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1시간 30분.
정확히 그 시각이 지나자 눈을 뜨게 되었고 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뿐해졌다.
수액은 벌써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서 문도환이 고개를 숙인 체 꾸벅꾸벅 존다.
고마운 사람.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건 내게 행운이었다.
‘죽?’
옆을 보니 포장된 죽이 보였다.
살며시 손을 갖다 대니 뜨거웠다.
가져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
수액을 다 맞을 시간에 맞춰 가져온 듯했다.
부스럭.
봉지를 만지는 소리에 문도환이 눈을 떴다.
“흐아~암. 일어났어? 깨워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이렇게 됐네.”
“형. 일은 안 바빠? 여기 있어도 돼?”
“되지. 그럼. 시하 데려다주고 잠깐 들어가서 업무처리 좀 하고 다시 나왔어.”
“월급도둑이네.”
“야. 가끔 이럴 때도 있어야지. 내가 평소에 열심히 해서 이렇게 시간도 낼 수 있는 거라고.”
“고마워.”
문도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도 잘하는 것 보니까 이제 몸 괜찮나 보네. 저기 간호사에게 링거 좀 빼달라고 해야겠다.”
“응. 부탁할게.”
간호사가 다가와서 바늘을 뺀다.
자리에 털고 일어났는데 몸이 조금 가볍다.
그래도 아직 열이 있어서 오늘 하루는 푹 쉬어줘야 했다.
“집에 데려다줄게.”
“형. 병원비는?”
“내가 냈어.”
“아…. 계좌 보내줘.”
“됐어. 임마.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낼 수 있는 거잖아. 그냥 나중에 밥이나 사.”
“고기 사줄게.”
“한우 투플.”
“형. 그냥 톡으로 돈 보내면 되지?”
“야!”
서로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큭큭 웃음이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운전할 때는 느끼지 못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왜 아팠던 거야?”
“어?”
정말 생각지 못한 곳을 찔러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유롭게 밖을 쳐다봤던 게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도 그렇잖아. 내가 너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아팠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
“너 몸 관리 철저하잖아.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한데 예전에 옷 속을 보더니 네가 한 말 기억나더라?”
“뭐라고 했지?”
“아. 운동 안 한 게 티가 나네. 해야겠다. 이렇게 말하고 바로 꾸준히 했잖아. 그래서 몸매 만드는 거 신경 쓰냐고 하니까.”
“아! 기억나. 그냥 건강관리 하는 거라고 했지. 아마?”
“그래. 몸 안 좋은 건 귀신같이 직감해서 운동 다시 시작하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왜 그랬어. 이렇게 아팠던 적은 없었잖아.”
나는 별말 할 수 없었다.
최근에 너무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다. 어머니 때문에.
사실 어머니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얘기하기 힘들어?”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잊고 싶은 일이라서.”
“그래. 그러면 잊어야지. 다 끝난 거지?”
“응. 다 끝났어.”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더 자세히 물어봐 주지 않는 점에서 감사함을 느꼈다.
“아파 보니까 걱정이 되더라.”
“어떤 게? 시하?”
“응. 시하가 제일 걱정이지.”
“지금 어린이집 잘 가고 있는데 뭘.”
“그냥. 현재랑 미래가 걱정되었어. 아, 이것보다 더 크게 다치면 안 되겠구나. 돈도 못 벌고 쉬어야겠구나.”
“음.”
“가장은 함부로 아프지도 못하겠구나.”
정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의지할 곳이 몇 없는, 가족이 없는 내 몸이 너무나 중요했다.
시하를 돌봐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비록 하루, 이틀 정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고 해도 결국 나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버티셨을까? 아픈데 아팠다고 말했을까? 아니, 못했겠지. 나이도 있으신데 어디 아프단 말은 듣지 못했어.”
“으음…….”
“가장은 아프면 안 돼. 집 안에 기둥이 하나인데 그게 무너지면 생활이 정말 힘들어지겠구나 싶더라고.”
“그… 렇지.”
“내색하고 싶지 않아. 이게 자존심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시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어. 난 그래. 걱정 끼치고 싶지 않고 든든하게 잘 있다는 걸 언제나 보여주고 싶어.”
“그게 왜 자존심이야. 근데 말 안 하면 더 걱정하게 되는 게 가족이기도 해.”
“알아. 근데 시하는 너무 어리잖아.”
“그럼 나한테는 꼭 말해. 힘들면 힘들다. 아프면 아프다. 알겠지? 괜히 오늘처럼 참치 말고.”
“푸흡. 참치가 왜 나오냐고.”
문도환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말실수를 했나 보다.
“아씨. 나 오늘 좀 멋진 말을 했는데 참치가 다 망쳤네. 근데 알아들었잖아. 그럼 된 거지.”
“응. 진짜 고마워.”
