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시하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달려와서 몸을 던졌다.
푸욱.
뚱뚱한 페페 인형탈에 얼굴을 묻었다.
“형아페페!”
“벌써 이름까지 다 지었어?”
“아아!”
시하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보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손만 펭귄이 아니었으면 사진을 엄청 찍고 싶었다.
“똑똑.”
시하가 페페의 배를 손으로 두드렸다.
“형아. 이써?”
“응. 형아 안에 있지.”
“오늘 시하랑 노라?”
“응. 엄청 놀 거야. 페페랑 함께 노는 거야. 어때? 엄청나지?”
“시하. 행벅해~”
시하가 흐물흐물해졌다.
페페의 배에 얼굴을 묻으며 비벼댔다.
얼마나 좋으면 이러겠나. 흡사 아이언맨을 실제로 본 어린이의 모습이었다.
특히 페페는 시하가 직접 창조한 캐릭터.
그게 현실에 툭 튀어나왔으니…….
“그럼 뭐 하고 놀까? 시하가 하고 싶었던 거 다 할 수 있어. 오늘.”
“정말?!”
“응. 페페랑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봐.”
“아아!”
시하가 열심히 고민했다.
나도 기대가 되었다. 과연 어떤 요구를 할까?
사실 몇 가지 준비하기는 했다. 혹시 시하가 생각 안 날 수 있으니까.
언제나 준비는 완벽했다.
“시하. 형아페페랑 놀이터!”
“응? 정말?”
“아아!”
아, 이거 입고 나가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물론 모습이 안 보여서 괜찮긴 하지만.
“알겠어. 가자.”
“아아!”
시하가 펭귄 가방을 방에 털썩 놓고 내 손을 잡았다.
밖으로 나갔는데 별로 춥지 않았다.
인형탈 안이 따뜻했기도 했지만 안에 옷을 잘 갖춰 입고 있었으니까.
“그럼 잠깐만 놀이터에서 놀고 다음에는 집에서 또 놀자.”
“아아!”
그렇다고 밖에 오래 있으면 감기가 걱정되니 적당히 놀아야겠다.
적어도 해가 지려고 하면 돌아가야지.
“형아페페. 미꾸럼툴!”
“으응?”
“가치. 가치.”
뻔히 예상되지만 미끄럼틀 위에 앉았는데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 없었다. 이게 뚱뚱해서 앉는 것도 불가능했다.
“가치 모타?”
“아니. 다 방법이 있어!”
미끄럼틀 위에 올라탔다. 엎드린 채로 옆을 꾸욱 잡았다.
“이제 머리를 잡아.”
“아아.”
뭔가 시하는 등 뒤에서 페페가 꼬옥 잡아주고 미끄럼틀을 같이 타는 걸 상상했을 것 같았다.
물론 현실은 불가능했다.
대신 머리와 시하가 붙어있게 탈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보면 뭔 해괴한 짓인가 싶겠지만. 그거야 상관없었다.
“형아페페. 출발!”
“출발!”
쭈욱 미끄러져 내려갔다.
시하가 신이 나는지 꺄르륵 웃었다.
거기에 힘입어 몇 번이나 탔다. 충분히 재미를 봤는지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렸다.
“형아페페. 시소! 시소!”
“응.”
끼익. 끼익. 위아래. 위아래.
아이들과 시소를 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하체 운동이 된다.
물론 나는 탄다기보다는 엎어져서 위아래로 진자운동을 해줬지만.
이것 역시 시하가 바라는 그림이 아니지 않았을까?
아니. 페페의 다리가 짧은 걸 어떡하라고…….
그때 지나가는 아이가 말했다.
“어? 엄마! 펭귄 시체다! 시체야! 널브러져 있어.”
“어머. 말린 생선 같이 되어있네.”
“아하하. 나도 저 애처럼 같이 놀고 싶다.”
“안 돼요. 오늘 빨리 집에 가야지.”
“아아아. 나도 놀래. 놀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어딜 감히! 오늘 형아페페는 시하가 전세 냈다고.
시하가 그런 위기감을 느꼈던 걸까?
“형아페페. 지베서 노라~”
“응? 이제 집 갈까?”
“아아.”
똑똑하군. 놀이터에 오래 놀면 형아페페를 차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나 보다.
하지만 자신의 홈그라운드라면?!
수성이 공성보다 더 어려운데 시하는 이걸 지키기 위해 지략을 펼쳤다.
전쟁 좀 할 줄 아는데? 어쩌면 제갈량이 와서 천재라고 감탄을 뱉을지도 모르겠다.
‘네 머릿속이 더 전쟁 난 거 아니냐?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네.’라고 문도환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환청이. 훠이훠이. 날아가라.
내가 펭귄 손으로 하늘 위로 파닥파닥 저었다.
