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어쩌다 보니 친해지기는커녕 시하가 내 옆에 딱 붙어있게 되었다.
마치 주군을 지키는 기사처럼.
루나 역시도 다른 애들이랑 어색한지 시하의 반대편에서 내게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치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쌍둥이들은 시하 편이니 그쪽으로 붙은 상황.
내 몸을 기준으로 편 가르기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아니. 엄지를 세우지 마시고. 해결 좀 해주세요…….
“자. 여러분 새 친구를 소개할게요. 음. Let me introduce…?”
선생님도 이게 맞나? 싶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루나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나는 루나라고 해. 다섯 살이야.」
“이름은 루나고 다섯 살이라고 하네. 만나서 반갑대.”
뭔가 어색한 바람이 휭 하고 분다.
문이 열려 있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늘 학급에서 각자 일어나서 자기소개할 때 느끼는 뻘쭘함이다.
설마 어린이집에서 느낄지는 몰랐다.
루나도 뭔가 어색하고 부끄러운지 내 등에 쏙하고 숨는다.
시하가 이름을 중얼거린다.
“루나 누나. 루나 누나.”
루나는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관심을 가졌다.
아까부터 시하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먼저 나서줘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하는 그냥 이름을 외우며 내 옆으로 더욱 바짝 붙었다.
이거 혹시 경쟁자 이름을 외운 게 아닌가 싶은데.
선생님이 손뼉을 짝하고 쳤다.
“자! 그럼 새 친구도 왔으니 재밌는 게임을 할까요?”
아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나 역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여기를 조금 벗어나면 다들 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오붓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 타이론 부부의 시간을 방해할 수 없었다.
루나의 부분은 나에게 맡긴 거니까.
이번 계약서는 타이론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통역사로 편의를 봐주는 것도 있었다.
엔터테이먼트에서 매니저 계약 같은 거였지만 그것보다 훨씬 출퇴근이 보장되는 점에서 나쁘지는 않았다.
한 달 하는 데 250.
잡일을 하면서 그 정도면 그냥 많이 퍼준 거라고 생각된다.
경기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계약서를 작성할 때 은근히 회사로 들어오길 바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한 달이지만 코가 꿰였을지도?
보통 한 구단의 통역사가 되면 계약이 끝난다고 하더라고 다른 구단에 원서를 넣지 못한다.
물론 스카웃 제의가 온 걸 제외하고는.
이 바닥이 좁으므로 상도덕이 있다는 거다.
‘혹시 선수의 버릇이나 안 좋은 약점이 세어나갈 수 있으니까.’
사소한 버릇 역시 정보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도 치열한 정보전이 일어난다.
그냥 놀면서 친해지겠지만 처음에는 서로 탐색하는 시간이다.
“자. 그럼 어떤 게임이냐면 바로 이 보물상자를 여는 거예요.”
“보물상자?”
“여기 비밀번호가 있죠?”
“네!”
자물쇠의 숫자는 네 개.
아무래도 저기 번호를 맞춰야 하는가 보다.
“주변에 힌트를 엄청 숨겨놨어요. 그걸 바로 알게 되는 사람이 이 상자를 열 수 있습니다.”
“뭐 들었어요?”
“후후후. 비밀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큰 보물이 들어있어요.”
“모야?”
시하가 귀엽게 봐도 선생님의 입은 무거웠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 이상했다.
“찾아봐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여기에 넣었으니!”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인데? 착각이겠지?
“이걸 가진 자는 세상을 다 얻을 듯이 떵떵거리며 살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궁금증이 커졌다.
나는 루나에게 게임의 룰을 설명했다.
주위에 힌트가 있는데 그걸 찾으면 비밀번호를 알 수 있다고.
간단한 룰이어서 루나가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나는 시하에게.
“시하야. 루나 누나랑 친하게 지내줘. 알았지?”
“아?”
“혼자 놀면 재미없잖아. 맞지?”
“아아. 형아 가치. 재미써.”
응. 형아랑 같이 놀면 엄청 재밌나 보구나.
시하가 루나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덥석 잡았다.
“siha?”
“가치. 가치. 차자.”
“yes!”
통역해 주자 시하의 말이 기쁜지 눈을 반짝였다.
쌍둥이도 시하를 따라서 여기저기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게임이라면 루나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선생님의 솜씨에 감탄이 나왔다.
“아! 힌트 찾았다!”
승준이 책 사이에 끼워진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크게 ‘힌트!’라고 쓰여 있었다.
