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500)

202화

-시혁이의 육아일기.

-이시혁 8살.

우리 시혁이는 참으로 야무지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하는데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티비 앞에 아들과 나란히 앉아서 요거트를 먹고 난 뒤에 귀찮아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래. 굳이 분리수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일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안 돌아보는 타입. 다른 자잘한 것을 신경 쓰기보다는 그저 내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아들은 귀신같이 쓰레기통을 들추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빠! 이거 플라스틱이잖아. 여기 이렇게 싱크대에 슥슥 씻어서 플라스틱 통에 넣어야지.”

“아니. 그냥 한 번에 다 버리면 편하고 좋잖아.”

“어휴. 아빠. 여기 종량제 봉투 다 돈이야. 돈. 이거 조금 아끼면 얼마나 좋아. 그리고 여기 봐봐. 재활용 쓰레기는 구분해 주는 게 좋다고. 다 우리 환경을 위해서야.”

나도 알고 있지만 굳이 그렇게 안 살았다.

하지만 조목조목 맞는 말이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렇게 일대일 강의가 시작.

스푼 같은 작은 플라스틱은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도 된다고 언질을 주셨다.

종이도 박스를 탁탁 치며 여기다 버리라고 하신다.

앞으로 분리수거 잘하겠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다.

“근데 아빠가 일 열심히 해서 종량제 봉투 더 많이 사 오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시간상으로 이득일 거 같은데?”

“어휴. 아빠. 내가 다시 말해줘?”

“아니. 안 해도 돼. 우리 시혁이 참 똑똑하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몰라도 우리 집안의 권력은 아들에게 집중돼 있다.

이게 다 아비로서 부덕한 까닭이다.

그래. 좋은 일이니까 이런 거라도 함께 하자.

하지만 시혁의 강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양치를 하고 있을 때 물을 틀어놓고 입을 헹궜다.

뒤에서 귀신같이 나타나선.

“아빠! 옆에 컵이 있는데 왜 물을 그렇게 흘려.”

“아빠는 이게 편한데.”

“다 물 낭비야. 물 낭비. 우리 물세 많이 나온다고.”

“그게 그렇게 많이 안 나와.”

“아껴야 저축도 하지.”

옳은 말인데 이때 나는 조금 유치하게 대응했다.

“아들아. 앞으로 월세 내거라. 아빠 저축 좀 하게. 어차피 내가 내는 돈인데 마음대로 좀 쓰자.”

“아빠. 이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야?”

“어? 아니. 그렇진 않지.”

“맞지?”

나는 여기서 한 번 말렸다.

누굴 닮아 이렇게 말을 잘할까?

아니, 대체 어디서 이런 말들을 배운 거야?

이웃집 아줌마들이랑 분리수거할 때 신나게 떠들던데 어쩌면 물들었을 수도 있다.

그 아줌마들이 우리 시혁이를 귀여워하는 건 알겠는데 이상한 거 가르치고 있는 거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지만 시혁아. 아빠는 이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너무 스트레스야. 알지? 만병의 근원. 아빠는 일 외에는 자극을 받고 싶지 않아.”

“아빠. 딱 한 달만 해 보자. 그럼 습관 들여져서 딱히 세세하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

“하지만 아빠가 스트레스로 한 달 안에 병을 얻으면?”

“휴우. 아빠. 사람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아빠 건강검진 한 거 내가 봤어.”

“잠깐! 그건 언제 본 거야?!”

“아빠 책상 닦으면서 봤는데? 왜?”

저렇게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가져와서 한판 졌다.

말로는 나도 지지 않는데 시혁이에게는 안 되었다.

사실 이길 수 있었는데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져주게 되어 있으니까. 아니. 진짜. 정말로.

쓰면서 나는 누구에게 변명하는 걸까?

아무튼, 우리 야무진 아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방향성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성장하는 건 맞겠지.

***

집 화장실에 원통형 바가지가 준비되어 있다.

사실 쓰레기통에 뚜껑만 없는 거지만.

아무튼, 따뜻한 물이 바로 나오지 않기에 여기에 물을 받는다.

이러면 나중에 이 물로 화장실 청소할 때나 변기 뒤편에 물을 추가로 부을 때도 쓰인다.

뭔가 알뜰하게 쓰이는 것 같지만 그저 낭비를 줄여보려고 괜한 힘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

“형아.”

“응?”

그렇게 샤워를 하려고 물을 틀고 있는데 화장실 입구에서 시하가 병을 들고 서 있다.

그래. 마법의 물약이 담겨있던 그 병.

“왜? 조금만 더 하면 따뜻한 물 나오니까 옷 벗고 기다려.”

