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3/500)

193화

“달.”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가리킨 노란색은 달이었다.

충분히 애들이 할 만한 생각이었다.

시하가 빨강을 가리켰다.

“해.”

붉은 단풍은 어쩌면 뜨거운 햇볕에 익어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초록색은 무얼 뜻하는 걸까?

“종이.”

“종이?”

“초록 종이야. 해, 달 이써. 서꺼. 서꺼.”

“섞여 있다고?”

끄덕.

시하의 설명이 끝났는지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초록색 도화지에 해와 달이 물들여 놓는다.

하늘에 보이는 건 해인데 달까지 끌어들이니 참으로 시적인 것 같기도 하고 우연 같기도 하다.

그래도 색을 칠했다는 것에서 시하와 내 감상은 공통점을 가진다.

이번에는 조금 생각이 맞아 나가니 기분이 좋기도 하다.

그럴 때는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

“시하야. 여기 산에 올라왔을 때 말해야 하는 게 있어.”

“모야?”

“잘 봐. 야~호~”

[야~호~]

내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시하가 놀라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산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형아. 형아. 저기 형아? 요기 형아?”

“하하하. 목소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거야. 시하도 해 볼래?”

“아아. 야호.”

“큰 소리로.”

“형아!!”

아니. 야호를 해야지 형아를 큰 소리로 부르라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메아리는 ‘형아’라고 돌아온다.

시하가 신기한지 다시 한번 불렀다.

“형아!! 형아!! 형아!!”

“흠흠.”

“형아. 재미써.”

“굉장하지? 산에 있으면 이렇게 놀 수도 있어.”

“아아. 또 와. 산. 또 와.”

아…. 또 오는 건 조금 생각해 보면 안 될까?

매일은 안 될 것 같고 한 달에 한 번?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시하가 실망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또 오자. 대신 정상은 정말 정말 가끔만 오자.”

“왜?”

“여긴 가끔 봐야 멋지거든.”

옆에서 백동환이 눈치 없이 말한다.

“형님. 매일 와도 늘 색다르고 좋습니다.”

“오늘 색다른 내 모습 보여줘? 폭력적으로.”

“아. 왜 그러십니까.”

조용히 해. 넌 홀몸이지만 난 아니란 말이야.

내가 그렇게 속삭이자 알아들었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자신의 말을 정정한다.

“콜록. 시하야. 사실 가끔 와야 색다르고 좋아. 우리 정말 가끔 정상에 오르자.”

“아? 백동.”

“응?”

“또 거지 말 해써?”

“아니. 거짓말은 아닌데…. 가끔 오는 게 더 좋은 거야. 그리고 거지 말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니까.”

“백동 거지.”

“거지 아니고 거짓! 발음 조심 좀.”

내가 백동환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성우 아니랄까 봐 딕션 신경 쓰는 것 봐.

대충 알아들으면 되는 거지.

“뭐 진짜 오랜만에 오니까 좋긴 하네.”

“그렇죠?”

“아아. 조아. 형아. 형아.”

시하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나는 뭔가 싶어서 ‘응?’ 하고 물어보았다.

펭귄 가방이 열린다.

그 안에 비어 있는 줄 알았는데 뭔가가 불쑥 나온다.

“어? 이거 언제 챙겼어?”

“아아. 페페.”

펭귄 가방 안에 와이패드 가방이 나온다.

지퍼를 내리더니 패드를 꺼내서 펜을 잡는다.

제자리에서 철퍼덕 앉아 앞을 보기 시작했다.

선을 쓰지 않고 열심히 칠하기 시작했다.

초록, 노랑, 주황, 빨강.

채도의 차이가 살며시 들어가며 다양하게 어우러진다.

이게 그림이라기보다는 색을 기억하는 듯한 느낌이다.

시하가 캔버스 윗면에 파란색과 하늘색을 덮는다.

지우개로 옅게 지우면서 구름이 만들어진다.

‘불규칙하다.’

눈앞이 있는 산의 잎사귀같이 참으로 불규칙한 색들의 향연이다.

나와 백동은 한동안 시하가 그러고 있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음.’

저걸 보니 시가 떠오른다.

이번 강의에서 해야 하는 레포트 중에 하나.

아무래도 시하와 함께 본 이 풍경을 넣으면 어떨까?

“형아. 다 했어.”

“응. 근데 이게 뭐야?”

“해, 달, 초록 종이.”

