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1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남은 30분 정도 발표를 했다.
이렇게 리포트를 발표하면서 학생들이 예쁜 피피티를 띄운다.
자신의 시에 멋진 배경을 넣어서 어떻게 이걸 고민했는지 설명한다.
이게 어떤 의미가 숨어져 있는지.
어떤 구성을 했는지.
교수가 출석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혁이가 하자.”
“네!”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에 있는 피피티를 켰다.
처음 등장한 것은 시하의 그림.
다채로운 색의 향연에 이게 무슨 그림인지 학생들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선이 없는 이 그림처럼 우리는 살다 보면 ‘무언가’에 물들여질지도 모릅니다. 흑백이 섞여 회색 인간이 되듯이 말이죠.”
하늘색과 흰색이 칠한 위쪽 부분을 가리켰다.
“그 속에서 청정한 하늘과 구름만이 섞이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곳에서 바라보고 적은 시조입니다. 43자의 자수율을 택했습니다.”
리모컨을 클릭하자 피피티 위에 글자가 새겨진다.
[일월이 어우러져 수림에 자수 놓고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굽어보네
지나는 바람을 타고 메아리가 노닌다
-가을산-]
다들 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발표가 계속됐다.
“이 시에서 산의 정상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들 정상에서 본 풍경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학생들이 ‘그러고 보니 그렇네.’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여기에 아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해와 달. 밤낮을 보는 수림인 사람들. 하늘에서 내가 구름이 되어 바라보니 그렇더라. 오롯이 그 속에서 말이라는 언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그 ‘무언가’는 말이라고 선언한다.
어른들의 가르침. 입에서 입으로 지성을 높이는 토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소문들.
그것들이 메아리처럼 이리저리 뛰어논다고 재밌게 표현했다.
학생들이 ‘오~’ 하며 눈을 반짝인다.
그만큼 시가 재밌게 표현돼 있다.
사실은 그런 뜻은 없고 그냥 가을산 정상에서 겪은 일을 시로 쓴 것뿐이다.
교수님도 그럴싸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린다.
“함축과 은유 그리고 운율이 들어있는 43자의 시를 지으며 그 시대의 풍류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산을 올라가 보니 그렇게 생각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아. 이렇게 박수를 받으니 괜히 민망해진다.
넣어둬. 넣어둬. 사실 그냥 풍경을 보고 떠오른 대로 쓴 거야.
시하가 다 해줬지. 의미는 나중에 부여했다고.
물론 이 발표는 평가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서수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빠 대박. 진짜 잘 지으신 거 같아요. 그림하고 시가 어우러지니 진짜 찰떡같은 설명이 되는걸요. 색이 물들어가는 거. 하늘은 물들이지 않는 거. 와. 시의 해석을 돕기도 하는구나.”
“아, 그래?”
“네. 다들 배경은 예쁜 거나 시와 관련된 걸 썼는데 오빠는 그림의 숨은 의미가 해석해 주는 걸 선택했잖아요. 진짜 그런 식으로 연출할 수 있을 줄 생각도 못 했어요.”
“하하.”
이거 그냥 시하 그림이야…….
물론 색이 물들여가는 걸 시하가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나중에 칠했으니 당연히 물들여지지는 않았겠지. 음. 모르겠다.
하여간 여기에 의미를 대충 붙였는데 뭔가 착착 맞아떨어져서 편한 것도 있었다.
고놈의 숨은 의미!
참으로 많기도 하다.
“그런데 오빠. 저는 숨은 의미가 아니라 숨은 사람을 찾은 거 있죠.”
“응? 뭔 소리야?”
“저기.”
나는 서수현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앞쪽 문에 붙여진 유리.
거기에 화학과 교수가 있었다.
‘진짜 숨은 의미… 가 아니라 숨은 사람이 있네?’
***
-휴게실.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따뜻한 밀크커피를 교수님에게 건넨다.
화학과 정용수 교수.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행동이 빠른 분이다.
뭐든 한번 결정하면 밀고 들어가는 타입인 것 같다.
한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한 걸 보니 대충 성격이 유추된다.
“여기까지 오실 줄 몰랐어요.”
“사실 과사에 연락하긴 했는데 답이 궁금해서 왔지. 내가 찾은 게 맞나 싶어서.”
“오! 답을 찾으셨어요?”
“그래. 웰빙 맞지?”
“하하하. 네. 맞아요.”