“하여튼. 딴 사람은 모르겠는데 넌 좀 아파도 돼. 울어도 되고. 그렇다고 악담하는 건 아니야. 그냥 좀 참지 말라는 말이야. 알지?”
“참치 말리라고?”
“하지 말라고!”
문도환이 운전하면서 정말 억울한 얼굴을 한다.
그 말실수가 통한의 실수였다는 낭패감도 보인다.
“푸흡. 알았어. 아, 형 덕분에 웃는다. 나 최근에 이렇게 웃은 적 있었나?”
“내가 어떻게 알아. 오랜만에 연락하니 쓰러져서 얼굴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 그거는 진짜 아프지만 않았어도 폭소 감이었는데.”
“나 진짜 들었을 때 식겁했다고. 막 드라마에서 있지? 그 뭐냐. 심근경색 와서 픽 하고 쓰러져서 사물에 부딪혀 머리에 피 철철 나는 거.”
“드라마 너무 봤네.”
“그러니까. 와. 진짜 오면서 확인했는데 문이 안 잠겨있는 거야.”
올 때쯤에 잠금장치를 풀고 있었지.
“그때부터 와, 이건 의학물이 아니라 스릴러물 되었다고. 이야, 문 따고 시혁이 머리를 누가 후려쳤나?”
“완전 영화 한 편 찍었구나?”
“식은땀이 나더라니까. 119가 아니라 112에 신고해야 하나? 그런 상념이 막 드는데. 근데 또 문을 막상 열어보니 개꿀잼 몰카. 이렇게 된 줄 알았다고.”
태연히 앉아서 인사하는 게 어이가 없을 만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진짜 아프긴 했다.
“마스크 쓰고 콜록대는 거 보고 많이 아프구나 싶었지. 다행히 스릴러가 아니라 의학물이었어.”
“정말 다행이다.”
은근히 문도환의 실황중계를 듣는 게 재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일이니까 더 재밌는 거 같다.
물론 그 당시는 정말 놀랐겠지만.
지금은 지나갔으니 이렇게 썰을 풀 수 있는 거겠지.
“도착했다.”
“죽 다 식었겠네.”
“전자레인지 돌리면 다시 따끈따끈해져. 포장해 가는 사람들은 집에 와서 다시 돌릴걸?”
“그래? 아, 형 것도 있어?”
“아니.”
“그럼 형도 먹고 가. 이거 보니까 양은 2인분인데.”
“됐어.”
“나 혼자 먹기 싫은데.”
“아 놔. 그렇게 말하면 먹고 가야 하잖아!”
역시 좋은 형이다.
***
죽을 먹고 나서 약을 먹었다.
오늘 시하를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문도환이 픽업까지 다 해 주기로 했다.
감기 걸린 채 어린이집 방문하기도 좀 그렇기도 하니까.
혹시 몰라서 마스크를 끼고 집에 있는데 좀 답답하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시하에게 감기를 옮기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다.
띵-동-
벨소리에 벌컥 문을 열었다.
“형아!”
시하가 찰싹 내 다리에 붙는다.
나는 살며시 무릎을 굽혀 안아 주었다.
오늘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했는데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형아. 갠차나?”
“응.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형. 형도 들어와.”
뒤에 있는 문도환이 손을 저었다.
“아니야. 난 이만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응. 잘 가. 시하도 인사해야지.”
“바이바이.”
그렇게 손을 흔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시하가 가방을 바닥에 놓고 무언가를 꺼냈다.
“형아. 이거!”
“이게 뭐야?”
“대추차 만들어써! 형아 빨리 나아~”
“와. 이거 시하가 만든 거야?”
시하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
“샘이랑 승준, 하나, 종수. 또 재히. 윤동, 은우.”
“다 같이 만든 거야?”
“가치해써. 시하 대추 치카치카 해져써.”
“오! 그래?”
“아아.”
시하가 자랑스러운지 배를 쭈욱 내밀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간지러~”
많이 간지러운지 뒤로 물러난다.
난 또 그 모습이 귀여워서 미소가 지어졌다.
손에 있는 이 대추차가 참으로 따뜻하다.
이렇게 신경 써주는 데가 어디 있을까.
내일이라도 한 명씩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다.
“그럼 어디 한번 먹어볼까? 시하는 먹어봤어?”
“시하 머거써. 마시써.”
“그래? 그럼 형아랑 또 같이 먹을래? 아! 밥부터 먹고.”
“시하 죽 머글래.”
“으응?”
시하가 죽을 가리킨다.
오늘 문도환이 근처에서 한 번 더 사 왔다.
이번에는 다른 맛으로.
“죽 먹어도 괜찮겠어?”
“죽 마시써.”
“아, 전에 먹어봤지. 그래. 그럼 죽 먹고 대추차 먹자. 형아도 약을 먹긴 해야 하거든.”
“형아 약 머거?”
“응…. 3일치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서이 일?”
“서이 일이 아니라 삼 일.”