“아하. 그렇구나. 여기 있는 색들을 그린 거야?”

“아아.”

“그럼 숲이야?”

“아냐.”

“그렇구나. 그럼 형아가 여기에 레이어 하나 더 만들어서 글 좀 적을까? 지금 안 적으면 까먹을 것 같거든.”

“아아.”

시하가 나에게 와이패드를 주었다.

나는 아까 생각해둔 말들을 위에 적었다.

43자의 자수율을.

“다 됐다.”

나는 만족스럽게 저장을 하고 와이패드를 시하에게 돌려주었다.

시하가 주섬주섬 와이패드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갈까?”

“아아. 가.”

우리는 그렇게 다시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올 때 시하는 백동환 등에 올라타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상쾌하고 기분 좋은 멜로디였다.

***

집으로 돌아와서 일단 먼저 시하와 함께 샤워했다.

따뜻한 물이 몸을 적시고, 비누 거품이 하수구로 빠져나간다.

시하가 찰방찰방 물 튀기기를 즐긴다.

다 씻고 나오는데 물기는 대충 닦아버려서 바닥에 물방울을 얹는다.

“시하야. 꼼꼼하게 닦아야지.”

“아냐. 시하 다 해써.”

“아닌데?”

“아냐. 다 해써. 다 해써.”

나는 도망가는 시하를 잡고 온몸을 꼼꼼하게 닦고 머리에 수건을 둘러주었다.

“형아도 닦고 있을 테니까 먼저 도라지 좀 봐.”

“아아.”

시하가 검은 봉지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물기를 닦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형아. 도라지 잘 이써.”

“하하. 그래. 거기는 어떤지 물어볼래?”

“아아. 사라이써?”

아니. 당연히 살아있겠지…….

“형아. 도라지 샤어. 샤어 해.”

“샤워하고 싶어 한다고?”

“아아. 더러어. 더러어. 샤어 하고 자. 잔대.”

“오. 그렇게 말했어?”

“아아.”

실제로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아니, 조금 무서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검은 봉지를 들었다.

어차피 씻기는 해야 하니까.

“형아가 이걸로 도라지무침 만들어줄게. 남은 건 차로 우려먹자.”

시하가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안 좋아하면 내가 다 먹으면 되니까. 백동환도 나중에 와서 들고 갈 거다.

똑똑.

양반은 안되는 모양이다.

“네. 나가요.”

“형님. 씻고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안 그래도 지금 도라지 씻으려고 했거든.”

“그거 잘됐네요.”

우리는 본격적으로 씻기 시작했다.

시하도 열심히 옆에서 쪼물쪼물 거들어주었다.

씻기는 건지 아니면 쓰담쓰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함께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다음 단계는 시하가 도울 수 없어서 옆에서 응원해 달라고 했다.

백동환과 나는 앉아서 칼을 쥐었다.

다듬고, 자르고, 소금으로 박박 문지르고, 양념을 넣고 무치면 끝.

“오늘은 양념 간이 다 안 배어 있을 테니까 내일 먹자.”

“아? 시하 머글래.”

“으응? 지금? 지금 먹으면 좀 매울 텐데?”

“아냐. 시하 잘 머거.”

“어. 그렇지. 시하는 잘 먹지.”

내가 도라지무침 하나를 집어서 시하의 입에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잘 먹길래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형아.”

“응?”

“매어~”

“하하하. 형아가 맵다고 했잖아. 잠시만. 우유 줄게.”

내가 우유를 주자 시하가 꼴깍꼴깍 잘도 마셨다.

“근데 맛은 어때?”

“매어~”

“매운 것만 느껴졌어? 맛은 없지 않았고?”

“마시써? 아?”

아무래도 맛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이런 맛은 생전 처음이겠지.

그래도 양념이 좀 달아서 맛은 있을 것이다.

“밥이랑 먹으면 더 맛있어.”

“아아. 마시써.”

“잘 모르잖아. 너.”

“아냐. 아라.”

“그래. 그래. 시하는 다 알지?”

“아아.”

백동환이 옆에서 다가와 말했다.

“형님. 저 있는 거 잊어먹으신 거 아니죠?”

“어. 안 잊어먹었어. 여기 네 것도 챙겨뒀잖아.”

“흠흠. 감사합니다.”

“뭔 감사야. 너도 같이했으면서.”

아무튼, 우리의 등산은 이렇게 끝이 났다.

운동도 하고 몸에 좋은 것도 먹고.

