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그러니까 이번 주에 무슨 날이 있나?
뭔가 준비해야 하는 게 있느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독서의 계절이라서 책을 빌리려 가는 날인 건가?
다음 주에는 빼빼로데이가 있긴 한데 알리사가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되물어봤다.
“대체 무슨 날이길래 이렇게 난리 치는 거예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이때 쓰는 표현 맞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미리 준비해 뒀어요. 지금 얼마나 파랑몰이 바쁜 시기인데.」
“아. 파랑몰 이야기였어요?”
「아니요! 시하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파랑몰이 바쁜 거랑 시하랑 무슨 상관일까?
또 모델로 서야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이거야말로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아니, 사실 이미 확신하고 있다.
시하는 귀엽다. 이 절대적인 명제 앞에서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어디선가 문도환이 ‘전제부터 틀려먹었어!’ 하고 외치는 환청이 들린다.
훠이. 훠이. 날아가라.
그런 헛생각을 하고 있는데 알리사가 정답을 말해준다.
「바로 할로윈데이잖아요. 바보!」
“아! 할로윈데이! 사탕이랑 과자를 준비해야겠네요.”
내 머릿속에 이미 시하가 좋아할 과자 리스트가 쭉 뽑혀 나왔다.
어린이집 아이들에게도 줘야 하니까 정말 여러 개 사 들고 가야지.
이번에 많이 벌어서 이 정도 돈은 써도 된다.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할로윈데이니까.
「어휴. 지금 과자 준비할 때예요? 전쟁이라고요. 전쟁.」
“갑자기 웬 전쟁이요?”
「몰라요? 어린이집에 갈 때 아이들이 할로윈 복장을 하고 간다고요. 근데 시하만 아무것도 안 입고 가봐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되지 않겠냐고요.」
“그냥 소외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게 낫지 않나?”
「그게 중요해요?」
내가 봤을 때는 무척 중요해 보인다.
그건 그렇고 알리사가 정말 새로운 사실을 알려왔다.
설마 등원할 때 그런 옷을 입고 가는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건 이번 주가 아니라 바로 내일이라는 점을 볼 때 이미 옷을 구매하기도 늦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알리사가 말하지 않았나. 파랑몰이 한창 바쁜 시기라고.
아동복 판매를 하고 있는 곳에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거다.
이미 옷이 구비되어 있겠지.
아마도 전화한 이유는 시하에게 옷을 주기 위해서였을 거다.
이미 시하의 치수도 다 알고 있으니까.
나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알리사.”
「피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아직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요. 옷 준비했다는 거죠?”
「맞아요. 맞아. 유비무환!」
“이제 사자성어도 공부해요?”
「당연하죠. 아무튼, 옷은 준비가 되었으니까 잠시 나올래요? 전 쇼핑백만 주고 가려고요.」
“뭐예요? 집 앞이에요?”
「네.」
나는 놀라서 문을 열었다.
쌀쌀한 날씨가 몸을 살짝 떨게 했다.
밖으로 나가자 저 앞에 알리사가 폰을 들고 여기로 오는 중이었다.
“제가 가면 되는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수고스럽게.”
“지나가는 길에 한번 들리는 거죠. 안녕. 시하야.”
알리사가 손을 흔든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시하가 있었다.
언제 뒤를 따라왔을까?
“아아! 리사 하이!”
“시하야. 추우니까 들어가자. 지금 외투도 안 입고 나오면 추워.”
“아냐. 개차나. 개차나.”
“그래도 안 돼요. 알리사도 잠시만 들어왔다가 가요.”
“그럴까요?”
우리 셋은 집에 들어왔다.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탔다.
우유도 함께 넣어서 카페라떼를 만들었다.
가정용 카페라떼라는 거지.
가끔 이렇게 마시면 맛있다.
“리사. 카페라떼로 타왔어요.”
“와. 고마워요. 근데 이제 시혁 씨도 리사라고 부르네요?”
“아…. 시하가 가끔 그렇게 말해서 입에 붙었나 봐요.”
“하하. 좋네요.”
시하가 아이스티를 자랑했다.
“리사. 이거 마시써. 피치망고야.”
“어머. 그래? 정말 맛있겠다.”
“머거 바.”
내가 놓은 커피 옆자리에 떡하니 놓았다.
이건 분명 대접하는 걸 따라 하는 거겠지.
그런데 시하야. 그거 네가 먹던 거잖아. 차라리 새 걸로 타야지. 심지어 한 모금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 딱 맛볼 만큼.
물론 나야 시하가 먹던 걸 먹을 수 있다.
가족이니까.
