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18년 전. 이시혁 5살.
이장혁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게 많은 부를 안겨주지는 않았다.
그저 희망을 잃지 않고 저 위로 올라가는 걸 지침 삼아 살았다.
시혁이가 있기에 더더욱 이 악물고 버텼다.
물에 젖지 않은 꽃은 없다.
새벽이슬에 흠뻑 젖어 떨더라도 해가 뜨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여기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따뜻한 온기가 대지를 채울 거니까.
「장혁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나인하츠 기업의 회장 아들 다니엘.
그가 눈을 빛내며 묻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그날 말이군요. 저도 기억합니다. 싱가포르가 아닌 곳에서 교통사고가 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네. 119에게 언어가 제대로 안 통해서 위험한 상황이었죠.」
사고 현장에서 외국인들을 만날 때 언어가 통하지 않아 위험한 순간이 있다.
물론 의사들이 신도 아닌데 바로바로 알맞은 진단을 내리지는 못한다.
어느 곳이 아픈지 확인해야 하고 말을 할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결국 CT를 찍어봐야 아는 경우도 생긴다.
다니엘이 말했다.
「뭐 저도 저지만 조수석에 앉은 그 친구가 다친 게 워낙 심했죠.」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기억이겠지만 지금 와서는 묘한 인연을 느낍니다.」
「하하. 그때는 저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셨으니까요. 저는 그 사고가 오히려 복이 된 거 같습니다. 사람 인생은 참 모르죠. 어찌 되었든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공무원들이 워낙 깐깐해서.」
「그건 걱정 마세요. 차가운 바람보다 태양이 사람의 옷을 먼저 벗긴 것처럼 제가 한번 그래 보겠습니다.」
다니엘이 빙긋 웃으며 믿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둘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깐깐한 공무원들은 과연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것저것 부딪쳤는데 그 상황을 잘 조율하며 해결해 나갔다.
자그마한 음료와 과자. 거기에 하루를 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좋은 글귀.
뇌물이 아닌 정성을 나눠주었고 그게 먹혔는지 공무원들의 마음은 봄날처럼 사르르 풀렸다.
서로 인종이 달라 성향의 차이가 나더라도 같은 사람이기에, 인간이기에, 분명히 공감할 수 있다.
이장혁은 그렇게 믿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장혁 씨는 정말 탐이 납니다. 여기 오기 전에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하셨죠?」
「그랬죠.」
「시작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 마음이 강해졌습니다. 어떻습니까. 싱가포르에서 함께하는 건. 여기도 사람 사는 나라인데 적응하면 괜찮습니다. 아이도 아직 5살이라면서요. 너무 자리를 잡기 전에 오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굉장히 좋게 봐주시네요.」
「그만큼 잡고 싶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계약서도 준비했습니다.」
싱가포르는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다.
인재로 나라를 성장시킬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니까.
그래서 몸값이 꽤 많이 측정될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하고 상의해 보고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당연하죠. 아니면 이렇게 장기 출장으로 오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건 조금 그렇겠죠?」
「네…….」
계약서를 품에 챙기고 차에서 내렸다.
다니엘과 인사를 나누고 호텔로 들어왔다.
잠시 씻은 후에 침대에 누워 지갑을 꺼내서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내와 시혁이 있는 사진.
오늘 일이 끝났으니 내일 비행기로 돌아가면 드디어 만날 수 있다.
아들과 아내의 온기가 그립다.
언제나 넓은 침대에 누우면 외로움에 사무칠 때도 있다.
‘보고 싶다.’
그렇게 눈을 감으려고 할 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아는 지인이 정말 고뇌에 찌든 목소리로.
“장혁아. 음.”
“왜 그러세요?”
“후우. 네 아내가 바람난 것 같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그냥 너희 가정 파탄 내려고 이렇게 말을 꺼낸 거 같니?”
“그건. 아니에요. 아닐 겁니다. 나중에 이 말 책임지셔야 할 거예요.”
“그래. 어차피 사실이든 아니든 각오하고 꺼낸 말이었어.”
