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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화 (214/500)

214화

어머니가 문을 열고 떠나가는 게 보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아닐 거야.’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재혼하신 게 아니다.

배 속의 아이를 가진 새어머니와 살림을 꾸렸던 이유.

굳이 묻지 않았다.

사정이 있겠지 싶어서 말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잖아. 이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한 상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굳이 새어머니의 가슴을 후벼팔 필요가 없었다.

그 당시에 아버지의 선택이니 존중했다.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고 했어. 다 괜찮아지면.’

하지만 말을 듣기 전에 사고를 당했다.

이제 그 진실을 알려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모르겠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하호호 웃으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것처럼 행동한다.

그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그 한마디에 이해가 되었다. 짜증이 났다. 어째서 이걸 친어머니에게 들어야 했는지.

그리고 괜한 말에 단단했던 나의 아버지 등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짜증 나. 아니, 화가 나.’

의심이라는 씨앗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화마가 되어 온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애써 지웠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에게 희생하라고 강요할 리 없지 않은가.

새어머니는…. 그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래. 때로는 모르는 게 좋아.’

굳이 알 필요 없는 사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였고 누군가 알려줄 사람도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이 시하를 괴롭게 만드는가였다.

커서도 알리지 말자. 모르고 잘 살 수 있는데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 필요가 없다.

열지 않아도 희망은 넘쳐나지 않나.

그 안에 지독한 진실이라는 사정이 있을 거라는 짐작이 든다. 역사에서도 없어진 사실과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그 흔적과 영향이 있을지언정 그 사실을 모르고 살 수도 있는 거다.

‘그래. 그러면 돼. 잘한 거야.’

어머니와 시하가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다.

비록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정말 그래도. 이 이야기를 나 혼자 들어서 다행이다.

혹여나 좀 더 컸을 때 어머니가 찾아왔다면 그 참담하고 헛소리 같은 이야기에 흔들렸을 시하를 생각하니 이가 뿌득 갈렸다.

차라리 지금 만나서 단호히 말했던 게 너무나 잘한 일이다.

“어?”

뚝. 뚝.

볼을 타고 뜨거운 물이 흘러나왔다.

“아씨. 뭐야?”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다 끝났는데, 이제 아무렇지 않은데, 상처받을 거 하나도 없는데, 어머니가 뭐라고 하든 이제 필요 없고 어른이 되어서 혼자 잘 살 수 있는데.

대체 어째서…. 왜…….

“뭐냐고. 이거.”

눈에서 자꾸 뭐가 나오는 것일까.

지금 내 머리는 이 상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슬프지도 않은데 왜 이러는 걸까.

어쩌면 안심해서 그런 거였는지. 잠시 흔들려서 그런 거였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냥 내 맘을 알 수 없어서 핸들에 얼굴을 묻고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다.”

시하도.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모두 보고 싶다. 근데 누구 하나에게도 갈 수가 없었다.

이런 험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이제는 만날 수 없어서.

그래서 나 홀로 강의도 들어가지 못하고 가슴을 달래야 했다.

이런 게 어른이라면 차라리 늦게 되고 싶었다.

좀 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얼굴이 못생겨지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

당신은 대체 어떻게 혼자서 저를 키울 생각을 하셨습니까.

누구 하나 기댈 곳 없이 대체 무엇을 지지대로 삼으며 견뎌내셨습니까.

‘시하야…….’

아, 그래. 나를 보며 견뎌내셨구나.

아버지는 강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건 단 하나다.

형아는 언제나 강해야 한다. 더욱 단단해야 한다.

그래도 너무 힘들 때 조금만 네게 기대도 될까? 시하야?

작고 여린 몸이지만 내게는 큰 위안이 된다.

나는 그렇게 시하를 생각하며 조금씩 몸을 진정시켰다.

***

-어린이집.

시하는 오는 길에 형아 몰래 예쁜 낙엽을 주었다.

주머니에 쏙쏙 들어가서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쌍둥이들을 보자마자 자랑부터 했다.

“주어써. 예뻐.”

주머니에서 후드득 낙엽들이 나온다.

노랑 은행잎부터 시작해서 붉은 단풍잎까지.

쌍둥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시하야. 이거 주워온 거야?”

“우와! 예뿌다. 나도 주우려고 했는데 엄마가 말렸는데. 시혀기 오빠는 된다고 해써?”

“아아.”

시혁은 그런 적 없고 그저 시하가 주워왔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형아라서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이거 이케이케 부쳐.”

시하가 선생님의 스케치북을 들고 와서는 흰 바탕에 낙엽을 놓았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빙그레 웃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으니까.