“형아. 시하도. 시하도 물 아껴.”

“으응?”

“여기.”

시하가 빈 병을 쭈욱 내민다.

내가 물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따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하야. 저기에 받으면 너무 작지 않을까?”

“아냐. 할 수 이써.”

“할 수야 있겠지.”

누가 시하의 고집을 꺾으리.

원하는 대로 물을 받아주기로 하자.

그런데 이미 따뜻한 물이 나왔는걸?

눈치채기 전에 찬물로 살짝 돌렸다.

“옷 벗고 와.”

시하가 옷을 휙휙 벗고 들어왔다.

나는 병에 물을 가득 받아주었다.

“이제 됐지?”

“형아. 이거 어디에 가?”

“아. 어디에 두냐고? 시하 놓고 싶은 곳에 두자. 자, 줘봐. 일단 여기에 두고 씻자.”

나는 병을 세면대 위에 놓고 시하를 씻겼다.

좋아하는 거품도 많이 내서 몸에 치덕치덕 발라주었다.

물론 환경을 보호할 마음이 있다면 이러면 안 되지만 지구도 용서해줄 거다.

“시하야. 이렇게 거품으로 원을 잘 만들면 비눗방울을 만들 수 있어.”

“아? 비누 방울 달아써? 예뻐써?”

“아니. 비누가 방울을 단 게 아니고.”

역시 말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는 게 더 빠르겠다.

나는 손가락을 둥그렇게 만 후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둥근 비눗방울이 나오려다가 터졌다.

사실 씻으면서 만들기 쉽지 않다.

여기가 한계라는 거지.

하지만 시하는 뭔가 투명한 막이 튀어나오는 게 신기한지 눈을 크게 떴다.

“형아! 또! 또! 또!”

“알았어. 잘 봐. 후우~”

뽁.

비눗방울이 되려다 사라진다.

시하도 해 보고 싶은지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었다.

엄지와 검지를 붙여서 바람을 부는데.

“후우.”

“큭큭. 원으로 만든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자, 여기 딱 붙여서 슥슥 비벼서 원을 만들면.”

투명한 막이 생긴다.

“자. 후 불어봐.”

“아아. 후우~”

막이 파들파들 떨더니 그대로 터져버린다.

시하가 이게 왜 안 되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음에 제대로 한번 해줘야겠네.

아마도 참 좋아할 거 같다.

“자. 이제 끝. 다음에 제대로 가르쳐줄게. 헹구자.”

“아냐. 할 수 이써.”

“할 수는 있는데 이대로 계속 있으면 감기 걸려요. 물 튼다.”

솨아아아.

힘차게 물줄기가 나오며 시하를 씻겼다.

거품이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며 종국에는 없어진다.

뭉쳐 있는 머리카락을 시하가 보며.

“형아. 머리. 머리.”

“응. 머리카락 엄청 많지? 나중에 청소할 때 다 치워야 해.”

“시하 꺼 이써?”

“응. 당연히 시하 꺼도 있지.”

시하가 신기한지 계속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시하의 머리 위로 물을 뿌렸다.

어푸. 어푸.

손으로 얼굴을 씻는다.

“형아 다 해써. 시하 다 해써.”

“큭큭. 아직 안 씻긴 거 같은데?”

“아냐. 다 해써.”

“그래?”

나는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시하의 몸을 닦았다.

샤워 종료.

옷을 갈아입고 시하가 빈 병을 손에 쥐고 돌아다녔다.

어디에 둘지 고민하는 것 같다.

그냥 아무 데나 두어도 되는데 저렇게 고민할 일일까?

“형아. 이거 모해써?”

“아. 어디다 쓰냐고?”

“아아.”

“시하가 쓰고 싶은 곳에 쓰면 되는데? 우리 같이 생각해 볼까?”

“아아.”

“그럼 여기서 생각해 보자.”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내가 가리킨 곳에 앉았다.

나는 재빨리 드라이기를 가져와 시하의 머리를 말렸다.

이럴 때가 기회지.

상남자 이시하는 머리를 자연산으로 말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윙윙.

드라이기 소리를 들으며 시하가 생각에 잠겼다.

“형아 바가지. 모해써?”

“형아는 청소할 때 쓰지요.”

“시하도. 청소.”

“시하도 청소할 때 쓸래?”

“아아.”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물걸레질을 한 번 해야 하는데.

시하랑 함께 청소 놀이를 하면서 금방 치우면 될 것 같다.

“그럼 이 물은 이제 시하가 청소하는 데 쓰자. 형아가 깨끗한 손수건 줄 테니까 그걸로 장난감 닦아.”

“시하 장난감?”