이게 바로 웰빙이지.

***

-강인대학교. 화학과 정용수 연구실.

정용수는 일전의 시혁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베트남에 팔면 좋을 것 같다는 말.

근거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학교에 있는 베트남 유학생과도 말을 나누었다.

그런데 들어보니 베트남에서 잘 팔릴지는 모르게 되었다.

‘향 좋은 제품들이 팔린다고 했어.’

하지만 자신들이 만든 건 무향 제품이다.

무향 제품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베트남에서 팔릴 거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흠.”

뭔가 특색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혹시 자신이 뭔가 놓친 부분이 있나 싶었지만, 이 역시 모르겠다.

정용수가 앞에 있는 대학원생에게 물었다.

“이게 베트남에서 잘 팔릴 거라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알겠나?”

“아, 그거요? 전 알 것 같은데요.”

“뭐? 정말?”

“네. 전에 만난 국문과 학생이 그렇게 말해서 조금 생각해 봤어요. 저희 천연성분들이 포함돼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한국도 웰빙이 중요시되니까.”

“그건 그렇지.”

웰빙이라는 단어가 나온 지는 꽤 됐으나 정작 한국에 정착하기에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물론 한창 붐이 일었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지금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건강에 사람들이 관심이 많았다.

“그럼 한국에서 팔아도 먹히는 거 아닐까?”

“에이. 그게 어디 쉽나요. 이미 다른 곳이 시장 파이를 다 먹었는데.”

“그러니 대기업에 넣어봐야지. 일단 이름값은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 고민하시는 거 아니에요? 직접 해외 유통 업자와 계약하고 싶어서. 학교 사업으로는 이렇게 뚫어놓는 것도 좋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정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다.

일단은 국문과 이시혁을 만나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과사에 연락해서 이시혁이라는 학생이 강의를 언제 듣는지 좀 알아와. 전화번호는 안 알려주겠지?”

“학교 사업 제안이라고 하면 대신 전해줄걸요? 교수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면. 그 정도 융통성은 있겠죠. 그런데요. 교수님.”

“왜?”

“알아보니까 이시혁이라는 학생 엄청 유명하던데요?”

“나도 알아. 우리 학교에 그런 특이한 학생이 있다는 건 찾아봐서 알았지만.”

활약하는 졸업생들은 많다.

하지만 대학생인 신분으로 이렇게 활약하는 학생이 몇이나 되겠나.

통역사 커리어가 대기업들과 줄줄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이게 뭔 대학생인가. 그냥 통역사지.

“스읍. 이렇게 되면 우리도 통역사가 필요하긴 한데.”

“아, 그럼 프로젝트에 이름 넣을까요?”

“학생이 허락한다면 넣어야지. 지금 마음대로 넣으면 어떡해.”

“제가 말을 생략했네요. 저도 그 말이었어요.”

대학원생이 국문과 사무실에 연락한다.

정용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다.

자연스럽게 웃으며 오가는 대화 속에 이야기가 잘돼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강의가 오늘 하나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 뒤는 일정이 없다시피 하니 정용수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통화가 끝나자 대학원생이 황당하다는 듯이 교수를 보았다.

“교수님. 왜 벌써 외투 챙기세요?”

“흠흠. 강의가 곧 끝난다잖아. 잠깐 얼굴 보러 가서 약속을 잡지 뭐.”

“엥? 이쪽 과사에서 번호 알려줘도 되냐고 물어보고 연락해 준다는데요?”

“사실 연락처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왜 베트남이라고 콕 집었는지 궁금하잖아. 우리가 찾은 답이 맞는지도 확인해볼 겸.”

“아, 웰빙이요?”

“그래.”

“교수님이 그러시니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저도 갈까요?”

“넌 있어. 한꺼번에 가면 부담스럽잖아.”

“차라리 제가 가는 게 덜 부담스러울 텐데요?”

정용수는 못 들은 척 외투를 입었다.

문을 열고 곧바로 시혁이 강의하는 데로 찾아갔다.

아직 끝나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지 강의실 안에는 학생 한 명이 발표를 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이시혁.

스크린에 피피티를 띄우고 자신이 만든 시를 발표하는 것 같았다.

여러 색감 있는 그림이 먼저 눈을 잡아끈다.

마치 화학적 반응처럼 여러 색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듯했다.

‘근데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러네. 뭐라고 적혀 있지?’

눈으로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그 시를 읽고야 저 그림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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