“여러분. 이제 가을이 끝나가고 있어요. 요즘 참 늦게 오긴 하는데 그래도 아직 낙엽이 있네요. 그쵸?”

“네!”

“그러면 우리 낙엽을 주우러 갈까요? 사실 엄~청~! 일찍 일어나시는 아저씨들이 낙엽을 치우고 가거든요.”

아이들이 몰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게 눈에 띄지 않게 고생하시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저희는 그 모습을 잘 못 봐요. 자고 있거든요. 대신 우리도 조금 도운다는 마음으로 예쁜 낙엽을 주워요.”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낙엽 가지고 재미난 걸 만들어요.”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탕탕 쳤다.

“낙엽만으로 잘 만든 사람에게는…….”

“???”

“특별 간식을 주겠어요!”

승준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간식 뭐예요?”

“그건 비밀이에요.”

“하나는 초콜릿 먹고 시퍼!”

“하나야. 초콜릿보다 더 맛있는 거야!”

“!!!”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과연 초콜릿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뭘까?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럼 밖에 나갈까요? 춥다고 움츠러들어 있으면 안 돼요.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지만. 자, 다들 옷 입고 낙엽을 주워 봐요.”

다들 쪼르르 달려가 외투를 입었다.

시하는 펭귄 가방도 어깨에 메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시하야. 가방은 놓고 가자.”

“왜?”

“으음? 바로 앞에 나갈 건데 굳이 가방을 멜 필요가 있니?”

“요기. 요기. 낙엽 담아. 낙엽.”

“아하. 그래?”

“아아. 마니 담아.”

“괜찮아요. 여기 작은 봉투에 담을 거니까.”

“아?”

시하가 시무룩해졌다.

페페 가방을 꼭 가져가고 싶었으니까.

선생님이 하는 수 없이 들고 가자고 했다.

시하가 그러니까 쌍둥이들도 가방을 멨다.

못 말리는 애들과 함께 밖을 나섰다.

굴러다니는 낙엽이 많았다.

이미 한차례 청소차가 지나갔지만 구석구석 쓸어 담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잔디에 떨어진 건 청소해 주지 않는다.

“자. 그럼 다들 시작!”

쌍둥이와 시하가 모였다.

승준이 말했다.

“시하야. 우리 엄청난 거 가지고 오자. 사커공만 한 낙엽을 줍는 거야.”

“아?”

시하가 그렇게 있냐는 듯이 승준을 쳐다보았다.

“큰 거 이써?”

“당연히 있지. 난 전에 엄청나게 큰 나뭇잎 봤거든.”

“시하는 레드 낙엽 주어. 레드 낙엽.”

“그럼 시하는 레드 줍자.”

하나는 예쁜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은행잎 주울 거야. 하나에게 좋은 생각이써.”

“오! 역시 내 동생!”

“하나 아직 말 다 안 했눈데?”

“다 안 해도 알아.”

“어또케?”

“쌍둥이잖아.”

“하나는 모르눈데?”

“그건 요즘 사커를 안 해서 그래.”

선생님이 황당하다는 듯 승준을 보았다.

말 안 해도 아는 거랑 사커의 상관관계가 대체 뭐니?

그렇게 세 사람이 회의 아닌 회의를 나누고 있는데 종수가 끼어들었다.

“야. 우승은 내 꺼다. 이시하. 이번에는 그림이 아니라 낙엽이니까 안 질 거야.”

“아?”

“아? 가 아니지! 제대로 열심히 해. 승준이 너도 괜히 큰 거 찾다가 나한테 지지 말고.”

“너한테는 안 지거든요~”

승준이 혀를 내밀며 놀리자 종수가 인상을 팍 썼다.

언제봐도 얄미운 친구였다.

종수가 재휘를 보았다.

“재휘야. 우리 이겨주자고.”

“아니, 난 별로 안 하고 싶은데?”

“뭐라고?”

“아, 아니야.”

“은우하고 윤동도 열심히 해.”

윤동은 관심 없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봉지를 손목에 걸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은우의 팔을 쿡 하고 쳤다.

“응? 아! 어, 열심히 해야지. 하하하! 특별 간식은 나의 랩을 위해 쓰여 주겠으!”

대체 간식을 랩에 어떻게 쓴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낙엽 줍기가 시작되었다.

각자 열심히 봉지에 예쁜 낙엽을 담았다.

선생님도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참여했다.

멋지게 만드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시하야. 정말 레드만 줍네?”

“아아. 레드 조아.”

“근데 아까 주머니에는 노랑색도 있고 초록색도 있던데? 주황색도 있었던 것 같고.”

