고 있을까?
물론 산타의 존재 자체를 수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똑똑한 종수는 산타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정말요? 거기에 가요?”
“그럼. 국제 우편인데.”
“!!!”
“왜? 종수야. 못 믿겠어?”
“네.”
“솔직하네. 그럼 선생님 한번 믿어봐. 여기 답장이 올 거야. 정말이야.”
“진짜요?!”
아이들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했다.
“정말요?”
“너무 의심하네. 그럼 내일 다 같이 우체국으로 갈까?”
“네!”
선생님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원장 선생님이 다가와 속삭였다.
“어쩌려고 그래요? 우체국 직원이랑 말 맞추려고요?”
“네? 진짜 국제 우편으로 보낼 생각인데요?”
“예?”
“실제로 거기에 산타 마을이 있어요. 물론 답장 보내는 건 거기 자원봉사자들이고요.”
“정말요?”
“네. 이번에 한국어로 답장해 주는 자원봉사자도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아하…….”
“원장님. 이때 비용 좀 쓰시죠.”
“뭐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우편이니 얼마 안 하겠죠.”
“일단 사진을 찍어서 부모님들에게 편지를 전해 주려고요. 실제로는 여기 주소로 붙이고.”
선생님이 주소를 보여주었다.
[Santa Claus, Santa Claus 's Main Post office, 96930 Napapiiri, Finland]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산수화로 10 산타 우체국 대한민국 본점 (우편번호 24120)]
“한국에 산타 우체국도 있는 걸 처음 알았네.”
“후후후. 아이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굉장히 많은 발전을 했답니다.”
원장은 살며시 걱정이 들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시하의 편지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