이장혁은 무언가 허탈한 듯한 그의 음성에 가슴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조금 남았는데. 정말 정말 조금 남았는데. 이제야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침대 맡에 놓아둔 계약서를 손으로 구기면서 꽉 붙잡았다.
***
이장혁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아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확인을 했다.
분명 아닐 거다. 그냥 친구로서 만나는 거겠지. 집에 아들도 있는 아줌마가 누굴 만난단 말인가.
하지만 그 기대는 상상 이상으로 부서져 버렸다.
어떤 친구를 만나길래 저렇게 포옹을 하고 팔짱을 끼나.
아니, 외국에 저런 경우도 많지 않은가.
아내도 통역사였으니 열린 마인드로 상황을 바라보자. 흥분하지 말자. 마음이 따끔하게 아파 왔지만 외면했다. 부정했다.
“여보.”
아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의 경악 어린 표정이 확인사살을 했다.
그저 태연히 왔어? 했다면 역시 오해였구나 싶었겠지만.
“…잠깐 이야기 좀 해.”
아내가 뒤를 따랐다.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없어서 차를 타고 조금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눈치를 보는 모습에서 이를 악물었다.
끼익.
차가 멈춘다. 심장 역시 멈출 것 같다.
침묵이 길어지고 겨우 입을 뗐다.
“…왜 그랬어? 꼭 그래야만 했어?”
“내가 뭘?”
“정말 몰라서 물어?”
“오빠야말로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서 그래?”
“하아. 예하야.”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신예하는 잘됐다는 얼굴로 이장혁을 쏘아보았다.
“솔직히 나 너무 답답해서 그랬어. 이 집구석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당신은 집에 없지. 아버님은 빚은 많지. 대체 왜 도박에 손대고 술을 마시는데. 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데.”
“예하야.”
“그래! 나 잘못한 거 맞아. 근데 난 이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내가 쌓은 경력은 끊긴 거 같고 집에서 애를 보고 있고 어디 숨 쉴 구멍 하나 없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이장혁은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숨통을 매일 막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거 때문에 몇 번을 한탄했는지.
하지만 이제 진짜 한 발자국 남았다. 한 발자국만 견디면 진짜 다 해결되는데. 그래야 하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살며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킨다.
“그래. 내가 출장이 너무 잦았지. 너 외롭게 하고 못 해준 거 인정해. 근데…. 근데 넌 그러면 안 되잖아. 너… 시혁이 엄마잖아. 대체 왜! 대체 왜! 애한테 상처 될 일하는 거냐고.”
“…….”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얼마나 내가 버티면서 더 잘되길 꿈꿨는데. 나도 남들처럼 평범한 걱정거리 생기면서 투덕거리길 바랐는데. 딱 더도 말고 그것만 꿈꿨는데.”
“하아….”
“네가 지금 한 일이 어떤 건지 알아? 힘들어서 링거를 맞고 있는데 그걸 뽑은 거야. 알기나 해!”
“…알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장혁 역시도.
핸들을 꽉 쥔 손이 노랗게 물든다.
살며시 손에서 힘을 빼며 다시 붉은 기운이 감돌 때.
“우리 이혼하자.”
“그래.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이혼을 했다.
***
신예하는 어린이집에서 시혁을 데리고 왔다.
집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와! 맛있겠다! 이거 다 먹으면 배 터지겠다.”
“내일 또 먹으면 되지.”
“응.”
“밥 먹고 있어. 알았지?”
“응!”
시혁이 숟가락으로 열심히 밥을 퍼먹는다.
신예하는 그런 아들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했다.
이미 데려오기 전에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치고 난 후였다.
두 개의 캐리어는 이미 차 트렁크에 넣어두었다.
남은 것은 소소한 물품인 이 가방뿐.
“잘 먹었습니다!”
시혁이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가 넣는다.
반찬 뚜껑도 꼼꼼하게 닫은 뒤 자랑스러운 얼굴로 신예하를 바라본다.