“아까 주어써. 지굼. 지굼 레드야.”

“아, 아까는 주워서 지금은 레드만 줍는다고?”

“아냐. 지굼 레드. 다음 노랑.”

“아. 지금은 레드만 줍고 나중에는 노랑색 주울 거라고?”

“아아.”

그렇구나. 우리 시하는 언제나 다 계획이 있구나. 한 번에 다 담는 게 아니라 순서가 있구나. 선생님이 몰랐네.

시간이 흘러 모두 빵빵하게 주웠을 때 다시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 다들 종이를 줄 테니까 낙엽을 붙여 볼까요?”

“네!”

원장이 미리 깐 비닐 바닥에 아이들이 후드득 낙엽을 부었다.

선생님이 미리 떼준 스카치테이프를 쥐고 각자 열심히 무언가 만들기 시작했다.

상당히 조용할 것 같지만 언제나 그 과정도 시끌시끌하다.

“야! 왜 내 껄 가져가!”

“하하하! 이건 이제 내 꺼다.”

종수와 승준이 술래잡기하듯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 와중에 낙엽이 흩날리며 아이들의 원성을 샀다.

하나가 말했다.

“오빠 바보야! 가만히 좀 이써! 엄마한테 다 말할 거야!”

“내가 뭘 했다고!”

“오빠가 하나 낙엽 다 찼잖아! 하나가 열심히 모운 건데. 차는 건 공만 차야지. 엄마가 딴 거 차면 안 된다고 해써.”

“아니…. 음. 미안. 내가 다시 모아줄게.”

또 오빠라고 하나 앞에서 열심히 모아준다.

“시하도.”

시하도 도와서 열심히 하나의 낙엽을 찾아주었다.

종수는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며 미안해했다.

정신없는 과정이었지만 어느새 아이들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먼저 재휘.

“나는 예쁜 신발을 만들었어. 이걸 신으면 나뭇잎이 붙어서 손으로 안 주워도 돼. 패션도 좋을 것 같아.”

선생님이 오오 하면서 박수를 치고 아이들도 좋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재휘가 뿌듯해하며 어깨를 폈다.

다음은 승준.

“나는…….”

종수가 말에 끼어들었다.

“또 사커공이지?! 다 알아!”

“아니거든!”

승준이 스케치북을 돌렸다.

평범한 나뭇잎이 여러 개 붙여져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손 모양이었다.

“이건 엄청 큰 나뭇잎이야. 아하하! 못 찾아서 만들었어.”

“어머. 승준아. 없으니까 만들어버렸다니. 정말 좋은 생각이야.”

승준이 칭찬에 코끝을 높였다.

설마 칭찬받을 줄 몰랐던 종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저게…. 칭찬받을 작품이라고?!

이런 생각이었다.

다음은 하나.

“하나눈 은행잎으로 은행을 만들어써. 여기에서 일하면 은행잎 통장을 줘.”

은행잎으로 만든 정사각형에 문 달랑 하나.

거기는 바로 돈을 거래하는 은행이었다.

종수는 그걸 보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다음은 윤동.

시크하게 나와서 한 손으로 스케치북을 돌렸다.

주워온 나뭇잎들이 전부 빼곡히 붙여져 있었다.

“길.”

설명 끝.

종수가 씨익 웃었다.

“어머! 정말 잘했어요. 완전 낙엽에 가득 찬 길이네!”

종수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칭찬한다고?! 윤동이 귀찮아서 그냥 다 붙인 걸 봐서 그런지 믿기지 않았다.

선생님으로서는 그저 모두를 칭찬하는 거지만 종수는 그걸 몰랐다.

다음은 은우.

“나는 나뭇잎을 일자로 세웠어. 그리고 하나에만 은행잎을 붙였어.”

“무슨 의미이니?”

“은행잎은 황금 목걸이야. 하하! 래퍼 우승이야!”

그대에게 주어지는 황금 목걸이.

한 명만 받을 수 있는 걸 표현했다.

다들 하나씩 관심사를 그려냈다. 그래서 선생님이 또 폭풍 칭찬 발사.

드디어 다음은 종수.

“나는 사자를 만들었어!”

단풍잎으로 만든 붉은 갈기가 원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냥 평범한 나뭇잎 두 개는 눈. 은행잎 하나는 거꾸로 붙여져 잎으로 되었다.

그럴듯해서 아이들이 열심히 손뼉을 쳤다.

종수의 콧대와 어깨가 으쓱 올라와 있었다.

이거라면 특별 간식을 얻을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은 이시하.

“시하. 레드 만들어써.”

휘리릭.

스케치북을 돌리자 나온 것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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