“형아. 모해? 안 가?”
“응? 아아! 가야지.”
시하의 손을 잡고 떠나려고 하자 이제 놀려고 온 아이가 힝 하며 울먹인다.
“아 왜 벌써 가는데! 나도 같이 놀려고 했는데!”
“어머. 가나 보다. 그러니 우리도 어서 가자!”
저 애 어머니의 목소리가 밝다.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마음이 참으로 큰 것 같다.
“형아페페.”
“응?”
“지베서 모해?”
“음.”
집에서 뭐할지 생각이 안 나나 보다. 하긴 놀이터에서 실컷 놀 생각이 가득했을 테니까.
“숨바꼭질할까?”
“아아!”
시하가 좋아했다.
***
정말 전쟁을 아는 것일까?
시하가 판을 유리하게 짰다. 무슨 말이냐면 시하가 술래다. 그냥 자기가 술래하고 싶단다.
아무리 봐도 나는 숨을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닌데…….
아무튼, 시하가 숫자 셀 동안 빨리 숨을 곳을 찾았다.
“하나! 둘! 서이! 넷! 다섯!”
“아직 멀었다!”
아무리 숨을 곳이 없어도 시늉을 해야 했으니.
장롱을 벌컥 열어서 이불을 꺼내고 머리를 박았다.
몸은 안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은 어차피 꺼낼 생각이었으니 정리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희생이라는 거지.
“형아페페. 다 숨어써?”
“…….”
시하의 걸음 소리가 들린다. 방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아? 엉덩이.”
아마 페페의 엉덩이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걸렸네. 걸렸어. 무슨 숨바꼭질이 1초 만에 끝나냐.
“어디~찌~”
저기 시하씨? 방금 엉덩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보고도 못 본 척이라니. 그런 고등 기술을 어디서 배우셨나요?
탁탁탁.
뭔가 엉덩이에 리듬이 느껴진다.
시하가 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안 보여~ 어디찌?”
아니. 그럴 리가. 떡하니 페페 엉덩이가 보일 텐데.
심지어 엉덩이까지 두드렸다.
능청스럽게 모른 척하며 다른 곳에 갈 준비를 한다.
“여기 업써!”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얼굴만 박아넣은 나는 대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면서 시하가 빨리 찾아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렇게 우두커니 있으려니 심심하다.
살짝만 볼까?
옷장에서 얼굴을 빼고 방문 쪽을 보는데.
“아?”
“응?”
벽에 딱 숨어서 방을 바라보는 시하랑 눈이 마주쳤다.
저기 시하 씨? 다른 곳 가는 척하면서 여기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까?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절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차자따!”
시하가 손가락으로 형아페페를 가리킨다.
마치 정말 이제 발견했다는 것처럼. 연기 좀 하는 것 같다.
“아, 들켰네!”
“형아페페. 져써!”
“응. 형아페페가 졌네. 이제 내가 술래야!”
“아아!”
“시하가 숨어.”
“아아!”
나는 거실로 나와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서이, 넷. 아이씨! 나도 모르게 서이, 넷이라고 했다. 중독성 뭐냐고…….
“…열! 다 숨었나!”
“시하 다 숨어써!”
“그걸 말하면 안 되지…….”
전에도 느꼈지만 다 알려주는 솔직한 시하였다.
뭐 집이 그렇게 넓은 것도 아니니 금방 찾을 수 있다.
“시하가 어딨을까?”
그렇다고 긴장감을 늦추지는 않았다.
살금살금 발을 움직이며 눈으로 열심히 찾았다.
시하를 발견했다.
어질러진 이불 속에서 유독 툭 튀어나온 둥근 부분.
누가 봐도 거기에 들어가 있는 거로 보였다.
“옷장을 볼까?”
“우웁.”
시하가 숨 참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시하의 머리가 있는 부분에 왔다 갔다 했다.
발소리를 내며.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흠. 여기는 없는데? 어딨지? 어?”
나는 시하의 몸에 걸려서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으악 넘어졌다.”
“우웁.”
“아니. 이건 뭐지? 뭔가 단단한 게 있는걸?!”
이제 들켰다는 신호를 줬다. 시하야. 이제 나와.
“의자. 의자.”
이걸 속일 생각을 한다고?!
그럼 장단에 맞춰줘야지.
“어디 한번 앉아볼까?”
살며시 시하의 등에 앉는 시늉을 했다. 오랜만에 스쿼트 해보지 뭐.
“아냐. 약한 의자. 약한 의자. 부러져. 부러져.”
“뭔 의자가 말을 하냐고.”
“아?”
아차. 생각으로 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나 보다.
하지만 이런 건 자연스러운 애드리브로 해결 가능했다.
“그래서 너무 수상한걸!”