“엄마. 다 했어. 나 잘했지?”
“그래. 잘했네.”
“엄마. 근데 그 가방은 뭐야?”
“응. 이거?”
“응! 어디 가?”
“음…. 저기 시혁아.”
신예하가 시혁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왜? 엄마 또 힘들어? 내가 재미난 이야기 해 줄까? 오늘 선생님이 외국에 있는 동화책을 읽어줬어. 한국에 없는 이야기라고….”
“저기 시혁아.”
“응.”
“엄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지?”
“응!”
“엄마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쉴 수 있는 곳에 갈 거야.”
“어디?”
순진한 시혁의 눈이 신예하를 바라보았다.
“먼 곳에 갈 거야. 외국으로.”
“나도 가면 안 돼?”
“아니. 안 돼. 시혁이는 이해해줄 수 있지? 엄마 떠나는 거 이해해줄 수 있지?”
“어? 아빠처럼 외국 가는 거야?”
“응…….”
“그럼 아빠는?”
“아빠는 이제 한국에 있을 거야.”
시혁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손을 꼼지락거렸다.
고민하다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럼 나는 친구들이랑 잘 지낼게.”
“그래. 고마워. 시혁아.”
신예하는 가방을 메고 신발장에 섰다.
시혁이가 놀란 듯이 말했다.
“엄마. 지금 가?”
“응. 지금 가. 시혁이 여기서 잠깐만 장난감 갖고 놀고 있으면 아빠 금방 오실 거야. 알았지?”
“으응.”
문이 닫혔다.
시혁은 그런 현관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가지 마. 엄마…. 가지 마…. 나 두고 흐윽. 가지 마. 흐아앙.”
집에 남은 아이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엄마를 만나기 쉽지 않을 거 같다고.
이미 수많은 행동과 지친 얼굴로 인해 떠나게 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
그날의 기점으로 시혁은 변했다.
아버지가 오셔서 꼬옥 안아주어도 울지 않았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정된 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이…….’
더러웠다.
쓰레기장처럼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엄마가 하는 걸 조금씩 도와서 알고 있었다.
청소가 안 된 흔적.
대충 청소기 돌려서 보이는 먼지들.
걸레질도 안 해서 깨끗하게 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해.’
시혁은 청소를 시작했다.
이불도 개고 걸레질도 했다.
아버지가 못하는 게 있으면 그것도 맡아서 했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하고, 의자를 가져와 설거지도 했다.
아버지는 한사코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냥 시혁은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에.
“시혁아. 왜 집에서 자꾸 뭘 하고 있어. 아빠가 한다니까.”
“아니야. 아빠 일해. 아까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 다음 주까지 번역 보내야 한다며? 빨리 해야 나랑 놀지.”
“시혁이 아빠랑 놀고 싶구나? 그럼 아빠가 얼른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응. 아빠 할 거 해.”
“이상하네.”
“응? 뭐가?”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하하.”
“헤헤.”
시혁은 쓰레기를 꾸욱꾸욱 눌러서 알뜰하게 묶었다.
그리고 손을 씻은 뒤에 방에 들어가서 이부자리를 폈다. 베개도 놓고, 이불도 깔고.
두 사람이 함께 잘 공간을 만들고 나서야 책을 펴서 읽었다.
글은 어릴 때 금방 깨쳤다.
하지만 아빠가 가진 어려운 책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렵네. 끄응.”
시혁은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힐끗 보았다.
그런 뒤 다시 책을 읽었다.
나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아빠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생일이 되었다.
6살이 되어 아빠에게 선물을 받던 와중에 택배가 왔다.
발송자는 신예하. 엄마였다.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빠가 화를 내서 시혁은 울어버렸다.
조금 진정된 며칠 뒤에 시혁이 물었다.
“아빠.”
“응?”
“아빠는 나 안 버릴 거야? 멀리 안 떠날 거야?”
이장혁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다.
시혁을 안으며 미안하다고 절대 안 버린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 뒤로 선물이 오면 이장혁이 먼저 쓰레기통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