“근데 왜 웰빙이지? 이미 붐은 지난 거 아닌가?”
“그게 베트남은 아니거든요. 이제야 슬슬 시작할 주기가 됐다고 판단했어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베트남의 문화 방향성과 사는 모습을 보면 예전 한국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
그리고 너튜브가 점점 장악하게 되면서 문화 장벽은 한층 허물어진 상태.
젊은 사람들은 굉장히 빠르게 문화를 접하며 변화해 간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얼마나 빨리 변할까?
같은 하늘 아래에서 태양과 달을 보는 거로 부족하다 못해 빠르게 물들어간다.
그걸 가능하게 되는 매체가 이미 만들어졌다.
“제가 미국 의류 쪽에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음?”
“패션에 관심이 있다는 건 결국 헤어스타일링을 찾아볼 수밖에 없죠. 동떨어진 건 아니니까.”
“그렇긴 하지.”
“그중에서 베트남 쪽 헤어 제품은 영국과 미국 기업이 1, 2위를 다투더군요. 특히 샴푸가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프레이 아닌가?”
“네. 그렇죠. 일단 들어보세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쪽 자료까지 받아보게 되었는데 헤어 제품 매출액은 매년 증가하더군요. 2014년에는 5억 달러, 2015년에는 5억 4천 달러.”
내 말이 흥미로운지 아주 집중해서 듣고 계셨다.
하긴 정확한 수치를 말하니까 대충 예상은 가겠지.
“수입액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요. 그런데 샴푸는 안 됩니다. 이미 발을 들이기에는 늦었죠. 하지만 스프레이는 다릅니다. 굉장히 가능성이 크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향 좋은 샴푸나 헤어 제품을 찾으면서 스프레이는 이제 무향 제품을 찾을 겁니다. 그쵸?”
“그건 그렇지.”
“머리에 향이 계속 칠해지면 엉망이 되죠. 써본 사람은 압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무향 제품으로 만든 거고. 그것도 천연제품으로요.”
“그건 최대한 두피에 민감한 사람도 쓸 수 있게 만들려고 한 거지. 내 두피가 지루성이라.”
“그렇군요. 아무튼, 그게 웰빙에 먹힌다는 겁니다. 베트남 쪽도 우리와 같이 흘러갈 가능성이 크죠.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
외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관심을 가질 것이고 자기 피부 상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어 있다.
“뭐,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답이 되었나요?”
“근거는 확실하구만. 문화를 보라. 결국, 섞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이구만?”
“요즘은 좀 더 빠르게 섞이죠.”
“그렇지. 그래서 요즘 애들 따라가기가 워낙 힘들긴 해. 하하.”
목이 타서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이미 식어서 혀는 데이지 않았다.
손난로처럼 잡고 있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마시는 걸 깜빡했다.
그래도 한 번에 쭉 들이키는 것도 풍미가 있다.
역시 카페보다는 자판기 커피가 맛있지.
정용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일세.”
“아, 네.”
“혹시 우리 사업에 관심 없나? 통역사가 필요하긴 한데 말이지.”
“통역사요? 왜요?”
“왜긴. 베트남에 있는 유통업체랑 거래를 해보려고 그러지.”
“네?”
“그러니까 자네가 사업에 참여해서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전에 했던 제안보다는 훨씬 구체적이지?”
“하하. 아직은 주먹구구식인 거 같은데요?”
“하하. 내 짬밥 무시하지 말게.”
스읍. 천생연구자 같으신데…….
뭐, 그래도 여기저기 들으시는 게 있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식은 종이컵이 뜨거워지는 거 같다.
“좋아요. 한번 해 보죠.”
***
-어린이집.
시하는 친구들에게 등산을 간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허공에 산을 오른다.
“이케이케. 산 올라가. 지팡이 써.”
지팡이를 땅에 짚는 척을 했다.
승준이가 그걸 보며 벌떡 일어서더니 허리를 굽혔다.
지팡이 짚는 것을 따라 한다.
“할, 할아버지다.”
“아?”
“아냐! 할머니야! 할머니다!”
“아?”
쌍둥이 둘이서 신나게 할머니, 할아버지를 표현했다.
역시 지팡이를 하면 생각나나 보다.
등산 이야기는 이미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시하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산 머시써. 레드도 이써. 백동 거지 말해써. 도라지 머거써.”
“시하야. 도라지 먹었어?”
