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샛노란 은행잎이 럭비공 모양으로 가득 붙여져 있다.
그것만 보여서 아이들이 저게 뭐지? 하는 얼굴이 되었다.
시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치복움밥.”
“???”
살며시 호선의 끝부분을 잡고 그대로 접었다.
중심축을 향해 한 번 접은 것이다.
안에 드러난 것은 원을 그리고 있는 붉은 단풍.
하지만 볶음밥의 형태를 나타내려고 했는지 그 형체는 알아볼 수 없게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테이프 대신 풀로 붙여서 김치볶음밥을 나타내었다.
나뭇잎을 보면 검은색도 있고 주황색도 있어서 다채로운 붉은 계통이 섞여 있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와! 저 노란색은 오믈렛이구나? 그걸 반으로 잘라서 펼치는 거지?”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한 게 아니라 오믈렛이 김치볶음밥 위에 펼쳐지는 걸 표현했다.
아이들이 정말 잘 만들었다며 손뼉을 짝짝짝 쳤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이었다.
승준이 벌떡 일어나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진짜 김치볶음밥이다! 시하야. 엄청 맛있어 보여!”
“엄마가 오믈렛을 저렇게 잘라서 펼치눈데! 똑가타!”
단순하지만 어딘가 남다른 표현력.
오믈렛이 접히는 부분을 테이프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하의 창의성이 빛났다.
종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이것저것 떠드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자! 그럼 특별 간식을 받을 사람을 발표하겠어요!”
어느새 선생님의 손에는 큐 카드가 들려있었다.
“어디 보자. 이번 승부는 문자 투표랑 현장 반응 점수를 합산했어요.”
그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준이 하나에게 문자 투표 해써? 라고 묻자 아니? 엄마가 했나? 라고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문자 투표를 안 한 상황.
선생님은 뻔뻔하게 헛기침을 하며 아이들의 주목을 이끌었다.
“숨은 심사위원 점수도 들어갑니다. 자, 발표합니다. 특별 간식을 받을 사람은 바로~”
“바로~”
“축하합니다. 이시하!”
“아?”
“앞으로 나와주세요. 소감 한마디 듣겠습니다.”
선생님이 장난감 마이크를 시하의 입에 갖다 댔다.
시하가 뭘 말하지 싶어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만들어써. 형아 줄 거야.”
“오오오. 이 그림은 시혁이 형아에게 준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원장쌤! 특별 간식 주세요.”
원장이 빙긋 웃으며 바가지를 머리에 이고 들어왔다.
아무도 못 보도록.
아이들을 스윽 눈으로 훑은 다음 바가지를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
시하가 손을 살짝 가져가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모야? 뜨거.”
“그거 군고구마라고 해. 그런데 시하야. 손이 안 닿았는데?”
“시하 알아. 뜨거.”
“아하. 안 만져봐도 아는구나. 천잰데?”
“아아. 시하 형아 대써.”
“형아 되어서 다 아는구나. 그렇구나.”
선생님은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오늘따라 시하의 말을 잘 알아들으니까 말이다.
“고구마 마나. 마나.”
“응. 엄청 많네.”
“이거 시하 다 머거?”
“응. 시하가 다 먹어야 해요.”
“아아.”
시하가 아이들을 보았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이거 시하 다 못 머거. 가치. 가치 머거.”
아이들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꽃이 피웠다.
선생님과 원장은 시하의 말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컵과 주스를 가지고 왔다.
사실 이렇게 많이 준 이유가 다 같이 먹기 위해서였다.
누가 되었든 이 정도 양이면 나눠줄 수밖에 없다.
“자. 너무 뜨거우니까 바로 만지면 안 돼요. 선생님이 좀 식혀 줄게요.”
장갑을 끼고 고구마를 두 개로 쪼갠다.
손으로 슥슥 돌려 까며 신문지에 말아서 아이들 손에 쥐여 준다.
“엄청 뜨거우니까 후후 많이 불어야 해.”
아이들이 빨리 먹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구마를 식혔다.
후후. 후후.
단체로 후후 바람을 부는 시간.
10초밖에 안 됐지만 빨리 먹고 싶은 승준은 입을 앙 하고 베어 물었다.
“앗 뜨거!”
“선생님이 뜨겁다고 말했잖아. 핫 뜨거뜨거 핫 뜨거뜨거 핫. 자, 잊지 말고 다 같이 부르자. 이거 유명한 노래거든. 다들 들어 봤죠?”