“응.”

“페페?”

“그래. 페페도 닦고. 인형에게는 안 돼.”

“왜?”

“인형은 물 마셔도 살찌는 체질이거든. 뚱뚱해지면 무겁지?”

“아냐. 안 무거.”

“하하. 아무튼, 인형은 살찌는 거 안 좋아해서 나중에 따로 세탁하자. 알았지?”

“아아.”

그렇게 설득을 하고 나니 시하의 머리가 다 말라서 뽀송뽀송해졌다.

이제 제대로 청소해 볼까?

내가 손수건을 손에 쥐여 줬다.

“진짜 조금만 적셔야 해. 알았지? 물 조금만 주라는 소리야.”

“아아.”

시하가 병을 들고 따르려고 하자 나는 헉, 하며 숨을 삼켰다.

그럴 줄 알고 이미 마른걸레를 준비했다.

저거면 굳이 물을 안 묻혀도 되겠지.

느릿느릿.

찰랑거리는 물이 따르려고 할 때.

“아아!”

시하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접힌 손수건을 좀 더 접더니 그대로 들고 병 안으로 콕콕 찍었다.

“우와. 우리 시하 똑똑하네!”

“아아. 형아 가타?”

“응. 응. 완전 형아 같아.”

시하가 그런 손수건을 들고 장난감 상자로 직행했다.

그런데 시하야. 지금 손수건 너무 흥건한데 좀 쥐어짜야 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 상남자 이시하는 그런 거 모르고 그저 장난감을 열심히 닦았다.

먼저 잡은 건 전에 샀던 검.

멋들어지게 뽑더니 그대로 손수건으로 칼날을 닦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무릎까지 꿇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누구 하나 죽이러 가는 장면처럼 연출됐다.

왜 있지 않은가.

사극에서 칼을 닦으며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싸우러 가는 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사진을 찍었다.

“형아!”

“응. 브이 해. 브이. 몰래 안 찍을게.”

사진은 귀신같이 눈치챈다.

브이를 한 번 하고 다시 검을 닦는다.

젤리 장난감, 페페 가방, 페페 캐리어 등등.

수많은 손을 거쳐 갔다.

나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 바닥에 걸레질했다.

오늘 두 형제가 열심히 청소하는 날인가 보다.

끝난 후.

시하는 한 가지 문제점을 찾을 수 있었다.

“형아. 마니 남아.”

“응. 당연히 많이 남겠지.”

“이거 모해써?”

“좀 아껴뒀다가 생각나면 쓸까? 꼭 오늘 쓸 필요는 없잖아.”

“아아.”

시하가 알았다는 듯이 병을 들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며 놓을 곳을 찾다가 구석 모서리 쪽에 두었다.

“형아. 여기.”

“응. 거기 놓으면 되겠네. 혹시 건드려서 쏟으면 안 된다. 알았지?”

“아아.”

우리는 청소 놀이를 마무리했다.

오늘따라 피곤한 하루였기에 시하는 금세 꿈나라로 향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시하야.

***

다음 날, 아침.

시하는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물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쳐다보았다.

“아?”

곧 어떤 사실을 안 뒤에 자고 있는 형아에게 달려들었다.

이불 안을 수풀 헤치듯 나아가며 형아의 배 위에 안착했다.

“형아. 형아.”

“으음.”

시혁이 입맛을 다시며 다리를 살짝 움직였다.

이불 안 속이라 시하의 말소리가 시혁을 깨우기에는 부족했다.

시하는 다시 형을 불렀다.

“형아. 형아. 일나. 일나.”

하지만 일어나지 않자 형아의 얼굴 쪽으로 쏘옥 빠져나왔다.

두 눈을 굳게 닫고 잠을 자고 있는 형의 얼굴을 엎드려서 보다가 손을 뻗었다.

톡.

볼과 손이 닿는다. 살며시 어루만지다가 찰싹찰싹 두드렸다.

“형아. 일나.”

“으음. 시… 하야? 하암. 일어났어? 왜 또 형아 위에 있어?”

“형아. 물 부족이야. 물 부족.”

“으응?”

시하가 병을 가리켰다.

어제보다 물이 줄어있었다.

“아…. 푸흡. 물 부족 맞네. 물이 우리 몰래 하늘로 날아갔나 보다.”

“왜?”

“물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려고. 정말 마법의 병이네. 그치?”

“아아!”

시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병을 바라보았다.

화장실에서 받은 물이 어디론가 떠나가는 게 신기했다.

“형아! 그림. 그림!”

“응?”

“시하 그림.”

시하는 호다닥 달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게 되었다.

시혁은 그런 시하의 선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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