“시하야. 그거 먹던 거라서 새로 타서 줘야지.”
“아? 형아 시하 꺼 머거써. 시하 주면 머거써.”
“그건 그런데. 가족끼리만 먹던 거 먹을 수 있어. 손님에게는 새 걸 꺼내줘야지.”
“왜?”
“음. 아! 칫솔 쓰던 거 다른 사람이 쓸 수 없잖아. 그런 느낌이야.”
“아아.”
이제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찬장으로 도도도 달려가 피치망고를 꺼내려고 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알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시하가 먹던 걸 쪼옥 빨았다.
스르르르릅.
바람 빨리는 소리도 함께 났다.
“앗! 알리사. 왜 먹어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아니…. 속담 응용하지 말고…. 틀린 말은 아닌데. 그게 이 상황에서 쓰는 말은 아니지.”
시하가 그런 알리사를 보더니 곁으로 도도도 달려간다.
“리사. 마시써?”
“응. 맛있네.”
“시하가 머거써. 그거. 개차나?”
“응. 괜찮아. 이 정도야. 뭐.”
“리사.”
“왜? 시하야. 혹시 감동했어?!”
“그거 콩 아냐.”
“아니. 그거 속담인데…….”
아니. 대화의 흐름 뭐냐고.
듣고 있으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시하가 아직 속담을 몰라서 그렇지 알게 되면 굉장히 자주 써먹을지도 몰랐다.
알리사처럼 말이다.
“아! 시혁 씨. 제가 갖고 온 옷이 이거예요. 이번에 파랑몰에서 여러 개 파는데 이건 특별 제작이에요.”
“네? 파는 옷이 아니에요?”
“당연하죠. 시하에게 줄 건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부담스러운데?”
“왜 부담을 가져요? 내 직원 챙기겠다는 건데. 그것도 많이 도와준 사람을.”
“저 아직도 직원입니까? 계약 안 끝났어요?”
“아직 끝나려면 멀었는데요?”
“아, 그래요? 그걸 몰랐네.”
여러 개 발을 걸치고 있는 프리랜서 만세!
분신술을 쓸 수 있다면 돈을 왕창 벌지 싶다.
나는 쇼핑백에 있는 옷을 꺼내봤다.
“시하야. 내일 할로윈데이래. 그래서 알리사가 옷을 가져왔대. 짜잔.”
옷을 펼치자 나온 할로윈 복장.
시하는 그걸 보며 눈을 반짝였다.
“이거 모야?”
“아. 이거는…….”
***
할로윈데이.
일종의 축제인데 미국에서 어린이들이 괴물이나 귀신 분장을 하며 사탕이나 과자를 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챙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요즘 20, 30대의 엄마들이 아이들을 위해 복장을 준비하기도 한다.
재휘 엄마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패션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재휘 엄마가 고심 끝에 옷을 고른다.
“재휘야. 어린이집에 가서 멋진 옷을 자랑하는 거야.”
“응!”
“재휘는 어떤 분장을 하고 싶니?”
“나는 늑대!”
“늑대?!”
“응. 여기 주먹에 발톱이 촤악 하고 나와.”
“오오. 그거 괜찮네. 우리 젠틀한 재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재휘 엄마는 재빨리 소품과 옷들을 찾아보았다.
이렇게 미리 주문해 둬야 한다.
엄마로서 해 주는 건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다른 애들에게 지지 않았으면 한다.
은근 겁이 많은 아이다.
그걸 엄마로서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외적으로 많이 꾸미며 자랑스럽게 조금씩 변했으면 좋겠다.
내적으로 바뀌어야 외적으로 바뀐다고들 하는데 재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외견이 바뀌면 내면도 자연히 변하게 된다.
물론 내면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말도 틀리지 않는다.
다만 외면 역시 변할 때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오며 변해가는 걸 경험해 봤기에.
그래서 재휘에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쳐준다.
옷을 같이 보거나 신경 써서 입히게 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우리 재휘는 패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말을 정말 잘하지.’
그것만 해도 크나큰 발전이었다.
여느 아이처럼 뽐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으니까.
“재휘야. 어린이집에 가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자! 패션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거야. 당당하게 어깨 펴고 걸어야 해. 알았지?”
“응!”
“왜냐면 그게 이 옷을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야. 재휘가 자랑스러워하면 옷 만든 사람이 뿌듯하겠지?”
“응! 응! 나도 옷 만들면 그걸 사주는 사람이 기분 좋게 입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바로 그거야. 우리 재휘 똑똑하네.”
그러니 다른 애들에게 기죽지 말고 당당해지렴.
너는 언제나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
***
-할로윈데이 당일. 어린이집.