갑작스러운 노래 선정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노래가 대체 뭐야? 그런 표정이다.
선생님이 시무룩했다.
원장만이 어깨를 토닥인다.
“나 때는 콘서트 가고 그래서 잘 알아요.”
“아, 저는 아니에요. 사실 잘 몰라요.”
“유다희 선생님! 빨리 고구마 벗겨요!”
“넵!”
서로에게 괜한 상처만 남았다.
시하는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오로지 고구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구마를 향해 손으로 콕콕 허공을 찔러 보았다.
“뜨거!”
“시하야. 닿지도 않았어.”
“아냐. 뜨거.”
“이제 먹어도 될 거 같은데?”
“샘. 뜨거. 뜨거 하니 찬 거 머거. 우유 머거. 우유.”
시하가 우유를 후루룩 마셨다.
선생님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래. 뜨거우면 차가운 우유 마시는 거 맞지. 그런데 시하는 아직 먹지 않았잖니?
“마시써.”
“우유가?”
“아아.”
시하는 정직하게 고구마가 맛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제야 식어서 입에 앙 하고 고구마를 물었다.
부드러운 식감에 달콤한 맛이 입안을 감쌌다.
살짝 목이 막히면 우유를 마셨다.
“마시써!”
아이들도 시하와 같이 열심히 고구마를 먹었다.
특별한 간식 타임에 다들 만족했다.
***
강의는 결국 결석하고 말았다.
잡생각이 많아져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살며시 털어버리고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진도가 쭉쭉 나갔다.
그러다 시하를 데리러 가야 할 때쯤이 돼서야 오늘 있었던 일이 자꾸만 불쑥 올라왔다.
“하아.”
이대로 가도 될까?
폰 화면으로 얼굴을 보았다.
울었던 흔적은 없는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지, 평소와 같은지.
그렇게 한참을 점검하고 나서야 어린이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하가 보고 싶다.
오늘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가는 걸 망설이기도 했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나서야 결국 퇴근 시간에 이리 도착해서 널 데리러 간다.
문을 열었다.
“시하야. 형아 왔어.”
신발장 앞에서 부르니 방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다.
“형아!”
“응.”
시하가 나오려다가 그대로 유턴을 해서 다시 들어간다.
아무래도 가방을 들고 나오려는 모양.
하지만 정작 시하의 손에 있는 건 가방이 아니라 스케치북이었다.
도도도 달려와 다리에 찰싹 붙었다.
“형아. 시하 그림.”
“그림 그렸어?”
“아냐. 만들어써. 요리해써.”
“오! 요리했다고?”
아무래도 스케치북에 요리를 만들었나 보다.
내가 이런 건 귀신같이 알아듣지.
“형아. 이거!”
시하가 스케치북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노란 은행잎이 보인다.
이게 뭔가 싶어서 자세히 봤는데 접힌 부분이 보여서 들춰보았다.
잘게 잘린 단풍잎.
그제야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김치볶음밥이네? 위에는 오믈렛이고?”
“형아 아라써?”
“당연히 시하가 했는데 알았지. 이야. 우리 시하 정말 잘 만들었는데?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시하가 이케이케 해써.”
“그래?”
“형아. 머거. 이거 머거. 시하가 만드러써.”
“어디 시하가 만든 음식 한번 먹어볼까?”
나는 후르릅 소리를 내며 손으로 훔쳐 먹었다.
시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형아. 마시써?”
“응.”
“형아. 기운 나?”
“…으응. 기운 나네. 고마워.”
알고 물어본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말이 오늘따라 너무 와 닿았다.
시하가 손을 든다.
쭈그려 앉은 나를 향해서 뻗더니 볼을 쓰담쓰담한다.
“형아. 개차나?”
“어?”
“개차나?”
“왜?”
“어디 아파?”
“아니.”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뺨을 비볐다.
작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밖에 해가 지고 있고 쌀쌀한 날씨가 뺨을 차갑게 해놓았기만 해서 그럴까?
이 작은 손이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된다.
그거면 됐다. 그 마음을 담아 시하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
“아?”
“시하 보니까 엄청 괜찮아졌어.”
미소가 지어진다.
아까와 다르게 꾸밈없는 진짜 미소가.
괜히 망설였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정말 기분이 나아지는데 뭐가 무섭다고 가까이 가지 못했나.