봉투를 뜯어보자 나오는 건 하나의 카드.
알파벳 [E]가 쓰여 있었다.
“호오.”
힌트는 알파벳인 걸 볼 때 선생님의 기획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무조건 루나가 필요한 게임이다.
비밀번호를 얻으려면 루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다.
“형아. 모야?”
“아니. 나 말고 루나에게 물어봐야지. 형아는 이 게임에 참가하면 반칙이야.”
나에게 물어보는 걸 선택하다니. 역시 똑똑하다.
시하가 루나를 보았다.
“루나 누나. 이거 모야?”
“E!”
“시하 이 이써. 요기.”
시하가 자신의 이를 가리킨다.
아니. 그 ‘E’가 그 ‘이’가 아니야…….
그때 똑똑한 종수가 말했다.
“그건 알파벳 E야!”
다른 아이들도 이게 힌트가 됐는지 빠르게 주변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엉덩이 쪽에서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응?”
“쉿!”
선생님이 검지를 세웠다.
뒷주머니를 확인하니 편지봉투를 몰래 끼운 거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앗! 시혀기 오빠 엉덩이에 힌트 이써!”
하나야. 엉덩이가 아니라 주머니라고 해줄래?
“와 진짜다! 시혀기 형아. 빨리 줘.”
“음. 그냥 줄 수 없겠는데?”
좀 더 게임의 재미를 위해 라스트 보스처럼 굴었다.
“나한테 팔씨름으로 이기면 이거 줄게.”
종수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와. 그걸 어떻게 이겨.”
“그럼 한 손가락만 쓸게. 그럼 됐지?”
“오?”
다른 아이들도 정말 그럼 될지도? 하는 얼굴이 되었다.
후후후. 과연 잘될지 모르겠다.
나는 검지를 척 하고 들었다.
아이들이 나의 이미지 때문에 쉽사리 도전하지는 못했다.
먼저 나선 건 승준이었다.
종수가 승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힘세니까 이겨야 해. 알았지?”
“하하하. 당연하지!”
내가 검지를 내밀자 승준이 잡는다.
확실히. 어린이집 남자애 중에 최고를 다툴 만한 힘이 느껴졌다.
“아아! 형아 하팅!”
“헐! 시하야. 나 응원해야지.”
“맞아. 야 이시하! 형아. 응원하면 어떡해!”
시하가 ‘앗’ 하는 표정을 지었다.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응원했으니 그럴 만했다.
“승준 하팅. 형아 하팅!”
“왜 둘 다 하냐고.”
누구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응원.
응. 난 그 마음 이해하지.
“그럼 시작~!”
“이익!”
“하하. 승준아. 힘을 더 많이 줘야겠는걸?”
“이이익!”
하지만 결국 나의 승리.
승준이 시무룩하게 애들에게 돌아갔다.
다들 잘했다면서 토닥여줬다. 시하도 ‘레드 형아. 세. 개차나.’라고 했다.
저게 위로인가? 의문이 들긴 했다.
나는 슬쩍 루나를 보았다.
루나가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앞으로 나왔다.
「우리 아빠 야구선수예요.」
「알지.」
「그러니 저 세요. 딸이라서.」
「그렇겠지.」
루나가 손가락을 잡으려고 할 때 시하가 말했다.
“형아. 손가락 하나.”
“응. 하나 폈잖아.”
“아냐. 새끼. 손가락. 이거.”
“어? 새끼손가락으로 하라고?”
“아아.”
천잰가? 하나만 한다고 했지 어느 손가락으로 하겠다는 말을 안 했다.
과연 이시하. 그 부분을 찌르다니. 내 동생 맞다.
어차피 져주려고 했는데 그 부분이 뭐가 대수인가 싶었다.
“자. 그럼 시작하자. 시~작!”
아이들이 하나같이 응원했다.
바로 져주면 좀 박진감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조금 열심히 버티다가 겨우 져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루나의 손에 턱 하고 올렸다.
그 모습에 종수가 말했다.
“맞아! 다 같이 붙으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어.”
나는 당황해서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중에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손을 모았다.
“아악. 아프다! 손가락 아프다! 야! 야! 승준아. 손에 있는 힌트 뺏어가려 하지 마!”
승준아. 스포츠맨십 어디 갔어? 어?!
그렇게 외치니까 레드 형아는 사기라서 스포츠맨십을 안 지켜도 된단다.
아, 그렇구나.
결국, 지기도 했고 힌트도 빼앗겨버렸다.
“이제 보자!”