아이들이 속속히 도착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엄마들이 준비했는지 라인업들이 화려하다.
먼저 도착한 것은 쌍둥이들.
하나는 마녀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빗자루를 가지고 있다.
“선생님. 안녕하세여!”
“어머. 하나야. 오늘은 마녀네?”
“트릭 오어 트릿!”
“하하하. 자, 여기 딸기맛 사탕이야.”
“아싸!”
선생님은 승준을 보았다.
정수리에 뿔 하나가 달려있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다.
옷은 호랑이 무늬가 새겨졌다.
“승준이는 도깨비네?”
“하하하! 도깨비 팬티는 더러워요! 냄새나요!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었어요.”
“응. 역시 그 노래를 아는구나. 누가 가르쳐줬니?”
“아빠가요.”
“그럴 줄 알았어.”
뒤에서 승준 엄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늘 애들이랑 친해지려고 이상한 노래를 알려주는 오상환 교수였다.
승준이 선생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과자 안 주면 나랑 도깨비방망이로 야구 할 거야! 메이저 가는 거야!”
“오! 그럼 돈 많이 벌어서 좋은 거 아니야? 연봉이…….”
선생님은 뒷말을 하려다가 짜게 식은 원장의 눈을 보았다.
크흠. 헛기침을 하며 승준에게 사탕을 주었다.
“어린이집에서 일해야 해서 메이저리그로 데려가면 곤란한걸.”
“아싸! 성공이다!”
뭔가 억지로 갈취당하는 기분인 건 착각이겠지?
그리고 그 뒤로 재휘가 들어왔다.
머리에 고양이 귀인 머리띠를 하고 주먹에는 칼날이 달려 있다.
바지에는 꼬리도 달려 있다.
“어머! 재휘야 귀여운 고양이구나.”
“…늑대인데요.”
재휘가 급시무룩해졌다.
무섭게 발톱을 휘둘러 보지만 고양이가 냥냥 하면서 손을 흔드는 것 같다.
“…인 줄 알았는데 엄청 무서운 손톱이 있네! 늑대 맞네!”
“네!”
과장된 선생님의 몸짓.
재휘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좀 더 열심히 발톱을 할퀴었다.
선생님의 귓가에는 이런 소리가 들렸다.
냥냥. 늑대인 척하는 고양이다옹.
“정말 귀… 멋있네!”
“기멋?”
“기깔나게 멋있다고.”
위기를 겨우 넘겼다.
다음은 종수가 나왔다.
하나와 같이 마녀 모자를 썼고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안에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책을 들었다.
“종수는 마법사네?”
“네. 공부도 하려고 책을 들고 왔어요.”
“어머. 오망성이 그려져 있네. 마법서구나!”
“아닌데요.”
“???”
종수가 책을 펼쳤다.
표지만 오망성일 뿐이고 안에는 영어로 된 동화가 있었다.
“영어책이구나?”
“네! 세상에 마법서가 어딨어요. 하하.”
“놀랍게도 있단다.”
“에이! 거짓말!”
“과연 그럴까?”
선생님이 싱긋 웃었다.
언젠가 마법 수업을 한 번 해야겠다.
종수는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정말로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백에 생각이 꺾인 순간이었다.
“이제 세 명도 기대되네.”
그다음 온 것은 윤동과 은우.
윤동은 뭔가 아이돌 연습생처럼 추리닝 복장이었는데 앞뒤에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와. 해골이네. 해골 좋아해?”
“아니요. 이 옷이 춤추기 좋아서요. 엄마가 오늘은 꼭 이걸 입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윤동이 입으로 툴툴거렸다.
“아. 그렇구나.”
“여기 지퍼를 얼굴까지 잠그면 해골 머리가 나와요.”
“정말? 신기하다.”
“아씨. 또 보여줘야 하네.”
윤동이 얼굴까지 지퍼를 잠갔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기 윤동아. 나는 보여 달란 말 안 했어…. 솔직히 말해봐. 사실은 이 옷이 좋은 거지?
어느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너무 신기하다. 자, 여기 사탕.”
윤동에게 사탕을 주자 은우가 튀어나왔다.
“Trick or Treat. Trick or Treat. 내 입안에 가자. 과자. 내 혀끝에 사탕! 발림!”
신나게 열심히 랩을 하며 자신의 입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은근히 랩을 잘하는 모습에 손에 쥔 사탕을 주었다.
“앗! 이거 잘 안 먹는 건데?!”
“딴 거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요. 하하핳!”
“그, 그래?”
벌써 6명이 왔다.
마지막 남은 것은 단 한 명.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시혁과 시하.
선생님은 풉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