“아아. 마시써.”
“와! 난 그거 맛없던데. 웩이야. 소시지가 좋아.”
“시하도. 시하도. 소시지 조아.”
결국, 애들에게는 도라지보다 소시지의 손을 들어줬다.
그 얘기를 들은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인 자신도 굳이 꼽으라고 하면 도라지보다는 소시지에 한 표이긴 했으니.
이게 아니지!
“시하야. 선생님이 궁금한 점이 있어.”
“아?”
“시하가 등산 갔다고 했잖아. 산꼭대기까지 갔어? 산 제일 위에 있는 곳.”
“아아! 시하 정상 가써.”
“오! 정상이라는 말도 아는구나. 그런데 혼자 힘으로 갔니?”
시하는 선생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어서 기뻤다.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아? 아냐. 도라지 잡고.”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구나.
3살 이시하. 친절하게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아이였다.
“형아 등. 합체해써. 산 정상 가써.”
드디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그 뒤를 더 말할까 봐 얼른 끼어들었다.
“그래. 시하 혼자는 못 갔구나? 그렇지?”
“아냐. 시하 할 수 이써. 형아 합체하고 시퍼 해써.”
“아, 그렇구나. 형아가 그랬구나.”
상황이 그려졌다.
시하가 무리할까 봐 걱정돼서 시혁이 업고 가는 모습.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시하가 스스로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걸 탓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 시하야. 다음번에는 좀 더 위를 목표로 하는 거예요.”
“아? 위?”
“네. 위에요. 위. 시하가 이번에 간 곳보다 한 발 더 올라가는 거예요. 그럼 시하가 더 대단해지겠죠?”
“아아!”
“다음에는 더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쵸? 아까도 시하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시하 할 수 이써!”
선생님이 시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살면서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게 중요하다.
그 목적지가 의욕이라는 걸 만들어줄 테니까.
“자, 그렇다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볼래요?”
“아?”
“후후후.”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들었다.
아이들이 그걸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저건 언제 준비한 걸까?
이제는 말 안 해도 익숙하게 선생님 앞에 자리 잡는다.
승준이 말한다.
“오늘은 어떤 이야긴데요?”
“바로 토끼와 거북이!”
“아. 그거 나 아는데!”
승준의 말에 동의하는지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옆에 있는 종수가 피식 웃었다.
“선생님이 그냥 토끼와 거북이를 말할 리가 없잖아.”
선생님이 대사를 뺏겼는지 입만 뻐끔거렸다.
이제 아이들이 나를 잘 아는구나 싶었다.
“흠흠. 맞아요. 여러분이 아는 그 토끼와 거북이는 길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거죠?”
“네!”
“하지만! 만약 거북이와 토끼가 물에서 수영대결을 했다면?!”
“!!!”
아이들이 전혀 생각 못 했다는 표정이다.
“물에서 대결하는 토끼와 거북이. 과연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죠?”
“네!”
“그럼 이야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펼쳤다.
어딘가 모르게 종수를 닮은 거북이와 시하를 닮은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시작은 늘 익숙한 서사.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고 있었어요. 거북이는 토끼에게 달리기에 져서 이번에는 물에서 대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토끼가 말했어요.”
“흥! 물에서 대결해도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넌 느림보 거북이라고.”
“거북이가 코웃음을 치며 토끼를 도발했습니다.”
“왜? 나한테 질 것 같아서 괜히 안 받아주는 거지?”
“하, 참나! 야! 광안리 해수욕장에 가!”
다음 장.
결국,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다.
수영으로는 거북이를 당해낼 수 없었다.
토끼가 분하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거북이가 말했다.
“내가 이겼네?”
“그래. 네가 이겼어.”
“그럼 정해졌네. 네가 가라. 하와이.”
“아직 1 대 1이거든! 누가 이 구역에서 떠날지 정해지는 건 아직 멀었어. 마지막 승부야.”
“그래. 바다에서 수영 대결 한 번 더 해.”
“아니야. 길에서 달리기 시합 한 번 더 해.”
“그럼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그렇게 토끼와 거북이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거북이의 승.
그걸 본 토끼가 말했다.
“시간을 좀 줘.”
“얼마나?”
“석 달. 석 달이면 너 이긴다.”
“석 달은 좀 많고. 한 달.”
“그래. 한 달.”
토끼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아~ 선생님~!!”
“흠흠.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선생님은 다음 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