“아아. 서이 밤.”
“서이 밤이면 4일째가 될 거 같은데….”
아니. 세 밤 자면 다 먹은 거니 꼭 틀린 표현도 아닌가?
갑자기 헷갈리네.
“흠흠. 일단 죽 먹자.”
“아야 하면 죽 머거. 시하 죽 머거.”
“시하는 안 아프니까 이거 먹지 말까?”
내 말에 시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시하 배고파. 배 아야 해. 죽 머거.”
“푸핫. 배고픈 게 배 아야 하는 거야?”
“아아.”
배 아플 때 가끔 이게 아픈 건지 고픈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시하가 그런 식으로 말한 건 아니겠지만 괜히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알았어. 데워서 먹자.”
“아아.”
우리는 죽을 데워 먹었다.
사실 나는 죽보다 고기를 구워 먹고 싶었다.
“자, 후후 불어서 먹어야 해.”
시하가 후후 불어서 잘도 먹었다.
계란후라이도 해서 그 위에 올려 주었다.
계란은 언제나 옳지.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대추차를 마셔보았다.
“형아. 후후 해.”
“하하. 알았어.”
“대추차 뜨거.”
“그래. 조심할게.”
나는 대추차를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몸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구석구석 따뜻하게 해 주는 느낌.
시하가 만들어줘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저 느낌일 뿐인지 모르겠다.
“이야. 몸이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
“정말?”
“응. 진짜. 고마워. 시하야.”
시하도 대추차를 후후 불었다.
“시하야. 잠깐만.”
“왜?”
“아니. 너무 뜨거워 보여서.”
냉동실에서 얼음을 두 개 꺼내서 위에 띄웠다.
이러면 너무 뜨겁게 먹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 해써?”
“응. 마셔봐.”
후릅.
정말 맛있게 마셨다.
“아아!”
“응? 왜 그래? 너무 맛있어서 그래?”
“아냐.”
시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방으로 쏙 들어갔다.
펭귄 가방을 들고 다시 와서 제자리 앉았다.
뭐가 더 있나?
그런 호기심이 들어 지켜봤는데 시하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형아 이거! 선물!”
“응?”
“대추차. 사랑 너어.”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하가 주는 것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USB.
뭔지 모르겠지만 심히 기대되었다.
“이거 뭔지 알아?”
“시하 아라.”
“그래. 시하는 다 알지 참.”
괜히 궁금증을 안고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안에는 하나의 영상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걸 틀었다. 음악이 흘러나온다.
윤동이 춤을 추며.
[빨리 나으세요!]
은우가 랩을 하며.
[쉬익. 머리에서 열나. 쉬익. 만들어써 열라. 쉬익. 약 좀 챙기자. 우리의 형아를 위해.
우리는 얼라. 이브. 형도 그랬으면 해.
케어 해! 케어 해. 빨리 나았으면 해! 로운! 건 빨리 날아가. 쉬익!]
하나가 노래를 부르며.
[빨리 나으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오빠 나으세요. 우리가 있어요.]
승준은 공으로 골인을 시키고.
종수와 재휘는 춤과 노래를 한다.
나는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마 시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겠지.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그래도 눈웃음만은 드러나 있어서 기뻐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온다.’
마지막은 이시하.
갑자기 등 뒤에서 스케치북이 나온다.
노래도 서정적인 피아노 소리로 바뀐다.
따다다 다다단. 따다다다 다다단.
스케치북이 넘어간다.
그려진 그림은 빨간 차.
웃음이 크게 터졌다.
[우리 형아는요. 차도 잘 몰아요.]
갑자기 자막 뭐냐고…….
내가 봤을 때는 저 해석은 틀렸다.
형아랑 빨간 차 타고 어린이집 가고 싶다는 거겠지.
다음 장.
남자 캐릭터가 어떤 파란 괴물을 때리고 있다.
[우리 형아는요. 싸움도 잘해요.]
저거 감기 때려잡는 거 아닐까요?
근데 피아노 소리랑 자막이 합쳐지니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시하의 표정도 진지해서 그게 더 웃겼다.
다음 장.
나와 시하가 손을 잡고 있다.
[우리 형아는요. 저 많이 좋아해요. 물론 저도요.]
마지막 장.
하트가 그려져 있다. 그 안에 ㅇㅅㅎ가 쓰여 있었다.
[ㅇㅅㅎ 형제는 사랑이지.]
그냥 ‘사랑해요.’라고 자막으로 써도 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영상이 너무 재밌게 편집되어 있어서 좋았다.
“시하야. 정말 재밌네.”
“아아. 형아 빨리 나아. 해써.”
“아, 이게 빨리 나으라는 뜻이야?”
“아아.”
“정말 고마워.”
정말…. 모두 너무…….
오늘은 고마움이 가득한 날이어서 감기 역시도 그 온기에 몸을 피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