승준이 봉투를 뜯어 카드를 꺼냈다.
거기에는 알파벳 [D]가 적혀 있었다. 거기다 모아야 하는 힌트가 총 6개라는 걸 알려주었다.
“지금 몇 개 모았지?”
“4개!”
“두 개만 찾으면 되겠다!”
그렇게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두 개를 찾았다.
나온 알파벳은 총 6개.
[E, D, I, N, F, R]
나는 그걸 보고 무슨 단어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루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got it!”
“알았다는 말이야.”
뭔가 영어 공부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쨌든 루나가 카드를 척척 조합하더니 하나의 단어를 만들었다.
[FRIEND]
프랜드. 친구라는 의미.
루나가 한국어로 뭐라고 하냐고 묻자 대답해 주었다.
“친구. 친구라고 해.”
“친구?”
“응.”
시하랑 아이들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친구랑 비밀번호 숫자 네 개가 뭔 상관이지?
시하가 열심히 친구를 중얼거리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왜? 시하야. 알았어?”
“시하 아라. 시하 아라. 친구친구야. 친구친구.”
“???”
“칠구칠구. 친구친구.”
“!!!”
아이들이 보물상자로 달려갔다.
시하가 7979를 맞추자 달칵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이런 말장난이라니…….
시하가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많아서 맞출 수 있었던 건가 싶기도 했다.
승준이 말했다.
“자, 이제 열어보자!”
끼익.
경첩 소리가 들리며 안에 나온 것은…….
“아?”
“시하야. 왜 아무것도 없지?”
“하나 눈이 잘못대써? 안 보여.”
“아니. 왜 없어!”
“종수야. 선생님이 깜빡한 거 아닐까?”
“아 뭐야. 괜히 오랜만에 열심히 했네.”
“푸하하. 없어! 엎어. 그냥 업고 돌아가! 푸하하.”
「상자 안에 긁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다들 의문 어린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나는 뭔가 예상이 가서 속으로 말했다.
안 돼. 그러지 마…….
“다들 열심히 해줬어요. 거기 안에 있는 보물은 ‘친구’들끼리 노력했던 경험이에요! 그래서 비밀번호도 친구친구죠. 어때요? 다들 친해졌죠? 하하하.”
아이들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
보상이 없어서 실망은 했지만 선생님의 의도대로 루나와 아이들이 아주 친해졌다.
특히 하나가 루나 옆을 차지하고 앉았는데 아무래도 어린이집에 또래 여자애가 없다 보니 더욱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루나 언니. 언니 이름 예뻐.”
“예뻐?”
“응. 아! 프리티야. 프리티야.”
“아! 예뻐. 프리티! 땡큐.”
말은 잘 안 통하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은 지 조금 돼서 그런지 어느 정도 아는 단어도 있었다.
아마 이렇게 놀다 보면 더더욱 한국어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언니 이거 하나가 자주 갖고 노는 거야. 소꿉놀이할 때 많이 써.”
하나가 찻잔을 루나 앞에 놓았다.
루나가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고 살며시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종수와 승준이 기웃거렸다.
평소에는 소꿉놀이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은 루나가 있어서 관심을 보였다.
“하나야. 오빠도 할까?”
“오빠는 오늘 집 지키는 강아지 해.”
“왜 사람이 아닌데!”
종수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나도 오늘 이걸로 놀까?”
“종수는…. 음…. 컴퓨터?”
“나는 동물조차 아니잖아?!”
루나가 풋 하고 웃었다. 컴퓨터라는 말을 알아들은 게 분명하다. 그 뒤에 종수의 반응을 보고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시하는.
“형아. 형아. 시하랑 노라.”
내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응. 그럼 오늘 뭐 하고 놀까?”
하나와 루나가 말했다.
“시혀기 오빠. 같이 소꿉놀이해!”
「같이 놀아요!」
나는 시하를 보았다.
사실 이건 일의 연장선이라 루나랑 시하랑 함께 놀 수 있는 걸 하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시하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시하야. 소꿉놀이할까?”
“형아. 시하 할래.”
“그럼 하자.”
루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배역을 정해주었다.
나는 뭐 아빠, 엄마, 동생, 친구 이렇게 정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착각이었다.
「시혁은 재벌 회장님이에요. 저는 엄마고 하나는 제 숨겨진 딸이에요. 시하는 아들이고요. 그런데 하나랑 시하가 좋아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
「한국 드라마 엄마랑 자주 봤어요!」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
이건 한국이 잘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