“시하 아냐. 의자야. 말해. 아아! 폰 의자야. 폰 의자.”
과학의 발전이 이상하게 되었구나. 스마트폰 의자라니. 들고 다니기도 참 불편하겠다.
여기까지만 하고 이불을 걷었다.
“시하 여기 있었네!”
“아아! 차자따!”
네가 왜 찾았다를 외쳐?
하다 보니까 굉장히 황당한 경우가 많다.
근데 그게 또 귀여워서 탈 안에서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형아페페가 이겼네?”
“아아! 무숭부! 무숭부!”
“오! 무승부도 알아? 하지만 마지막 판을 해서 누가 이기는지 가리자. 이기는 사람이 승리!”
“시하 술래!”
“어허. 가위바위보를 해야지. 그건.”
이건 술래인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여기서 져주는 것도 좋지만 이기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저번 가위바위보의 리벤지였다.
이번에는 시하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다.
“자. 형아는 이번에는 주먹을 낼 거야.”
“아아. 시하도 주먹!”
시하가 자그마한 손을 꽈악 쥔다.
후후후. 난 다 알고 있다. 시하는 ‘형아랑 같이’가 공식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먹을 내겠지!
그렇다면 나는 보자기를 낼 거다.
오늘은 내가 술래를 해야 한다. 이 인형탈을 쓰고 숨는 건 너무 힘들다. 차라리 찾는 게 낫지.
“자. 그럼 간다.”
“아아!”
“가위바위보!”
“가이가이보!”
“???”
나는 보자기. 시하는 가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
시하도 당황했는지 바보 같은 소리를 내었다.
설마 내가 심리전에서 진 거야?!
“시하야. 왜 주먹 안 냈어?”
“형아. 딴 거 내써.”
“어. 그건 당연한 소리고. 지금 딴 거 냈잖아.”
“아냐. 옛날옛날에 내써.”
“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거다.
시하는 형아랑 같은 걸 내고 싶었는데 전에 다른 것을 낸 걸 학습했다.
그렇다면 시하가 형아랑 같은 걸 내려면?
당연히 딴 걸 내야지.
그 결과가 이거다. 보자기와 가위.
어쨌든 내가 졌고 시하가 술래를 하기로 했다.
누가 이겼는지 이미 정해진 상황.
어쩔 수 없지. 필살기를 쓰는 수밖에.
“시하야. 눈 감고 숫자 세. 알았지?”
“아아!”
시하가 숫자를 셌다.
나는 재빨리 우당탕 숨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다 숨어써?”
“아니!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세줘.”
“아아!”
시하가 숫자를 다시 셌다.
“…열! 다 숨어써?”
“…….”
시하가 곧바로 도도도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더 여유롭게 모른 척을 하며 페페에게 다가간다.
이불을 덮었지만 거대한 얼굴은 숨길 수가 없다.
“차자따!”
시하가 이불 위로 폴짝 뛰어들었다.
그런데. 툭! 데구르르.
“아?”
페페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이불을 들치자 안에는 형아가 없었다.
“아? 형아?”
시하가 페페 얼굴 안으로 머리를 쏙 넣었다.
“형아. 어디써? 여기써?”
설마 거기 있겠니?
나는 문 뒤에서 숨을 참으며 시하를 지켜보았다.
뒤를 돌아보면 바로 보일 텐데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아?”
시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나를 발견했는지 폴짝 뛰어온다.
“형아. 차자따!”
“푸하하. 들켰네.”
시하가 뭔가 엄청난 걸 해냈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역시 회심에 한 수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도 시하를 당황시켜서 숨바꼭질의 재미를 더한 것이 틀림없다.
“시하야. 이제 생일 축하 노래 부를까? 둘이서.”
“왜?”
“형아랑은 안 했잖아.”
“아아!”
***
시혁과 시하가 생일 케이크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시하! 생일 축하합니다! 와아아!”
“후우!”
초가 꺼진다.
“시하야. 소원 빌었어?”
“아냐.”
“안 빌었다고?”
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소원을 이뤄진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형아랑 같이 오늘 실컷 놀아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반짝반짝.
파란색 빛무리와 분홍색 빛무리가 하나의 케이크를 그렸다.
축하한다는 듯이.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어린이집에서 생일 때마다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배웠던 게 생각났다.
“태어나 해져서. 고마어여. 전해져.”
분홍색 빛무리와 파란색 빛무리가 고개를 끄덕이듯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오늘 선생님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하는 다 배웠다.
“시하야.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전해 주라고?”
“형아. 엄마. 아빠.”
“아…….”
시혁은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가 꼭 전해줄게.”
“아?”
“우리 시하 정말 잘 배웠네. 착해.”
시하는 의문 어린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왜 형아가 전해준다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