이렇게 숨겨봤자 다 들키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시하랑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풀리는데 말이다.
“시하 잘해써?”
“푸흡. 진짜 잘했어. 이렇게 형아를 위해 밥도 해주고 말이야.”
“시하 또 해주께.”
“큭큭. 그래. 또 해주라.”
더 이상 미혹은 없다.
내가 지키는 이 일상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소중한 보물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고 하더라도 흔들리는 게 사람일진대.
꿋꿋이 버티면 지나간다고 나무가 말하고 있는데.
나뭇잎이 떨어지며 발가벗겨진다고 하더라도 오롯이 뿌리를 박고 있으면 된다.
나는 정했었다.
그 뿌리는 오로지 시하였다.
무너지지만 말자. 이 손의 온기가 전해준다.
잡혀있는 이 작은 손이 언젠가 나보다 더 클 때까지 잘… 아주 잘… 버티라고…. 지지 말라고.
“시하야. 집에 갈까?”
“아아!”
시하가 신발을 신으려고 했다.
나는 신발을 벗었다.
“아?”
“페페 가방 가지러 안 가?”
“아아! 페페!”
내 손을 잡고 펭귄 가방을 향해 달려갔다.
***
다음 날.
나는 눈이 쉽사리 떠지지 않았다.
몸이 무겁다.
시하가 올라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오늘따라 중력이 좀 더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이다.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어제 큰일을 치른 반동일까? 아니면 밖에서 잠깐 망설임의 시간을 보내서일까?
사람이 약해진 틈을 타서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했나 보다.
“으으.”
겨우 눈을 뜨는데 몸이 좀 아프다.
몸살이 난 것 같다.
생각보다 훨씬 튼튼한 몸인데 이런 경험도 꽤 오랜만이다.
시하는… 자고 있다.
시간을 보니 아직 새벽 5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약을 꺼냈다.
빈속에 먹기 그래서 물에다 밥을 말아 후루룩 먹었다.
“후우.”
몸이 어질어질하다.
어제 결심했는데 곧바로 이런 꼴이라서 우습기도 하다.
서랍에 있는 약통에 마스크를 하나 꺼냈다.
괜히 시하랑 같이 자다가 옮길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이불.’
같은 공간에 잘 수 없었다.
방 안을 보니 시하가 내 이불은 등 뒤로 깔고 있고 자기 이불은 덮고 있다.
대체 우리 둘은 어떻게 자면 이런 광경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괜히 빼 오면 깨어날 수 있으니 베개만 들고 와서 새 이불을 하나 꺼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아직 병원도 안 열었을 거다.
응급실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거실에서 돌돌 이불을 만 채 눈을 붙였다.
“콜록.”
몸이 뜨거워서인지 바닥이 따뜻해서인지 젖은 머리가 찝찝하게 했다.
그래도 움직이기가 힘들어서 그대로 무시하고 잠을 청했다.
시야가 암전된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는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고, 땀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흥건했다.
“형아.”
시하의 목소리에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거의 실눈 수준으로 들어 올렸을 뿐이다.
“으으. 시하야. 가까이 오지 마.”
“형아. 개차나?”
“형아. 감기야. 딴 곳 가 있어. 형아. 금방 일어날게…….”
“형아. 안 개차나야. 안 개차나.”
“아니야. 좀만 있으면 괜찮아져.”
몸이라도 일어나려고 움직이려고 움찔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시하가 그거 보고 놀랐는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걱정 마. 좀 정신 차리면 일어날 거야.
겨우 깨어난 잠과 감기몸살에 몸을 좀 못 가누는 것뿐이지 정신만 차리면 병원 갈 정도는 될 것이다.
그때였다.
폰에 전화가 울렸다.
시하가 도도도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어제 강의도 안 들어갔다며. 오늘도 안 오고. 교수님이 말해 주시던데? 무슨 큰일 있는 거 아니지? 여보세요?」
문도환이었다.
시하가 말했다.
“문도….”
「어?! 시하야. 형은?」
시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형아. 쓰러져써…. 얼굴 가쳐써…….”
「뭐?! 쓰러졌다고? 얼굴 다쳤다고?! 거기 어디야?!」
“집이야…. 문도 빨리.”
「금방 갈게!」
뚝. 전화가 끊겼다.
저기. 시하야.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아…….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정도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